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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증거가 된 사람, ‘나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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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2,393회 작성일 15-04-26 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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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증거가 된 사람, ‘나사로’

요12:9~11

2015. 4/26. 08:00, 11:00

앉은뱅이와 맹인

 기어 다니다시피 사는 가난한 앉은뱅이가 있었다. 추운 겨울밤이면 얼어 죽지 않으려고 남의 집 굴뚝을 끌어않고 밤을 보내고, 낮에는 장터를 돌며 구걸하여 먹고 살았다. 그러다 어느 날 장터에서 구걸하는 맹인을 만났다. 마치 헤어졌다 만난 부모형제처럼 두 사람은 끌어 앉고 울다가 함께 살기로 했다. 그래서 맹인이 앉은뱅이를 업고 다니며 앉은뱅이의 발이 되어주고, 앉은뱅이는 맹인의 눈이 되어주었다. 이렇게 서로 도우며 살았다. 이런 모습으로 그들이 장터에 나타나면 어려운 처지에 서로 돕고 사는 모습이 보기가 좋았던 사람들은 두 사람에게 넉넉한 인심을 보냈다. 그러자 구걸하여 살지만 예전보다는 형편이 좋아졌다. 그런데 보는 놈이 똑똑하다고, 점차 앉은뱅이는 맛있는 음식은 자신이 골라먹고 맹인에게는 좋지 않은 음식만 그것도 조금만 주었다. 그러다보니 앉은뱅이는 살이 쪄서 점점 무거워졌고, 맹인은 점점 약해져갔다. 어느 날 두 사람은 논길을 가다가 맹인이 힘이 빠져 쓰러지면서 두 사람 모두 도량에 쳐 박혀 죽고 말았다.

 

우리의 인생도, 삶도 마찬가지다. 볼 줄 안다고, 조금 힘이 있다고 자신만 챙기다보면 앉은뱅이의 실수를 할 수가 있다. 결국은 함께 망하게 되는 것이다. 성공에 대한 정의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겠지만 저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그 사람 덕에 산다. 혹은 그 사람 때문이다.’는 말을 들을 수 있어야 잘 산 것이고, 또한 성공이라고 생각한다. 식사 후 적극적으로 밥값을 계산하는 사람이 있다. 돈이 많아서 그런 것이 아니다. 돈보다 관계를 더 소중히 생각하기 때문이다. 일할 때 스스로 열심히 하는 사람이 있다. 남에게 잘 보이고 싶고, 혹은 바보스러워서 그런 것이 아니다. 책임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다툰 다음 먼저 사과하며 용서를 구하는 사람이 있다. 자신이 잘못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다. 상대방을 아끼고 사랑하기 때문이다. 늘 먼저 도와주는 사람이 있다. 한가하고, 넉넉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빚진 것이 있어서 그런 것은 더더욱 아니다. 늘 마음에 다른 사람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이 있기에, 이런 사람 때문에 아직은 세상이 살만한 곳이다. 신자에게 이 세상은 잠시 머무는 임시처소다. 거류민이고 나그네이기 때문이다(벧전2:11). 하지만 주변으로부터 ‘그들(신자와 교회) 덕에 산다. 혹은 그들 때문이다.’는 말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를 통해 세상 사람에게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세상이 주님을 찾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의 절친

