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손이 되어 돌아온 사람, ‘나오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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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2,934회 작성일 15-03-08 13:06본문
빈손이 되어 돌아온 사람, ‘나오미’
룻1:19~22
2015. 3/8. 08:00, 11:00
선택에서 중요한 것은 방향이다.
아프리카 어느 마을에서는 결혼적령기 처녀들을 중심으로 옥수수 따기 행사를 한다고 한다. 처녀들이 옥수수 밭 한 고랑씩 맡아 그 고랑에서 제일 크고 좋은 옥수수 한 개를 따오는 것이다. 옥수수를 따는데 있어 엄격한 규칙이 있었다. 그것은 한번 지나치면 다시 돌아볼 수도, 다시 돌아가 딸 수도 없었다. 오직 앞만 보고 나아가다가 마음에 드는 옥수수를 따야했다. 그리고 한번 따면 그것을 버리고 다른 것을 딸 수도 없었다. 그래서 신중에 신중을 다해야만 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옥수수를 따러 들어간 처녀마다 나올 때 풀이 죽어 나온다고 한다. 그리고 손에는 못나고 형편없는 옥수수를 들고 나온다는 것이다. 이유는, 처녀들이 옥수를 딸 때 이거다 싶으면 저것이 더 좋아 보이고, 저거다 싶으면 이것이 더 좋아 보여서 주저하고 망설이다가 결국 고랑이 끝날 때에야 비로소 서둘러 선택하다보니 이렇게 형편없는 옥수수를 따게 된 것이고, 그래서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고 속상해서 풀이 죽어 밭을 나온다는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이 옥수수 따는 행사를 통해 결혼을 앞둔 처녀들에게 결혼은 선택이고, 그 선택의 중요성을 교훈한 것이다.
그렇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고, 그 선택에 따라 인생이 결정된다. 어떤 인생을 사느냐는 주어진 삶의 과제에서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좌우된다. 우리가 살면서 피할 수 없는 3가지 선택이 있다. 첫째는 직업의 선택(‘어떤 일을 하고 사냐?’), 둘째는 배우자의 선택(‘누구와 사느냐?’), 셋째는 신앙의 선택(‘무엇을 믿고 사느냐?’)이다. 어떤 일을 하고, 누구와 살고, 무엇을 믿고 사느냐는 인생에 가장 중요한 일이다. 그래서 제임스 답스는 ‘이 3가지 선택을 잘했다면 그는 이미 90%이상 성공적 삶을 산 것이다.’고 했다. 흔히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라고 말한다. 이 말은 선택에도 적용이 된다. 선택에서도 ‘방향’이 중요하다. 아무리 신중하게 선택을 한들 방향이 잘못되면 그 선택은 재앙이 되고 만다. 룻기가 이를 잘 보여준다. 룻기는 룻이라는 이방 여인을 주인공으로 한 선택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책이다. 특히 룻기 1장은 여러 사람의 선택이 기록되어 있다.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의 선택을 비롯해서 나오미의 선택, 나오미의 큰 며느리 오르바의 선택, 작은 며느리 룻의 선택이 나온다. 그런데 이 중에는 복을 부른 선택이 있고, 화(재앙)를 부른 선택이 있다.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의 선택은 재앙을 부른 선택이었다. 그것은 선택의 방향 때문이었다.
나를 ‘마라’라 부르라!
본문의 주인공 나오미는 ‘기쁨’이란 뜻의 아름다운 이름을 가진 여인이다. 그런데 그녀의 삶은 이름과는 달리 마라, 곧 ‘괴로움’의 연속이었다. 모압 생활 10년에 남편과 두 아들을 잃고(3,5), 게다가 풍족한 살림살이까지 다 잃은 빈털터리가 되었다(21). 그래서 그녀는 ‘나를 나오미(기쁨)라 부르지 말고 마라(괴로움)라 부르라’(20)고 했다. 그녀의 인생에 이런 괴로움이 몰아친 것은 선택과 깊은 관련이 있다. 특히 선택의 방향과 깊은 관련이 있다. 1절에 간단하면서도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유다 베들레헴에 한 사람이 그의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거류하였는데” 그녀의 남편 엘리멜렉이 하나님께 그의 선조들에게 기업으로 주신 땅에 흉년이 들자 그곳을 버리고 이방 지역인 모압으로 갔다. 힘들다고 어렵다고 하나님이 주신 기업을 포기한 것도 문제지만 더욱 심각한 것은 이방 지역을 선택한 것이다. 성경이 이 사실을 담담하게 말하고 있지만 이 때문에 시련의 바람이 몰아쳤다는 것이다.
