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통제와 같은 사람, ‘유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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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6,762회 작성일 14-06-08 13:31본문
진통제와 같은 사람, ‘유스도’
골4:10~11
2014. 6/8. 08:00, 11:00
이름은 없으나 큰 사람
성경에는 이름이 자주 거론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고, 크고 중요한 일에 쓰임 받은 유명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작고 보잘 것 없는 사소한 일에 쓰임 받은 무명의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드러나는 작은 결과일 뿐, 그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는 아니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자주’ 거론되고, 얼마나 ‘큰 일’을 감당했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섬겼느냐에 있다. 어디에 무엇에 어떻게 사용하시든지, 그것은 하나님의 결정일 뿐이다. 비록 지도자의 자질을 갖추지 못해 훌륭한 일에 쓰임 받지는 못했지만 자기가 처한 그 위치에서 받은 사명을 즐거운 마음으로 충성스럽게 감당했다면 그는 이미 하나님의 큰 일꾼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루신 일 뒤에는 언제나 하나님께서 쓰신 사람이 있다.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서 일하시기 때문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행하신 위대한 일에 대한 기록이다. 그래서 성경에는 하나님이 사용하신 사람들에 대한 기록이 많다. 구약에서는 노아를 비롯하여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순종의 사람 이삭, 기도의 사람 야곱, 꿈의 사람 요셉, 출애굽의 영웅 모세, 위대한 왕 다윗, 능력의 종 엘리야 같은 사람이 그들이고, 신약에서는 열 두 사도를 비롯하여 바울 같은 사람이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 혼자 그 위대한 일을 하도록 하시지 않았다. 위대한 일을 이룬 인물 뒤에는 자신이 만난 하나님 때문에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자신의 이름이 잊혀지는 것을 마다하지 않고 섬겼던 믿음의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들은 자신이 아무리 크게 쓰임 받고 있다하더라도 이름도 빛도 없이 자신과 함께 섬긴 사람들을 잊지 않았다. 함께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으로 인정하며 귀하게 여겼다. 오늘 본문도 그 중에 하나다. 바울은 여기서 자신과 함께 주님과 주님의 나라를 위해 수고한 사람들을 소개하고 있다. 저는 이 시간 그 중에 한 사람인 ‘유스도’(Justus)를 통하여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고난의 동반자
바울은 본문에서 이름도 빛도 없이 자신과 함께 주님을 섬긴 세 명의 동역자를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나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와 바나바의 생질 마가와(이 마가에 대하여는 너희가 명을 받았으매 그가 이르거든 영접하라) 유스도라 하는 예수도 너희에게 문안하니 저희는 할례당이라 이들만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역사하는 자들이니 이런 사람들이 나의 위로가 되었느니라.”
이들 중 마가는 마가복음의 저자로 유명하지만 아리스다고와 유스도는 역사가 기억해 줄 정도로 위대한 인물이 아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들이 주님과 주님의 나라를 위하여 함께 사역한 사람들이라고 소개한다. 특히 아리스다고는 ‘고난의 동반자’라고 말한다. 그는 마게도니야 지역 데살로니가 출신이다(행20:4). 그는 에베소 사람들이 아프로디테(아데미) 신전에서 폭동을 일으켰을 때 선두에 있다가 체포되어 바울과 함께 옥에 있었고(행19:29), 또 바울이 죄수의 몸으로 로마로 이송되어 갈 때에도 함께 있었다(행27:2). 그래서 그를 바울은 ‘나와 함께 갇힌 자’, 즉 고난의 동반자라고 소개한 것이다.
