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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휘파람에 민감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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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4,386회 작성일 14-03-16 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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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휘파람에 민감하게 하소서!

삼상3:1~9

2014. 3/16. 08:00, 11:00

언어치료(word therapy)

 인간의 말에는 세 가지 놀라운 힘이 있다고 한다. 첫째 ‘각인력’(刻印力)이다. 어느 뇌(腦)학자에 따르면 뇌세포의 98%가 말의 지배를 받는다고 했다. 그래서 자기가 한 말이나 다른 사람에게서 들은 말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 뇌세포에 각인이 된다는 것이다. 둘째 ‘견인력’(牽引力)이다. 말을 하면(들으면) 그 말이 뇌에 각인이 되고, 뇌는 척추를 지배하고, 척주는 행동을 지배하기에, 그 말이 뇌에 전달되어 행동을 이끌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뇌신경학계에 의해서 확인된 것이다. 뇌 속에 언어중추신경이 있는데, 이것이 모든 신경계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 발견됐다. 셋째 ‘성취력’이다. 뇌에 각인되어 사람의 행동을 이끌게 되는 말은 그 사람에게서 영향력을 발휘할 수밖에 없다. 이것을 치료에 적용한 것이 ‘언어치료’(word therapy)이다. 동일한 말을 하루 2~3회 10여 분씩 반복하면 치료효과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미국 위스콘신 주의 어느 병원에서 말기 암환자에게 이 치료를 적용했다. 하루 2~3회 10여 분 동안 ‘내 병세는 좋아지고 있고, 통증은 사라지고 있다.’고 말하게 했다. 그리고 3주 후 진통은 물론 암조차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한 마디로 듣는 말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누구의 말을 듣고, 어떤 말을 듣느냐가 중요하다는 뜻이다. 그 말에 의해 그 사람의 인생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최초의 사람 하와가 범죄하게 된 것도 사단의 앞잡이 뱀의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뱀으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창2:17)을 부정하고, 하나님을 비방하는(3:4)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금하신 나무의 열매를 간절히 탐하게 되었고, 결국은 따서 자신도 먹고 남편(아담)에게도 주어서 먹게 했다. 아무튼 실없는 말 한마디가 상대를 해치고 나를 해하며, 선의(善意)의 말 한마디가 꺼져가는 삶의 의지를 불태우기도 한다. 보이지 않는 말은 듣는 사람의 가슴에 비수가 되기도 하고, 자신의 삶에 화근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건강한 신앙생활과 경건한 삶을 위해선 무엇보다도 주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목자의 음성에 민감한 양들처럼 주님의 음성에 민감해야 한다. 그래야 주님의 말씀이 우리의 뇌에 각인이 되고,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이끌며, 선한 영향력을 발휘하게 된다. 그러면 말씀을 통한 치료, 회복, 변화와 신령한 복을 누리게 된다.

 

닫힌 시대, 깨닫지 못하는 시대

본문은 이스라엘의 사사시대 말기, 제사장 엘리가 사사로 있을 때다. 본문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과 관련하여 이 시대의 특징을 두 가지로 보여준다. 하나는 ‘닫힌 시대’다. 1절은 사사 엘리와 그의 시대에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를 보여주는 말씀이다.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 한 마디로 하늘의 창이 꽉 닫혀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도 않고 이상도 보이지 않는 영적으로 암울하고 답답한 시대였다는 것이다. 또 하나의 특징은 ‘깨닫지 못하는 시대’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이런 침묵을 깨고 하나님께서 다시 휘파람을 부셨다. 엘리를 이어 장차 이스라엘을 다스릴 아이 사무엘(마지막 사사이자 선지자)을 찾아오셨다. 그리고 네 번이나 “사무엘아 사무엘아”(10) 하고 그를 부르셨다(4,6,8,10). 안타깝게도 그는 하나님께서 세 번째 부르실 때까지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알지 못했다. 그저 제사장 엘리가 부른 줄로만 알고, 일어나서 그에게로 달려갔다.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셨지만 그는 그것이 하나님의 음성인줄 깨닫지 못했다. 닫힌 것도 문제지만 더 심각한 것은 불러도 그것이 누구의 음성인지 알지 못하는 것,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이보다 더 심각하게 ‘안 듣는 시대’가 되었다. 귀를 막아버리고, 마음을 닫아버리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이 없을 뿐만 아니라 거부하는 시대가 되었다. 엘리의 아들들이 여기에 속한다(2:25).

