부활의 첫 증인, ‘여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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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3,113회 작성일 15-04-05 12:59본문
부활의 첫 증인, ‘여인들’
마28:1~10
2015. 4/5. 08:00, 11:00(부활주일)
사람들은 내가 다시 살아나기를 바랄까?
미국에 사는 유대인 노부부가 성지순례 겸 고국 이스라엘을 찾았다. 그런데 갑자기 아내가 그곳에서 심장마비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 남편은 장의사를 찾아 시신처리와 장례절차를 물었고, 장의사는 두 가지 방법을 제시했다. 하나는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땅에 묻힐 경우 축복도 받고 비용도 150달러면 충분하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시신을 방부처리해서 미국으로 보내는 방식인데, 절차도 번거롭고 비용도 5천 달러나 된다는 것이었다. 망설이던 노인은 비용이 많이 들더라도 미국으로 시신을 옮겨 장례를 치르겠다고 했다. 장의사는 노인의 말을 듣고 감동했다. ‘부인을 정말 사랑하셨군요. 가까운 곳에 부인의 묘지를 두시려는 마음이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그러자 노인이 말했다. ‘아, 그게 아니고요. 아내가 이곳에 묻히면 그 옛날 어느 분처럼 다시 살아날지도 모르잖아요. 그래서 돈이 들더라도 확실하게 해두는 것이 낫겠다 싶어서요.’
한마디로 그럴 일은 없겠지만 자기 아내가 다시 살아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뜻이다. 이 글을 읽고 병원을 소재로 한 외국 영화가 생각이 났다. 어떤 나라 독재자가 위급하여 병원에 입원을 하였는데, 젊은 의사들이 고민을 한다. 이 사람을 치료해서 살려놓으면 또 수많은 사람을 괴롭히고 죽일 것인데 그래도 살려야 하느냐는 것이다.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그래도 살려야 하는가? 아니면 죽게 두어야 하는가? 그러면서 또 이런 생각을 했다. ‘내가 죽은 후에 사람들이 내가 다시 살아나기를 바랄까? 아니면 그냥 죽어 있기를 바랄까? 나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리워할까?’ 여러분이 죽은 후에 남편이나 아내, 자녀들, 그리고 주변 사람들이 여러분이 다시 살아나기를 바랄까? 아니면 그냥 죽어 있기를 바랄까?
죽음은 끝이 아니다!
사람이 행복하지 못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그러면 왜 죽음을 두려워할까? 죽으면 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죽으면 더 이상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살 수 없고, 그동안 어렵게 모은 재산도, 명예도, 영예도 다 놓고 가야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곧 상실에 대한 두려움이다. 이런 두려움은 사람으로 하여금 삶에 집착하도록 만든다. 삶에 대한 집착은 한편으로는 욕심을 낳고, 다른 한편으로는 불안을 낳는다. 욕심에 물들고 불안에 시달리는 사람이 어떻게 행복하고, 평안하고, 기뻐할 수 있겠는가? 그러면 어떻게 우리를 불행으로 몰아가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아무튼 죽음은 온 인류를 압제하는 원수다. 모든 사람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사실 하루를 산다는 것은 그만큼 죽음을 향해 다가가고 있다는 뜻이다. 사람은 일평생 죽음의 공포 가운데 지내다가 결국은 죽고 만다. 하지만 인류가 아직도 극복하지 못하고 해결하지 못한 것이 죽음이다. 이것은 앞으로도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지식과 기술이 발달해도 죽음의 문제만은 영원히 해결하지 못할 것이다. 죽음은 지식과 기술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죽음은 죄의 결과로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해결할 수 없다. 그렇지만 신자에게 죽음은 최대의 원수, 최대의 적이라는 관점이 아니라 부활과 영생, 곧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는 문이다. 어느 신학자(Hoekema)는 죽음을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가장 두려워하는 대적자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의 복락에 들어가는 문을 열어주는 하인이 되었다.’ 신자에게 죽음은 원수가 아니라 하인이고, 친구라는 것이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영광스러운 새로운 시작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신자들은 죽음을 적극적으로 선택하기도 한다. 이를 ‘순교’라고 한다. 순교란 주님을 위해 선택한 죽음으로, 주님과 주님의 복음, 그리고 주님의 나라를 위하여 자발적으로 죽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성경은 신자의 죽음을 하나님이 보시기에 귀한 것으로(시116:15), 주님 품에 안겨서 쉬는 복된 안식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행7:60, 계14:13). 어떻게 폭군인 죽음을 하인으로 친구로 생각하고, 끝이 아니라 영광스러운 새로운 시작으로 생각하게 된 것일까? 이러한 태도의 변화가 어디서 온 것일까? 주님의 부활이다. 주님의 부활은 주님께서 사망권세를 이기시고, 정복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에게는 죽이는 능력은 있지만 살릴 수 있는 능력은 없다. 부활은 죽은 자를 살리는 능력이다. 생명의 역사가 바로 부활이다. 부활이란 자연 현상이 아니다. 식물이 싹이 나고 시들고 다시 나는 것처럼 자연적인 생명의 과정이 아니다. 부활은 하나님의 창조 계시다. 철학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말한다. ‘정의는 죽을 수가 없기에 주님이 부활했고, 사랑은 영원하기 때문에 주님이 부활했다. 즉 진리가 영원하기 때문에 주님이 부활했다.’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주님이 부활하셨기에 진리가 영원한 것이고, 주님이 부활하셨기에 사랑이 영원한 것이 되는 것이다. 주님이 부활하셨기에 정의는 죽을 수가 없는 것이다. 바울의 말처럼, 만일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모든 주장은 다 헛것이 되고 만다. 모든 외침은 다 쓸데없는 메아리로 흩어져 버릴 것이다. 오늘이 있기에 내일을 믿는 것이 아니다. 내일이 있기에 오늘을 믿는 것이다.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그 부활의 신앙에 근거하여 우리는 오늘을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오늘이 부활하신 주님을 축하하는 그 부활주일이다. 본문은 그 부활의 첫 증인들 이야기다(본문설명). 그런데 그 증인 모두가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한 여성들이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교훈을 준다.
