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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까지 주님께 드린 사람, ‘스데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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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2,832회 작성일 15-03-22 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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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까지 주님께 드린 사람, ‘스데반’

행7:54-60

2015. 3/22. 08:00, 11:00

눈물이 나도록 살아라!(Live to the point of tears)

두 아이 엄마로 36세에 대장암 진단을 받고 세상을 떠난 영국인 샬롯 키틀리(Ch. keatley)가 죽기 전에 블로그에 올린 글이다.

 

살고 싶은 나날이 저리 많은데, 저한테는 허락하지 않네요. 내 아이들 커가는 모습도 보고 싶고, 남편에게 못된 마누라도 되면서 늙어보고 싶은데, 그럴 시간을 안 주네요. 죽음을 앞두니 그렇더라고요. 매일 아침 아이들에게 일어나라고, 서두르라고, 이 닦으라고 소리소리 지르는 나날이 행복이었더군요. 살고 싶어서, 해보라는 온갖 치료 다 받아봤어요.......그런데 아니더라고요. 귀한 시간 낭비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장례식 문제를 미리 처리해놓고 나니 매일 아침 내 아이들 껴안아주고 뽀뽀해줄 수 있다는 것이 새삼 감사하게 느껴졌어요. 얼마 후 나는 그이 곁에서 잠을 깨는 기쁨을 잃게 될 것이고, 그이는 무심코 커피 잔 두 개를 꺼냈다가 커피는 한 잔만 타도된다는 사실에 슬퍼하겠지요. 딸아이 머리도 땋아줘야 하는데. 아들 녀석 잃어버린 레고의 어느 조각이 어디에 굴러들어가 있는지는 저만 아는데, 앞으론 누가 찾아 줄까요. 6개월 시한부 판정을 받고 22개월 살았습니다. 그렇게 1년 보너스 덕에 아들 초등학교 입학 날 학교에 데려다 주는 기쁨을 품고 갈 수 있게 됐습니다. 녀석의 첫 번째 흔들거리던 이빨이 빠져 그 기념으로 자전거를 사주러갔을 때는 정말 행복했어요. 보너스 1년 덕에 30대 중반이 아니라 30대 후반까지 살고 가네요. 복부비만이요? 그거 한번 가져봤으면 좋겠습니다. 희어지는 머리카락이요? 그거 한번 뽑아봤으면 좋겠습니다. 그만큼 살아남는다는 얘기잖아요. 저는 한번 늙어보고 싶어요. 부디 삶을 즐기며 사세요. 두 손으로 삶을 꽉 붙드세요. 여러분이 부럽습니다.

 

삶이라는 것, 특히 살아있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하고 절실한가를 절절이 느끼게 한다. 그리고 어떤 모습으로든 살아있음이 얼마나 감사하고, 감사해야 할 일인지. 그저 하찮게 보이는 소소한 일상이 곧 행복이고 감사의 대상이라는 것도 말이다. 비록 눈물이 나도록 살고 있지는 못해도 살아있음을 감사하면서 살아야겠다고, 백년도 못사는 인생 천년을 살 것처럼 착각하지 않고 겸손하게 살아야겠다고 다짐한다. 이토록 소중한 것이 생명인데, 그 생명을 섬기는 예수님을 위해, 그의 복음을 위해 기꺼이 드린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을 순교자라고 부른다. 본문은 우리 기독교 역사에서 최초의 순교자 ‘스데반에 대한 말씀이다.

 

주님을 가장 닮은 사람

 2002년 월드컵 때 박지성 선수가 골을 넣고 히딩크 감독에게 껑충 뛰어 안긴 감동적인 장면을 기억할 것이다. 우리 믿음의 가장 감격스러운 장면도 이와 같은 것이다. 마지막 날에 주님의 품에 안겨 주님과 뜨겁게 포옹하는 것이다. 스데반은 사도들보다도 먼저, 그리고 최초로 주님과 뜨겁게 포옹한 첫 번째 신자다.