 

1. 존중히 여김

그렇다면 그 시대가 왜 이렇게 닫힌 시대가 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시대가 된 것일까? 이는 익명의 선지자(2:27)가 엘리에게 선포한 말씀 중에 그 답이 나온다.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2:30). 이것은 곧 엘리의 죄다.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지 않고 멸시한 것이다.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지 않았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히 여기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히 여기지 않고 멸시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고, 이상이나 환상, 비전을 보지 못한 것 또한 당연하다. 듣는 것과 보는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듣지 못하면 볼 수도 없다. 이것은 단순히 엘리와 그의 시대뿐만 아니라 사시시대 전체가 그랬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히 여겨 그의 말씀대로 살기보다, ‘각자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았다.’(삿21:25). ‘각자 자기 소견대로 산다!’ 이것이 사사시대의 슬로건이다. 자기 소견을 중요하게 여기다보니 하나님의 말씀이나 음성은 소홀히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하늘을 닫아버리신 것이다. 하나님이 부르셔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듣고 깨닫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존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또한 그 말씀을 가르치고 선포하는 사람을 존중하고 귀하게 여겨야 한다(행10: 고넬료 참고). 사랑하는 만큼 듣게 되고, 존경하는 만큼 보게 된다. 소중히 여기는 만큼 깨닫게 되고 알게 된다. 사람은 자신이 존중히 여기는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것의 소리에 민감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존중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소중히 여길 때, 그리고 그 말을 가르치고 선포하는 사람을 귀하게 여길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고 깨닫게 된다.

 

2. 깨어있음

그 시대가 닫힌 시대, 들어도 깨닫지 못한 시대가 된 또 하나의 원인은 깨어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본문에 7번이나 반복해서 나온 단어가 있다. ‘눕다’(2,3,5,6,9)는 단어다. 엘리 제사장은 나이가 너무 많아 눕고, 사무엘은 나이가 너무 어려서 누웠지만 둘 다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제단을 섬기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둘 다 “누웠고”(2) “누웠더니”(3) 라고 성경은 말씀한다. 물론 저녁이 되어 잠자리에 들기 위해서 눕고, 자다가 자주 일어나다보니 눕다는 표현이 반복해서 나온 것이다. 그렇지만 본문은 이런 일상적인 상황을 통하여 그들의 깨어있지 못한 생활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아니 깨어있어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 여기서 미묘한 영적 긴장을 보게 된다. 하나님은 사무엘을 깨우시는데, 엘리는 그에게 가서 누우라고 말한다.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제단을 섬기는 사람의 가장 중요한 자세는 ‘깨어있는’ 것이다. 또한 깨어있음은 들음의 중요한 조건이다. 잠이 들면 눈과 귀가 닫히고, 마음이 닫히기 때문에 들을 수도 볼 수도 없다. 깨달을 수도 없다. 그들이 나이가 많다는 핑계, 너무 어리다는 핑계로 깨어있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닫히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도 깨닫지 못한 것이다.

 

깨어있어야 한다. 깨어있어야 보게 되고, 깨어있어야 듣게 되고, 깨어있어야 알게 되고, 깨어있어야 만나게 된다. 듣는다는 것은 깨어있는 것이다. 그리고 깨어있다는 것은 자신을 비롯해서 대상이나 상황을 깊이 보는 것이다. 특히 영적으로 깨어있다는 것은 하나님께 집중하는 것,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기도와 깨어있음을 같은 의미로 취급한다. 안도현 시인은 「여치소리를 듣는다는 것」이란 시에서 ‘여치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오도카니 무릎을 모으고 앉아/ 여치의 젖은 무릎을 생각한다는 것’이라고 했다. 대상에 집중해야 들을 수 있다는 뜻이다. 이것이 깨어있는 것이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비결이다.

