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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을 왕으로 모신 사람, ‘삭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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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4,408회 작성일 14-04-13 1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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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을 왕으로 모신 사람, ‘삭개오’

눅19:1~10

2014. 4/13. 08:00, 11:00(종려주일)

외로운 세상, 외로운 사람들

 아마 아인슈타인(A. Einstein)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가 이런 말을 했다. ‘이렇게 세계적으로 알려진 내가 무척 외롭다는 사실이 참 이상합니다.’ 유명하다는 것과 마음의 외로움은 전혀 별개의 문제다. 사람들은 여럿이 함께 있으면서도 외롭다고 말한다.

 

어떤 신문사에서 독자를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다. ‘당신이 직면하고 있는 가장 중대한 문제가 무엇입니까?’ 3가지 대답이 가장 많이 나왔다. 첫째는 ‘두려움’(fear)이고, 둘째는 ‘염려’(worry), 셋째가 ‘외로움’(loneliness)이었다. 그런데 두려움과 염려는 모두 외로움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그렇다면 외로움이야말로 현대인을 괴롭히는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정신과를 찾는 사람의 80%이상이 외로움 때문에 고생한다는 조사보고가 있다. 밤낮으로 환하게 불을 밝히고 있지만 이 세상은 참 어둡다. 무엇보다도 외롭다. 그러니 사람의 마음 또한 외로운 것이다.

 

외로움은 외적인 것으로 결코 보상될 수 없다.

본문에도 외로움 사람이 나온다. 그는 여리고의 세리장이고, 부자인 ‘삭개오’다(2). 아인슈타인처럼 외로움과는 거리가 멀 것 같은데, 그는 무척 외로웠다. 여리고는 요단강 근처에 위치한 국경도시로 매우 번창한 곳이다(당시 5만의 사람들이 살았다고 함).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을 점령하기 훨씬 전부터 강력한 도시국가를 형성하여 번영을 누렸던 곳이다. 예루살렘에서 동북쪽으로 28㎞ 정도 떨어진 교통의 요지로 무역이 활발했고, 땅이 비옥하여 농산물, 특히 고급향료가 많이 생산되었다. 이렇게 경제활동이 활발한 도시였기 때문에 세금거두는 일이 매우 중요했다. 그래서 관세, 물품세, 인두세 등 세금을 거두는 세무서가 있었다. 삭개오는 이곳의 세리장이고, 부자였다. 이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말해준다.

 

하나는 그가 사회적으로 철저하게 외면을 당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점이다. 당시 유대사회에서 세리는 창기와 함께 평판이 가장 나쁜 사람이었다. 로마는 식민지의 세금징수율 높이기 위하여 현지인 책임자를 고용했는데, 입찰제를 채택하였다. 가장 많은 세금을 징수하겠다고 써 낸 사람에게 세금징수업무를 주었다(➠당시 세무제도는 정부로부터 할당된 일정한 금액이 있고, 얼마를 걷느냐는 세리의 자유였다. 할당된 금액만 정부에 내고 나머지는 세리의 몫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가 세리장까지 된 것은 그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짐작하게 해준다. 그러니 동족으로부터 멸시를 당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세리는 ‘면허증 가진 강도’라고 불렸던 공공의 적 제1호였다. 그리고 그가 부자였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그가 세리장이고 부자였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철저히 외면당하고 있는 불행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외로움은 마음의 결핍에서 온다.

또 하나는 그것들이 결코 마음에 평안을 주지 못한다는 점이다. 많은 사람들은 사회적 지위가 높아지고 재물이 쌓이면 마음의 평안도 행복도 기쁨도 함께 높아지고 쌓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완벽한 착각이다. 어거스틴은 사람에게는 하나님만이 채울 수 있는 절대공간이 있다고 했다. 이것이 채워지지 않는 한 평안은 없다. 그런데 이것은 세상 무엇으로도 채울 수가 없고, 채우려고 할수록 갈증만 더욱 증폭시킬 뿐이다. 주변에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악착같이 사는 사람들이 있다. 대개 이런 사람들이 명예도 부도 얻는다. 소위 세상에서 성공을 한다. 하지만 결코 행복한 사람은 못된다. 삭개오가 바로 그 증인이다. 그는 민족의 배신자라는 말을 들으면서까지 악착같이 살았다. 그래서 사회적 지위도 얻고 재물도 많이 모아서 부자가 되었다. 성공했다. 그런데 그것이 그의 외로움을 대신하지 못했다. 마음의 결핍을 해결해주지 못했다. 세상에는 이런 삭개오족(族)이 많다.