여기서 엘리멜렉의 선택에 굳이 이름을 붙인다면 ‘하나님을 등진 선택’이라 할 수 있다. 선택의 방향이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선 것이다. 엘리멜렉이란 ‘하나님은 왕이시다’는 뜻인데, 하나님을 왕으로 모셔야 할 사람이 하나님을 떠난 선택을 한 것이다. 그러니 그 결과는 참담할 수밖에 없었다. 열심히 살면 잘 살 것 같지만 하나님을 떠나면 결국은 영적 파산자가 되고 만다. 물고기가 물을 떠나면 살 수 없듯이 아무리 큰 소리쳐도 사람은 하나님을 떠나서 제대로 살 수 없다. 영적 타향살이에는 반드시 문제가 생긴다. 그래서 ‘나오미’가 ‘마라’가 된 것이다. ‘기쁨’이 ‘괴로움’이 된 것이다. 모압에서 환란을 당한 나오미 가족의 이야기는 이런 사실을 우리에게 웅변적으로 말한다.
현재의 삶이 평탄하지 않고 어려움이 있다고 해서 그걸 참지 못하고 성급하게 하나님을 등지면 반드시 어려움이 찾아온다. 피하려고 하던 고통보다 더 큰 고통을 당하게 된다. 바로 나오미 가족이 그랬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그랬고(창12:10~20), 그의 아들 이삭도 그랬고(창26:1~11), 다윗도 그랬다(삼상21:10~15). 중요한 것은 그 어려움을 온 몸으로 맞으며 견디는 것이다. 하나님을 바라보며 참아내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기업을 떠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 하나님께서 놀라운 결과를 보장하신다. 있어야 할 사람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않으면 반드시 심각한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들은 힘들고 어려울수록 하나님을 향한 선택을 했고, 하나님을 선택했다. 하나님께 등을 보이지 않고, 하나님을 향하여 무릎을 꿇고 하나님을 향하여 엎드렸다. 하나님이 주신 자신의 자리를 굳게 지켰다.
‘마라’를 넘어
아무튼 엘리멜렉은 고향 베들레헴에 찾아온 흉년을 피해 이웃나라 모압으로 가서 나름대로 잘 살 것이라 꿈꾸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었다. 하나님을 떠난 영적 타향살이는 파산의 길이다. 그런데 다행히 나오미가 이런 환란을 통해 그동안 잊고 있었던 하나님을 기억했고, 고향을 기억했다. 때마침 고향소식을 들었는데, 그곳에 흉년이 그치고 풍년이 왔다는 것이다. 1장은 베들레헴의 ‘흉년’(1)과 ‘풍년’(6)을 소개하고 있는데, 이는 선택에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던 사건이다. 흉년은 엘리멜렉의 선택에, 풍년은 나오미의 선택에 영향을 주었다. 나오미는 베들레헴의 풍년소식에 모압 생활을 접고 고향으로 돌아기로 결정했다.
살기 어렵다고 떠났던 땅을 다시 돌아가기란 어려운 일이다. 혼자 잘 살아보겠다고 헤어졌던 사람을 다시 만나는 일은 힘든 일이다. 금의환향이라도 쉽지 않는 일이다. 그런데 나오미는 쫄딱 망한 상황에서 귀향을 선택했다. 얼마나 남의 시선이 두렵고, 자존심이 상한 일이었겠는가? 이를 통해 나오미의 고민과 신앙적 성숙을 가늠할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나오미의 선택을 자존심이나 남의 시선을 따질 겨를도 없을 만큼 절박한 상황 때문이라고 한다. 어떻게든 살아내려는 몸부림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이유였다면 굳이 베들레헴을 선택할 필요가 없었다. 살아내려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모압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물론 상황이 절박했던 것도 사실이지만 나오미의 베들레헴을 향한 선택은 신앙 때문이다. 본문은 대화 형식으로 된 나오미의 신앙고백이다.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나를 마라라 부르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하느냐.”(20,21).