그것은 유스도도 마찬가지다. 사실 초대교회 시절에는 아리스다고처럼 주님을 위해 감옥에 갇히지 않더라도 믿는 것 자체가 ‘고난의 길’이었다. 당시 기록에 의하면 믿기 위해서는 최소한 세 가지를 각오해야 했다고 한다. ①주님을 위해 ‘맞아’죽을 각오, ②주님을 위해 ‘굶어’죽을 각오, ③주님을 위해 ‘얼어’죽을 각오가 그것이다. 그런데 그는 단순히 믿는 것이 아니라 바울의 선교사역에 동참을 한 사람이다. 오늘날에도 선교가 힘든데, 당시에는 목숨을 거는 일이었다. 바울의 간증이 이를 잘 보여준다(고후11:23~27 참조). 게다가 그는 유대인이었고, 당시 교회와 신자를 박해하는 중심세력이 유대인이었다. 이런 점을 감안할 때 그가 동족인 유대인들로부터 어떤 취급을 받았을지는 말할 필요가 없다. 믿음의 가장 큰 축복은 고난 중에도 충성하는 마음이 변치 않는 것이다. 고난 중에도 십자가의 대열에서 이탈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반드시 그에게 승리를 주신다. 같이 거주하는 동거(同居)보다 같이 고난 받는 동고(同苦)가 중요하다. 유스도는 동고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설교했다는 기록도 없고, 기도의 용사란 기록도 없고, 위대한 전도자란 기록도 없다. 하지만 그는 바울과 함께 주님과 주님의 나라를 위해 고난을 받았다.
세르비아 속담에 ‘좋은 친구를 구별하는 것은 식탁이 아니라 감옥이다.’는 말이 있다. 어려울 때 함께 한 친구가 진짜 친구라는 말이다. 그래서 바울은 이런 좋은 고난의 동반자가 있어서 위로가 되었다고 고백한다(11). 어렵고 힘들 때 함께 하는 사람이 있으면 큰 위로가 되고 힘이 되고 용기가 된다. 주님은 우리가 서로에게 이런 사람이 되기를 기대하신다. 이것이 주님의 법, 곧 사랑의 법을 이루는 길이기 때문이다(갈6:2).
진통제와 같은 사람
미국 애틀랜타 야구장에 한 흑인소년이 구두를 닦고 있었다. 어느 날 야구해설가가 구두를 닦으려고 발을 올려놓았다. 이 소년이 구두를 닦으면서 물었다. ‘아저씨, 야구 해설가 맞죠? 야구공은 어떻게 멀리 날아가는 거예요?’ 그러자 이 사람은 주머니에서 야구공을 꺼내어 들고는 웃으면서 설명해 주었다. ‘자, 이 공을 자세히 보렴. 실로 꿰맨 상처로 가득 하지? 바로 이 상처 때문에 야구공은 보통 공보다 더 멀리 더 높이 날아간단다. 알겠니?’ 이 말이 벼락처럼 이 소년의 가슴을 쳤다. 특히 야구공이 상처 때문에 더 멀리 더 높이 날아갈 수 있다는 이 말은 그의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소년은 이 말을 듣고 자신의 불우한 환경을 불평하지 않고, 미래를 위한 디딤돌로 삼겠다고 다짐했다. 이 소년이 훗날 제7대 유엔 사무총장을 지낸 ‘코피 아난’이다. 그는 2001년에는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다. 그때, 그 야구 해설가의 말 한 마디가 소년으로 하여금 자신의 불우한 환경을 넘어서게 했다. 이것이 말의 힘, 위로의 힘이다.