주님의 부활은 역사적 사실이다.
이것은 우선, 부활의 ‘역사성과 사실성’을 반증한다. 당시(1세기) 유대 사회에서 여성을 낮추어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었다. 그래서 당시 여성은 법적 증인으로 설 자격이 없었다. 크레이그(Craig Keener)는 당시 여성의 상황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여인들의 증거는 그 당시 아무 효력이 없었으며, 심지어 법정에서 증인으로 설 수 없었다. 만일 어떤 남자가 범죄하는 장면을 어떤 여인이 보았다고 해도 그 여인의 증거를 근거로 그 남자가 유죄판결을 받을 수 없었다. 이유는 여인의 증거는 가치가 없을 뿐만 아니라 법정에서 받아들이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는 그의 저서에서 ‘율법도 그렇게 말하는바 여자는 남자보다 모든 면에서 열등하다.’고 했다. 유대 사회에서 여성은 멸시를 받거나 착취, 또는 학대받는 것이 일쑤였다. 여성은 계수에도 들지 못했다. 그래서 당시 유대 남성은 이방인이나 여자로 태어나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하고, 여성은 여자가 되었음을 슬프게 생각하며 하나님께 감사했다.
그런데 성경은 이런 여성이 주님의 부활이란 엄청난 사건의 첫 목격자이고 증인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참으로 난처한 일이다. 그들의 증거는 법적으로 효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그들을 첫 증인이라고 말씀하였고, 그들의 이야기를 그대로 기록하였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이는 간단하다. 사실이기 때문이다. 주님의 부활이 사실이고, 이 여인들이 가장 먼저 그것을 목격한 것도 사실이고, 또한 증거한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에 적대적이거나 회의적인 사람들은 주님의 부활을 훗날 교회가 꾸며낸 이야기라며 부활의 역사성과 사실성을 부인한다. 그들의 주장대로 부활이 꾸며낸 이야기라면 증거능력이 없는 여성이 아니라 베드로나 요한과 같은 남성을 증인으로 기록했을 것이다. 하지만 성경은 첫 증인이 여성이라는 사실을 그대로 기록하였다. 이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나의 전부인 주님
그리고 다음은, 신앙에서는 ‘얼마나 주님을 사랑하고, 얼마나 주님을 소중히 여기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마리아의 고백」이라는 어떤 분의 글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의아심으로, 약간은 질투심으로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왜 그러셨을까? 왜 부활하신 주님이 그녀에게 가장 먼저 나타나셨고, 그녀에게 부활의 증인이 되게 하셨을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막달라 마리아가 그들에게 이렇게 대답한다. ‘까닭을 알고 싶은가요? 왜냐하면 내가 그곳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언제나 그곳에 있었답니다.......까닭을 알고 싶은가요? 왜냐하면 나에게는 그분이 전부였기 때문입니다. 내 사랑이 향할 데도 그분이었고, 내 관심이 쏠릴 데도 그분이었고, 내 시간이 바쳐질 데도 그분이었습니다......’ 그렇다. 주님과 가까이 있는 사람, 함께 있는 사람이 주님을 가장 먼저 보게 되고, 가장 먼저 알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물리적인 거리와 정신적/ 영적인 거리는 비례한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는 법이다. 그리고 이렇게 주님을 가까이 할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을 자신의 전부로, 유일한 의미로 여기며 사랑하였기 때문이다.
다른 남성 제자들보다 먼저 이 여성들이 주님의 부활을 목격하고, 부활의 첫 증인이 될 것은 주님을 전부로 여기며 늘 주님과 가까이 있었기 때문이다. 신앙 안에서는 남자나 여자, 유대인과 이방인, 어른과 아이, 지식의 유무, 지위의 높고 낮음, 그리고 교회 안에서 그가 가진 직책이나 직분이 중요하지 않다.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고, 얼마나 소중히 여기느냐가 중요하다. 멸시와 착취, 학대를 당하고, 존재감을 인정받지도 못한 여성들이었지만 주님을 자신의 전부로 여기며 사랑하고 가까이 했기에 가장 먼저 부활의 주님을 만났고, 부활의 증인이 되었다. 저와 여러분도 이런 은혜와 영광의 주인공이 되기를 바란다. 그것은 부활의 첫 증인이 된 여성들처럼 주님을 자신의 전부로, 자신의 유일한 의미로 여기며 사랑하는 것이다. 그 주님을 늘 가까이, 그래서 늘 함께 하는 삶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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