 

초대교회는 히브리어를 사용하고, 성경해석과 이방선교에 보수적인 입장을 가진 ‘히브리파’와 유대인이면서 헬라어를 사용하고, 성경해석과 이방선교에 개방적인 입장을 가진 ‘헬라파’(디아스포라)로 구성되었다. 히브리파는 자연스럽게 12사도와 주님의 동생 야고보가 중심이었고, 헬라파는 행6장에서 선출된 7명의 집사가 중심이었다. 그 가운데서 가장 출중한 인물이 바로 ‘스데반’이다. 그는 사도행전 초반부에서 가장 ‘예수님을 닮은’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본문에서 하나님의 보좌우편에서 앉아있지도 않고 선 채로 그를 맞아들이는 주님의 모습은 성경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는 감동적인 장면이다(56). 주님은 자신을 가장 닮은 그의 헌신과 순교를 가만히 앉아서 보고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를 격려하고 환영하기 위해 보좌에서 벌떡 일어나신 것이다. 이를 통해 주님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는 것을 주님이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알 수 있다. 성경에 희생과 관련된 단어가 많이 사용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믿음’은 246번, ‘소망’은 185번, ‘사랑’은 734번인데, ‘드리라’, ‘희생하다’는 2,285번). 본문은 그가 자신을 제물로 주님께 드리는 장면이다.

 

주님을 생각나게 하는 그의 죽음

그는 사도들이 복음전도에만 집중하기 위해 교회와 지체를 섬기도록 선출된 집사였다(행6:2,3). 하지만 복음전도자로 살다가 죽었다. 이는 교회의 모든 직분이 복음전도와 깊은 관련이 있음을 잘 보여준다. 은혜와 권능이 충만한 그는 큰 기사와 표적으로 사람들(주로 헬라파 유대인)에게 왕성한 복음전도활동을 했다(:8). 그러자 헬라파 유대인의 회당에서 사람들을 보내 그와 논쟁을 하게 했다(:9). 하지만 지혜와 성령으로 충만한 그를 당할 수가 없으니까 사람을 돈으로 매수하여 ‘그가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다’(:11)는 말을 퍼뜨리게 했다. 그들은 이 소문을 빌미로 그를 공회에 고발했고, 거짓증인들에게 그가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슬러 말했다’(:13)고 공회 앞에서 증언하게 했다. ‘성전과 율법, 그리고 그 율법을 주신 하나님을 모독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을 고발한 수법이나 내용과 똑같다. 거짓증인을 세워서 주님이 성전과 율법, 그리고 하나님을 모독했다고 증언하게 했다.

 

행7장은 스데반이 공회 앞에서 행한 공개적인 변론이자 설교다. 이는 사도 이외의 설교로서 유일하고, 사도를 포함한 모든 설교 중에 가장 길다. 내용은 구약의 역사를 통해서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입증하고, 그럼으로써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죽인 유대인의 죄를 지적한 것이다. 즉 그들의 역사는 배반의 역사였고, 예수님의 죽음은 단지 하나님에 대한 배척의 또 하나의 예라는 것이다(7:51~53). 그러자 분노한 그들이 그의 말을 막기 위해 ‘큰 소리를 지르고’, 그의 말을 듣지 않으려고 ‘귀를 막았다’(57). 대신 성령이 충만한 그에게 성령으로 대하지 못하고, 자신들이 자랑하는 율법으로도 대하지 못하자 오직 폭력으로 대했다. 그를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쳤다’(58). 이는 하나님을 떠난 멸망하는 자의 전형적인 모습이고, 악인이 쓰는 상투적인 방법이다. 아무튼 스데반의 최후 모습은 주님을 생각나게 한다. 그는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59)라고 자신의 영혼을 주님께 맡기는 기도를 드렸고, 또한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60)라고 핍박하는 사람들을 위해 용서의 기도를 드렸다. 이는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드린 기도와 정확히 일치한다. 이 사건은 주님께서 돌아가신지 얼마 되지 않은 주후 33년경에 일어났다. 때문에 그의 기도를 들은 사람들은 주님을 생생히 기억했을 것이다. 정말 주님을 생각나게 하는 죽음이었다.