듣기에 따라 나오미가 자신의 불행을 하나님께 떠넘기면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있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다. 이는 정직하고 솔직하게 자신의 잘못과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인정하는 말이고, 또한 실패한 자신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를 고백한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잘못을 남 탓으로 돌리거나 부정한다. 자신이 처한 상황을 숨기거나 과장한다. 힘들고 어려우면서도 편하고 좋은 척 하고, 너무 고통스럽고 괴로우면서도 기쁘고 행복한 척 한다. 그런데 나오미는 자신의 민낯을 솔직하게 드러냈다. 자신의 죄 때문에 그 징벌로 마라가 되고 빈털터리가 되었지만 오히려 이 때문에 하나님을 기억하게 되었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향한 선택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고백이다. 이는 성숙한 신앙이 아니고는 어려운 고백이다. 특히 여기서 나오미는 하나님을 ‘전능자’라고 고백하고 있다. 전능자(שׁדי/ ‘솨다이’)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는 하나님,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 하나님, 하늘 문을 열기도 하시고 닫기도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나오미는 인생 마라를 통해, 즉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뜻하지 않는 이별의 아픔과 배고픈 흉년을 통해 전능하신 하나님을 발견하고 경험하게 된 것이다. 이 하나님을 향해 나아간 것이 나오미의 선택이고, 이 선택을 통해 마라를 극복하였다.
‘나오미’로 거듭나기
나오미의 가정은 하나님을 등진 선택을 통해 비참하게 무너졌다. 하지만 하나님을 향한 선택을 통해 다시 회복되었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것은 그녀의 가정이 무너진 시간보다 회복되는 시간이 훨씬 짧다는 사실이다. 무너진 것은 10년의 세월이 걸렸지만 회복은 불과 1년도 걸리지 않았다. 이는 그만큼 하나님께서 나오미 가정으로 하여금 돌아올 수 있는 기회를 주셨다는 것이고(그만큼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다렸다는 뜻이기도 하다), 또한 사람은 철저하게 무너져 비참하게 되어야 비로소 정신을 차리게 된다는 것이다(인간은 깨달음이 둔한 어리석은 존재란 뜻). 아무튼 나오미가 하나님 계신 곳, 하나님이 은혜 베푸셨다고 하는 그 땅을 향해 나아갔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이것이 믿음의 행동, 곧 하나님을 향한 선택이다. 나오미의 이 선택이 무너진 가정을 다시 회복시키는 출발점이 되었다. 고통의 수렁에 빠진 자신의 인생을 기쁨의 낙원으로 끌어올렸다. 그래서 진정한 나오미로 거듭나게 되었다. C.S 루이스는 ‘천국을 지향하면 세상을 덤으로 얻을 것이나 세상을 지향하면 둘 다 잃게 될 것이다.’고 했다.
신자의 이름 또한 나오미다. 분명히 신자는 기쁨의 주인공이다. 하지만 현실은 나오미처럼 기쁨과 거리가 멀다. 마라를 벗어나지 못하고 하루에도 수없이 지옥의 고통을 경험하고 있다. 선택의 순간에 늘 주님을 놓치기 때문이다. 자신의 욕심에 끌려 주님을 등진 선택을 하기 때문이다. 주님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고 세상을 선택하기 때문이다. 시궁창을 보지 말고 태양을 보라는 말이 있다. 시궁창에는 썩은 물, 온갖 더러운 쓰레기만 보일 뿐이다. 그러면 그런 삶을 벗어날 수가 없다. 사람은 자신이 보고 경험한 것을 넘어서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태양에서는 따뜻함과 눈부심, 웅장함을 보게 된다. 빛나는 영광스러운 삶을 살게 된다. 성경은 말씀한다.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신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대하16:9). 주님은 크고 작은 모든 선택에 있어서 자신을 향한 사람을 찾으시고, 그 사람에게 능력 베푸신다는 것이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고, 그 선택에서 중요한 것은 방향이다. 모든 선택에 있어 주님을 향한 선택이기를 바란다. 이것이 마라를 벗어나는 길이고, 진정한 나오미로 살아가는 비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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