본문은 존재 자체가 놀라운 증거가 되어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게 만든 사람의 이야기다. 그 주인공은 ‘나사로’라는 사람이다. 그는 정성스럽게 주님과 그 일행을 섬긴 ‘마르다’와 주님 발아래 앉아서 말씀을 배우고 주님께 향유를 부은 ‘마리아’의 오빠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4㎞정도 떨어진 베다니 마을에 살면서 주님께서 예루살렘을 방문하실 때마다 자신의 집을 쉴 곳으로 제공하며 섬겼던 사람이다. 그에 대한 기사는 요한복음에만 나오는데, 많은 학자들이 요한복음에 나온 ‘주께서 사랑하시는 제자’가 그일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일설에는, 그가 다윗 가문의 사람으로 상당히 부유했고 예루살렘을 자주 왕래하면서 예루살렘의 고위층과 친분이 많았고, 그래서 주님이 심문을 받을 때에 아무런 제지를 받지 않고 참관할 수 있었다고 한다(요18:15,16/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 한 사람이 나사로라는 것). 이런 주장의 핵심은 비록 그가 사도는 아니지만 그만큼 무게감이 있는 중요한 인물이라는 뜻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그를 ‘우리 친구’(요11:11)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친구를 ‘두 몸에 깃든 하나의 영혼’(아리스토텔레스)이라고 한다. 그러니 이는 그가 주님과 얼마나 친밀한 사람인가를 잘 보여주는 말씀이다. 얼마나 친밀하냐가 관계의 질을 결정한다. 그리고 신앙의 척도는 주님과의 관계에 있다. 주님과의 관계가 친밀할수록 좋은 신앙, 훌륭한 신앙이다. 사실 신앙생활이란 주님과의 간격을 좁히고, 친밀도를 높이는 과정이다. 그런데 주님은 그를 ‘친구’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기 바란다. 주님에게 나는 어떤 존재일까? 뿐만 아니라 위험하다며 유대지방으로 가지말자는 제자들의 만류를 뿌리치고(11:7,8), 찾아가서 죽은 지 나흘이나 된 그를 다시 살려주셨다(11:44). 이는 그를 향한 주님의 사랑을 잘 보여준다. 그에 대한 주님의 사랑은 각별했다(11:3,5,35,36). 왜냐하면 친구니까! 그리고 친구를 위해서 죽는 것보다 큰 사랑이 없기 때문이다(15:13).

 

주님께 감동을 준 사람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나사로 삼남매가 이처럼 주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은 것을 궁금하게 생각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들은 주님의 사랑을 받을만한 예쁜 짓을 많이 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주님이 예루살렘을 방문하실 때마다 자기 집으로 초대하여 음식과 쉴 곳을 제공하였다(마21:17, 눅10:38). 이는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일이다. 본문도 그 중 한 사건이다. 본문은 앞부분의 사건과 연결되어 있다. 나사로는 자신을 살려주신 주님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보은(報恩)의 잔치를 마련하였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그의 동생 마리아가 값비싼 향유를 주님의 발에 붙고 자기 머리털로 발을 닦아드리는 헌신의 사건이 있었다. 주님을 크게 감동시킨 사건이다. 사람은 누구나 사랑을 받으면 감동한다. 주님은 그들의 헌신과 사랑에 큰 감동을 받았다. 그러므로 그들이 주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은 것은 결국 심은 대로 거둔 것이다(갈6:7).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잠8:17)고 했다. 이는 당연하지만 아주 중요한 영적 관계의 원칙이다.

 

나사로 삼남매처럼 주님의 사랑을 받으려면 사랑 받을만한 예쁜 짓을 해야 한다. 주님을 감동시켜야 한다. 어느 목사님이 교회창립주일을 앞두고 정체된 교회를 생각하며 기도를 드리는데, 주님의 음성이 그의 마음을 쳤다. 주님이 이 교회를 사용하시기 원하지만 두 가지가 모자라다고 하셨다. 하나는 기도’가 모자라고, 다른 하나는 감동’이 모자라다는 것이었다. 주님을 감동시키는 기도, 헌신, 사랑, 예배와 섬김, 사건이 모자라고, 주님을 감동시키는 믿음의 사람이 모자라다는 것이다. 저는 이 이야기를 듣고, 이것은 모든 신자와 모든 교회에 해당되는 말씀이라 생각했다. 우리에게 모자란 것, 그리고 우리 교회에 모자란 것도 바로 이 두 가지다. 기도가 모자라고, 감동이 모자란 것이다. 그래서 주님이 쓰시고 싶어도 쓸 수가 없는 것이다. 주님의 은혜와 사랑이 막힌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주님을 감동시킨 사람은 나사로처럼 병이 들어 죽어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다시 살아나는 은혜와 복을 경험하게 된다. 저와 여러분, 그리고 우리 교회가 주님을 감동시킬 수 있기를 바란다.

