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을 영광으로 생각한 사람들, ‘베드로와 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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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2,257회 작성일 15-03-15 12:57본문
고난을 영광으로 생각한 사람들, ‘베드로와 요한’
행5:33~42
2015. 3/15. 08:00, 11:00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
하나님은 ‘측량할 수가 없는 분’이시다. 우리의 생각에 다 담을 수 없고, 우리의 지식과 경험으로 다 표현할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는 분이시다. 그런데 우리는 그 크신 하나님을 내 생각, 내 지식, 내 경험으로 판단하고, 또한 제한시키고 있다. 이는 작은 찻잔으로 바닷물을 퍼내겠다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짓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내 생각, 내 지식, 내 경험을 내려놓고 비록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믿고 따르는 것이다. 겸손하게 순종하는 것이다. 본문의 사건도 그 중에 하나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미문에서 구걸하는 앉은뱅이 걸인을 ‘예수 이름으로’ 걷게 한 사건(행3:)으로 단숨에 예루살렘에서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 이로 인하여 복음이 폭발적으로 전파되었다. 이를 시기한 유대 교권자들이 사도들을 잡아다가 협박하고 위협하며(행4:17,18), 옥에 가두기도 했으나(행5:18) 소용이 없었다(행4:19,20, 5:29). 그렇다고 백성들이 그토록 따르는 그들을 죽일 수도 없었다(행4:21). 하지만 크게 화가 난 교권자들은 공의회를 열어 사도들을 없애려고 했다(행5:33).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 주님도 죽였는데, 그의 제자인 사도들을 못 죽이겠는가? 그런데 여기서 뜻하지 않는 일이 일어났다. 유명한 율법학자요 모두에게 존경받는 가말리엘이 일어나서 이 문제를 보다 신중하게 처리하자는 의견을 제시하여 그렇게 하기로 한 것이다. 그리하여 사도들은 채찍질만 당하고 곧 풀려났다. 하나님은 사도들을 교권자들의 손아귀에서 교권자 중 한 사람인 가말리엘을 통하여 벗어나게 하신 것이다. 즉 적을 통해서 적들의 손에서 사도들은 구해낸 것이다. 사도행전에는 이와 비슷한 사건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고, 누구보다 이런 사건을 많이 경험했던 바울은 그래서 하나님을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 분’(롬8:28)이라고 고백했다. 우린 이 크고 놀라우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이 하나님을 굳게 믿고 따라간다면 우리 인생은 항상 ‘맑음’이다.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일찍이,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팔복의 말씀을 주실 때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마5:11,12a). 주님을 위해 욕을 먹고, 박해를 당해도 기뻐하고 즐거워하라는 말씀이다. 베드로와 요한이 이 말씀을 본문에서 실천하였다.
“그들이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40,41).
대부분의 사람은 작은 어려움에도 힘들어하고 고통을 받으면 괴로워한다. 근심하고 걱정하며 심지어는 좌절하고 낙심하기도 한다. 억울하게 이런 일을 당할 경우엔 더욱 힘들어한다. 신앙생활을 하다가 이런 일을 당하면 더더욱 실망한다. 베드로와 요한은 사십 평생 앉은뱅이 거지로 살아온 사람을 걷게 하였다. 칭찬을 받아도 아깝지 않는 귀한 일을 한 것이다. 그런데도 칭찬은커녕 오히려 국가 최고기관으로부터 채찍질을 당했다. 여기서 채찍질은 단순히 매 몇 대 맞는 것이 아니다. 옷을 벗기고 가죽 채찍으로 가슴과 등을 39번 때리는 태형(笞刑)이다. 요세푸스는 이를 ‘수치스러운 일’이라 했고, 그래서 본문은 ‘능욕 받는 일’이라 표현하였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이런 억울하고 수치스러운 일을 당하고도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도리어 기뻐하였다는 것이다. 여기서 ‘기뻐하면서’는 현재분사다.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매를 맞고, 모욕과 수치를 당하고, 고난 받는 것을 ‘습관적으로’ 기뻐하였다는 의미다. 그러니까 본문과 같은 일이 처음이 아니라 지금까지 여러 번 있었다는 것이고, 그 때마다 기뻐하였다는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일까?
성령의 능력으로 살았기 때문이다.
베드로와 요한이 처음부터 고난이나 핍박을 두려워하지 않고 기뻐한 것이 아니다. 그들도 처음엔 두려워했다. 비겁한 겁쟁이들이었다. 주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붙잡히시자 두려워서 비겁하게 도망쳤고, 베드로의 경우는 주님을 부인한 것도 모자라 저주까지 했다. 주님이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듣고도 문을 걸어 잠그고 숨어있었고, 낙심하여 다시 옛 생활로 돌아가기도 했다. 그런데 이런 그들이 이렇게 놀랍도록 변하여 주님과 주님의 복음을 위해 핍박 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핍박 받는 것을 기쁘고 자랑스럽게 여겼다. 무엇이 그들을 이렇게 변화시킨 것일까? 바로 ‘성령님’이시다.
주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성령을 기다리라’(행1:4,5)고 하셨고, ‘성령이 임해야 권능을 받고, 권능을 받아야 증인이 된다.’(행1:8)고 하셨다. 여기서 ‘권능’이란 주님과 주님의 복음을 위하여 핍박을 받고, 나아가서 죽을 수 있는 능력을 뜻한다. 실제로 오순절 성령체험이후 그들의 삶이 완전히 바뀌었다(행2:). 그들의 변화에 세상 사람들이 깜짝 놀랐다(4:13). 그들은 문빗장을 열고 거리로 뛰쳐나와서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나사렛 예수가 우리가 기다리던 그리스도’(42)라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파했다. 그래서 하루에 3천 명, 5천 명의 사람들이 회개하며 주님을 믿었다. 이 때문에 교권자들 앞에 불려가 복음을 증거하지 말라는 경고도 받고, 옥에 갇혀 위협도 받았다. 한 마디로 그들을 영적 벙어리로 혹은 영적 앉은뱅이로 만들려는 속셈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행4:19,20)고 했다. 불복선언으로 담대하게 맞선 것이다. 이렇게 그들은 사람의 말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 이는 보이는 사람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더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면 더 이상 마귀도 사람도 세상도 세상의 권력도 핍박이나 환난도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이런 능력이 성령을 통해 주어졌다. 그들은 성령의 능력으로 핍박도 기뻐하면서 주님과 주님의 복음에 헌신했다.