 

이것은 그가 마지막 순간까지 주님을 본받기를 원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평안할 때는 주님을 닮은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어려운 순간에까지 주님을 닮기는 어렵다. 어려운 일이 생기면 주님을 버리고 도망가는 사람들이 생긴다. 그런데 그는 목숨이 끝나는 순간까지, 죽음의 고통 앞에서도 주님을 닮아가는 신앙인이었다. 그래서 주님을 가장 닮은, 주님을 생각나게 하는 사람이 된 것이다. 건강한 신자는 주님을 닮은 사람, 그래서 주님을 생각나게 하는 사람이다.

 

유대를 넘어서 세계로

복음의 세계화에는 스데반의 죽음과 사도 바울의 회심이 있다. 대개의 학자들은 이 두 사건을 하나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한다. 바울의 회심이 그의 죽음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아무튼 그의 죽음은 복음의 지평을 크게 확장시켰다. 물론 겉으로 그의 죽음은 대대적인 핍박을 몰고 왔다. 유대인은 이 기회에 교회를 완전히 무너뜨려 복음의 불씨를 소멸하려고 작정했다. 그래서 집집이 수색하여 신자를 잡아다가 옥에 가뒀다. 하지만 모든 일이 그들의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행8:1절,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고 되어 있다. 이는 단순히 흩어져 숨은 것이 아니다. 흩어져 복음을 전했다.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8:4). 스데반의 죽음으로 예루살렘에만 모여 있던 사람들이 유대와 사마리아로 흩어져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한 것이다. 비로소 행1:8절의 주님 말씀이 실현된 것이다. 특히 행11:19~30은 안디옥교회 설립에 대한 말씀이다. 안디옥교회는 최초로 선교사를 파송한 교회로 예루살렘교회가 교회의 기초를 놓았다면 안디옥교회는 선교의 기초를 만들었다. 땅 끝까지 주님의 증인이 되는 역할을 감당하는 교회다. 이 교회 역시 스데반의 순교로 흩어진 이들이 세웠다(11:19).

 

또 하나 본문에 기독교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 ‘사울’이라는 사람이 소개되고 있다. 물론 여기선 스데반의 죽음에 증인으로(58), 교회를 핍박하는데 앞장 선 사람으로 소개되고 있다(8:3). 하지만 9장에서 주님을 만난 다음 복음전도자가 되어, 특히 세계선교의 선봉이 되었다. 학자들은 스데반의 순교가 사울이란 청년의 회심에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고 한다. 스데반은 살아서보다 죽어서 더 큰 일을 한 것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는 주님의 말씀이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하신 것이다. 비록 그가 역사의 무대에 나타나서 단 한편의 설교만 남기고 사라졌지만 기독교 역사, 특히 기독교의 선교역사에 남긴 의의는 크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 죽음의 고통 앞에서도 주님을 닮고자 했고, 그래서 주님을 가장 닮은, 주님을 생각나게 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죽어선 한 알의 밀알처럼 많은 열매 맺었다. ‘잘 사는 것(well-being)만큼 중요한 것이 ‘잘 죽는 것’(well-dying)이다. 웰빙이 현재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하는 것이라면 웰다잉은 죽음의 순간과 죽음 이후까지 준비하는, 영적인 것까지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스데반은 우리에게 웰다잉의 좋은 모델이다.

 

순교의 신앙

순교에는 ‘적색’(赤色) 순교와 ‘백색’(白色) 순교 두 종류가 있다. 적색 순교는 스데반처럼 주님과 주님의 복음을 위해 직접 목숨을 바친 것이다. 반면 백색 순교는 비록 피를 흘리거나 목숨을 바치지는 않지만 주님을 사랑하여 날마다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기를 지고 사는 삶을 말한다. 날마다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지고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다. 오늘 우리는 신앙 때문에 피를 흘리거나 목숨을 걸 필요가 없는 시대를 살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순교의 신앙은 요구되고 있다. 백색 순교가 곧 순교의 신앙이다.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제물로 드리는 것이다. ​그래야 주님을 닮게 되고, 주님을 닮은 주님을 생각나게 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 또한 한 알의 밀알처럼 영적 열매가 풍성한 삶을 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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