11절에서 “나의 위로가 되었느니라.”고 바울은 말한다. 여기 ‘위로’란 단어 ‘파레고리아’(παρηγορια)는 신약성경에서 여기에만 유일하게 나온다. 파레고리아는 ‘말을 걸다.’, ‘연설하다.’ 라는 말에서 유래했다. 그래서 위로는 대부분 말을 통하여 하게 된다. 말을 통하여 위로를 하고, 말을 통하여 위로를 받는다. 그리고 이 단어에는 독특한 뜻이 있다. 그것은 ‘고통을 멈추게 하는 치료’라는 뜻이다. 즉 위로는 고통을 완화시키거나 해소시키는 치료제, 곧 ‘진통제’라는 뜻이다. 이는 위로의 성격을 잘 나타내준다. 위로는 삶의 고통을 완화시키거나 해소시켜 주는 치료제다. 우리의 삶에는 코피 아난의 일화처럼 불우한 환경에 대한 고통, 실패 때문에 겪는 고통, 질병으로 인한 고통, 시련과 시험의 고통, 인생의 여러 상처로 인한 고통이 있다. 이 모든 고통을 멈추게 해주는 치료제가 곧 위로다. 사람은 힘든 일 때문에 죽는 것이 아니라 위로를 받지 못해서 죽는다고 한다. 아무리 어려운 일, 심각한 일을 만나도 곁에서 진심으로 위로해주는 사람이 있으면 다시 힘을 얻고, 용기를 갖게 된다. 치료가 되고 회복이 된다. 지금 바울은 로마감옥에 갇혀있다. 고통스러운 환경에서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런 그에게 유스도와 같은 사람들이 있어 크게 위로가 되었다.
엄마도 두 종류가 있다고 한다. 밖에 있다가 집에 들어오면 집 분위기가 ‘환~’해지는 인상엄마가 있고, 집에 있다가 밖으로 나가면 집 분위기가 ‘환~’해지는 진상엄마가 있다고 한다. 찌르는 가시와 같고, 아프게 하는 질병과 같은 사람이 있다. 다른 사람을 찔러 고통스럽게 만들고, 병들어 힘들게 하는 사람이 있다. 그래서 사람들을 힘들게 어렵게 고통스럽게 만든다. 사실 주변에 이런 사람들이 많다. 남편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아내, 아내 때문에 힘들어 하는 남편, 부모 때문에 힘들어 하는 자녀, 자녀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부모가 많다. 신자도 이런 신자가 있다. 찌르는 가시와 같은 신자, 질병과 같은 신자, 그래서 다른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하는 신자가 있다. 또한 연기와 같은 신자, 주변을 온통 오소리 소굴로 만들어버리는 신자가 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눈에서 눈물을 쏟게 하는 신자가 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아내, 주님이 기뻐하시는 남편, 주님이 기뻐하시는 부모, 주님이 기뻐하시는 자녀, 그리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신자는 진통제와 같은 사람이다. 시원한 부채와 같고 생수와 같은 사람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고통을 완화시켜주고 해소시켜주는 사람, 다른 사람의 마음을 시원하고 유쾌하게 해주는 사람이다. 바울에게 유스도가 바로 이런 사람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기쁜 문병
우선 여러분에게 옆의 사진을 소개하겠다. 이 한 장의 사진 속에 오늘 제가 여러분에게 드린 말씀의 핵심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이 사진은 아일랜드의 럭비선수가 자신의 아픈 팬을 위해 커다란 우승컵을 들고 병실을 찾아간 모습이다. 오랫동안 병원에서 투병 중인 어린 아이가 있었는데, 이 아이는 좋아하는 럭비선수가 있었다. 그는 ‘브라이언 오 드리스콜’이다. 그의 경기를 보는 것이 아픈 이 아이의 유일한 즐거움이었다. 이 아이의 안타까운 소식을 접한 이 선수는 우승컵을 들고 투병 중인 아이를 찾아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커다란 우승컵보다 더욱 빛나는 것은 이 선수를 보고 날아갈 듯이 기뻐 환호성을 지르는 이 아이의 밝은 미소다. 얼마나 좋으면, 얼마나 기쁘면 아픈 것도 잊고 저럴 수가 있을까? 이것이 위로의 힘이다. 인생의 통증을 잊게 하는 것이다. 이 사진을 보면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나도 누군가에게 이런 적이 있는가? 몇 사람에게 이런 기쁨을 주고 즐거움을 주었을까?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앞으로 남은 삶을 누군가에게 이런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이것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신자의 삶, 남편과 아내의 삶, 부모와 자녀의 삶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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