주님과 주님의 복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한 소녀에게 소원을 말해보라고 하셨다. 소녀는 아직 없다고 말하고 생기면 말하겠다고 했다. 어느 날 그 소녀가 하나님께 소원을 말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습니다. 그 사람이 절 알게 해주세요.’ 이렇게 첫 번째 소원을 말했다. 또 어느 날 소녀가 급히 하나님께 소원을 말했다. ‘저에게 그 사람에게 고백할 수 있는 용기를 주세요.’ 이렇게 두 번째 소원도 이루어졌다. 소녀는 또 하나님께 소원을 빌었다. ‘그를 살려주세요. 그가 죽어가고 있어요.’ 하지만 하나님은 사람의 운명은 바꿀 수 없는 것이라며 거절했다. 그러자 소녀가 말했다. ‘그럼 제 목숨을 가져가시고 그를 살려주세요.’ 그러자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후회는 없느냐? 마지막으로 소원을 하나 더 들어주마!’ 소녀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그의 기억 속에서 저를 지워주세요. 그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기 싫어요.’ 하나님은 그 마지막 소원도 들어주셨다.
그렇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자신을 대신 줄 뿐만 아니라 자기로 인하여 괴로워하지 않도록 그의 기억에서까지 지워지를 바라는 소녀처럼, 사람은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나 아끼고 존경하는 사람을 위해선 무엇을 해도 아까워하지 않는다. 불이익을 당하거나 어려움을 당해도 오히려 그것을 기쁘고 자랑스럽게 여긴다. 보람으로 행복으로 생각한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이나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베드로와 요한이 주님과 주님의 복음 때문에 교권자들에게 채찍질을 당하고 능욕을 받으면서도 기뻐할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이유가 바로 이 점이다. 그들은 주님을 자신의 목숨보다 더 사랑했다. 주님의 복음을 자랑스럽게 여겼고, 복음 전하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했다. 그러니 그들에겐 핍박이 문제가 될 수 없었다. 핍박을 받으면서도 날마다 어디서든지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고 전도하기를 그치지 않았던 것이다(42). 그들은 핍박을 받으면서도 핍박을 당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한 것이 아니라 어떤 핍박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파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행4:29). 그만큼 주님과 주님의 복음을 사랑하고 자랑스럽게 여겼기 때문이다. 바로 이 점을 오늘 우리가 회복해야 한다. 여러분은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고, 주님의 복음을 얼마나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는가?
순교의 신학, 순교의 신앙
조셉 톤 목사는 루마니아 공산정권의 경계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루마니아 정부는 국제적인 여론 때문에 차마 그를 처형하지는 못하고 국외로 추방하였다. 그는 미국으로 가서 여러 신학교에서 설교를 하였는데,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당신의 신학은 무엇입니까?’ 라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내게는 단 하나의 신학밖에는 없습니다. 나의 신학은 순교의 신학입니다. 그리고 단 하나의 신앙밖에는 알지 못합니다. 그것은 순교의 신앙입니다.’ 그리고 1990년대가 되어 공산권이 무너지고 동구권이 개방되었다. 그때, 한 기자가 그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동구권이 개방되는 것에 대한 소감이 어떻습니까?’ 이 질문에 그는 ‘두렵습니다.’고 짧게 대답했다. 기자가 의아한 얼굴로 ‘아니, 조국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가 왔는데 왜 두려워하십니까?’ 라고 다시 물었다. 그러자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나의 조국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 받는 것을 은혜로 여기며 사는 성도가 많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위해 고난을 받고 핍박을 받더라도 그것 때문에 더 주님을 바라보고 더 열심을 냅니다. 하지만 이제 개방이 되어 돌아갔을 때, 내 조국의 교회가 주님을 위한 고난을 은혜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로만 채워질까 두렵습니다.’
평화로운 시기에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은혜이고 복이다. 하지만 교회사를 보면 교회가 가장 순수했던 때는 핍박을 받던 때였다. 핍박이 심하다보니 세상에 대한 욕심이나 미련을 두지 않고 천국에 대한 소망으로 살았다. 모두가 힘드니까 서로 위로하고 격려했고, 세상에 대한 욕심과 미련을 버리니까 부족한 중에도 사랑과 나눔을 실천할 수 있었고, 천국에 대한 소망으로 사니까 고난을 기쁨과 영광으로 여겼다. 초대교회가 그랬다. 본문은 이와 같은 초대교회의 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신자가 영광과 권력을 탐하면서 본질을 잃고 말았다. 물론 신자가 항상 핍박을 받거나 가난하게 살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부요할 때 탐심이 꿈틀거리고, 안전할 때 태만해지기 쉽고, 세속적인 성공을 노래하는 곳에는 골고다의 십자가가 설 자리가 없다. 그러면 부활의 영광도 없다. 베드로와 요한은 주님과 주님의 복음을 위해 핍박받는 것을 기뻐하였다. 그것은 그들이 성령의 능력으로 살았기 때문이다. 또한 주님과 주님을 복음을 사랑하고 자랑스럽게 여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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