 

3. 친밀한 교제

본문은 사무엘이 하나님의 부르시는 음성을 듣고도 깨닫지 못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사무엘이 아직 여호와를 알지 못하고 여호와의 말씀도 아직 그에게 나타나지 아니한 때라.”(7). 여기서 ‘알지 못하고’는 경험적으로 알지 못했다는 뜻이다. 즉 지식적으로만 알았고 직접 교제를 나누지 못했다는 뜻이다. 그런 상태에서 처음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그러니 그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도 그것이 하나님의 음성인지 깨닫지 못한 것이다. 그렇다. 자주 만나 서로 교제가 깊은 사람은 소리만 듣고도 그를 알아차릴 수 있다. 아주 친밀한 사람들은 발자국 소리만 듣고도 서로 안다고 한다. 그렇지만 교제가 없는 사람은 소리만 듣고 그가 누군지 알 수 없다. 사무엘은 하나님께서 세 번째 부르실 때까지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알지 못했다. 아직 그가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친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은 얼굴을 보지 않고도 목소리만 들어도 누구인지 안다. 양은 목자를 보고 따른 것이 아니라 목자의 소리를 듣고 따른다고 한다. 양은 지독한 근시다. 사람으로 말하면 양의 시력은 -10도 정도라고 한다. 겨우 1~2m정도밖에 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그 시력으로 목자를 따를 수가 없다. 반면에 귀는 매우 밝다고 한다. 거기다가 자기 목자의 소리를 알아듣는 능력이 탁월하다. 이 능력은 목자와의 친밀한 교제, 즉 관계성에서 온 것이다. 항상 함께 생활하다보니 목자의 소리가 귀에 새겨진 것이다. 신앙도 마찬가지다. 우리도 주님을 보고 따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음성을 듣고 따르는 것이다. 그러니 듣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롬10:17),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요5:25) 했다. 들음은 신앙의 기본이다. 말씀을 들음으로 신앙이 시작되고, 잘 들음으로 신앙이 성장(숙)한다. 그러므로 주님을 따르려면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하고, 주님의 음성을 들으려면 주님과 친밀한 관계(교제)를 가져야 한다. 그래야 주님의 휘파람 소리에 민감할 수가 있다.

 

하나님의 휘파람 소리에 민감하라.

어린이는 듣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듣고, 어른은 듣는 것처럼 보이지만 듣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이런 말이 여러분과는 상관이 없기를 바란다. 귀가 닫히고 눈이 닫혀서 주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으면, 또한 들어도 깨닫지 못하면 엘리처럼 심령이 점점 어둠에 갇히게 된다(“엘리의 눈이 점점 어두워가서 잘 보지 못하는”). 진리의 상징, 소망의 상징, 축복의 상징, 은혜의 상징, 능력의 상징, 구원과 생명의 상징인 하나님의 등불이 점점 꺼져가게 된다(“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으며”). 그러므로 우리가 이러한 어두움의 장막에서 벗어나고, 꺼져가는 하나님의 등불을 횃불처럼 활활 타오르게 하여 교회와 시대를 밝히는 하나님의 등불(곧 축복, 은혜, 능력, 구원과 생명)이 되려면 하나님의 음성, 곧 하나님의 휘파람 소리에 민감해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휘파람 소리에 민감할 수 있을까? 먼저 하나님을 존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선포하는 사람을 존중해야 한다. 다음은 항상 깨어있어야 한다. 늘 주님께 집중하여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의 얼굴을 구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주님과 친밀한 교제, 친밀한 관계를 가져야 한다. 주님과의 물리적 영적인 거리를 날마다 좁혀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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