 

나사로 때문에

본문에 아주 의미 있는 말씀이 나온다. 그것은 “나사로 때문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11). 나사로 때문에 많은 사람이 주님께 몰려왔고, 나사로 때문에 많은 사람이 주님을 믿게 되었다. 그리고 나사로 때문에 주님이 크게 영광을 받으셨다. 이것은 11장 사건과 관련이 있다. 11장은 죽은 지 나흘이 된 나사로를 주님께서 살려주신 사건이다.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이 사건은 요한복음에만 기록되어 있는 최후의 표적인 동시에 최대의 표적이다(➬그렇다면 이 중대한 사건이 공관복음서에는 왜 기록되지 않은 것일까? 그 이유는 나사로를 보호하기 위해서다. 본문에 기록된 대로 유대인들이 예수님뿐만 아니라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했고, 공관복음서가 기록될 당시까지 그가 살아있었기에 자칫 그가 유대인의 표적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요한복음은 그가 죽은 후에 기록되었다. 그래서 요한복음 그의 사건을 자유롭게 다룰 수가 있었다.). 병을 고친 것보다는 죽은 사람을 살린 것이 더 크고, 죽은 후 ‘즉시’ 살리거나(막5:41) 죽은 ‘당일’ 살린 것(눅7:15)보다 죽은 지 ‘나흘’이 지난 사람을 살린 것이 더 큰 표적이다. 나사로는 죽은 지 나흘이나 되었는데 주님께서 다시 살리셨다(➬왜 나흘인가? 당시 유대인은 사람이 죽으면 영혼이 사흘까지 죽은 사람 곁에 머물다가 나흘 만에 떠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때부터 시신의 부패가 시작된다. 그러니까 죽은 지 사흘까지는 죽은 사람이 살아날 가능성이 있지만 나흘이 되면 다시 살아날 가능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흘이란 나사로의 사건이 기적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사건이 이렇게 중대하다보니 이런 표적을 행하신 주님은 물론 표적의 당사자인 나사로까지 관심대상이 되었다. 그래서 주님을 위한 보은의 잔치에 많은 사람이 몰려왔는데, 그것은 ‘주님뿐만 아니라 나사로도 보기 위해서’였다(9). 그리고 ‘나사로 때문에’ 많은 사람이 주님을 믿게 되었다(11).

 

여기서 나사로 때문에 많은 사람이 주님을 믿게 되었다는 것은 ‘증거를 가진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많은 사람이 나사로를 보기 위해 몰려온 것은 그가 증거를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병이 들어 죽었고, 무덤에 갇혀서 썩은 냄새를 풍기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주님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생명을 얻어 무덤을 걸어 나오게 되었다. 은총의 표적을 가진 주인공이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를 보려고 몰려왔고, 그 때문에 많은 사람이 주님을 믿게 되었다. 그렇다. 무덤 속에 갇혀있는 사람, 썩어서 냄새를 풍기는 사람을 보려고 찾아오는 사람은 없다. 오늘날 교회와 신자의 문제가 바로 여기에 있다. 사람이 교회를 떠나고, 신자를 피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교회는 주검으로 가득 찬 무덤이 되었고, 신자는 썩은 냄새를 풍기는 시체가 되었기 때문이다. 사람이 찾아오는 교회, 많은 사람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신자가 되려면 교회는 빈무덤처럼 부활의 증거가 되고, 신자는 부활의 생명으로 가득해야 한다. 그래서 삶이 증거가 되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 우리에게 절실하게 요구되는 것이 엘리야의 기도다. 엘리야는 이렇게 기도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신 것과 내가 주의 종인 것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것을 행하는 것을 오늘 알게 하옵소서.”(왕상18:36). 삶이 증거가 되도록 은총의 표적을 달라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기도가 되기를 바란다. 그래서 우리의 삶에서 주님이 함께 하시는 증거, 곧 은총의 표적을 드러낼 수 있기를 바란다. 이런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그러면 많은 사람이 우리를 보려고 몰려올 것이고, 우리를 통하여 많은 사람이 주님을 믿게 될 것이다. 주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될 것이다. 여기에 삶의 목적을 두고 더욱 믿음에 정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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