 

아무튼 이 문제는 결론적으로 말하면 예수님을 마음에 모셔야 해결이 된다. 주님만이 그 공간을 채울 수 있기 때문이다. 주님만이 마음의 근심과 두려움을 제거하고 참 평안과 기쁨을 주시기 때문이다. 본문은 외로운 사람 삭개오가 예수님을 왕으로 모셔드리는 사건이다. 그래서 외로움을 극복하고 아브라함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나는 장면이다. 오늘은 평화의 왕으로 오신 주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입성을 기념하는 ‘종려주일’이다. 주님이 나의 왕 되심을 기념하는 날이다. 이 시간, 삭개오가 어떻게 주님을 왕으로 모셔드리게 되었는가 하는 점에 대하여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결핍은 간절함을 낳는다.

어쨌든 삭개오는 성공한 사람이다. 하지만 강한 마음의 결핍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런 결핍은 우리를 주님께로 인도하는 길잡이가 된다. 최소한 삭개오에게는 그랬다. 그의 마음의 결핍, 곧 외로움은 예수님에 대한 간절한 열망으로 변했다. 그래서 그는 주님께서 그가 살고 있는 여리고를 지나가신다는 소문을 듣고 주님을 보려고 나갔다. “그가 예수께서 어떤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3). 여기 “보고자 하되”에서 ‘하되’는, 헬라어로 ‘제테오’(ζητεω)다. 이는 단순히 ‘원하다’는 뜻이 아니다. 어떤 것을 찾고 얻기 위해 생각하고, 물어보고, 구하러 다니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이 동사의 시제는 (일회적이 아니라 계속적인 행위를 뜻하는)‘미완료형’이다. 이것은 지금까지 그가 채워지지 않는 마음의 결핍을 해결하기 위해 얼마나 애써왔는지, 그의 마음이 얼마나 간절한지를 잘 보여준다. 그러니 그는 주님을 단순히 충동적으로 보고 싶어 한 것이 아니다. 오래 전부터 이런 날을 간절히 기다려왔다. 구원은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모든 일이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이런 좋은 일에는 꼭 걸림돌이 따른다. 모처럼 큰 결심을 하고 주님을 보려고 나갔는데, 주님을 볼 수가 없었다. “키가 작고 사람들이 많아 할 수 없어”(3下). 여기서 사람이 많다는 것은 외적 장애물이고, 키가 작다는 것은 내적 장애물이다. 중요한 것은 내적 장애물이다. 비록 사람들이 많아도 그의 키가 농구선수나 배구선수처럼 컸다면 문제가 될 수 없었을 텐데 키가 너무 작았다(➠여기서 키가 작다ἡλικιᾳ μικρὸς는 말을 사회적으로 소외된 사람으로도 해석함). 외부환경도 문제지만 자신이 더 큰 문제였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다. 무언가 중요한 결심을 하고 시도를 하려고 하면 꼭 장애물이 나타나 앞을 가로막는다. 그것은 항상 환경과 자신이다. 더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도하면 될 텐데 믿음의 키가 너무 작아서 타협을 하거나 쉽게 포기해 버린다. 그러면 절대로 장애를 넘어설 수가 없다. 아니 믿음의 키가 자라지를 않는다. 평생 영적 약골, 영적 난장이를 면하기 어렵다. 내일부터 고난주간특별새벽예배를 드리려고 하는데, 벌써부터 장애물에 가로막힌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물론 환경이 현실적인 문제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믿음이다. 한 번 도전하기 바란다. 그러면 믿음의 키를 키우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꿈을 현실로 만드는 힘, 간절함

만약 여기서 삭개오가 다음 기회를 기약하며 돌아섰다면 어떻게 됐을까? 지금 주님은 죽으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중이다. 지금이 주님을 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는 뜻이다. 그러니 ‘다음’이나 ‘다시’는 결코 보장받을 수 없는 시간이다. 그랬다면 그는 성경에 기록되지 못했을 것이고, 대신 동족의 피를 빨아먹은 흡혈귀와 같은 존재로 악명을 떨쳤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이 장애물을 멋지게 극복했다. 그는 주님이 가고 계시는 방향의 길가에서 한그루 ‘돌무화과나무’를 발견했다. 그는 앞으로 달려가서 그 위로 올라갔다(4). 그랬더니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주님이 보였다(본문설명생략). 이렇게 ‘키가 작고 사람이 많은’ 장애물을 너무 간단하게, 그리고 순식간에 넘어설 수가 있었다. 이 나무는 그의 앞에 놓인 장애물을 뛰어넘어 주님을 만나게 해주는 통로가 되었다. 그의 인생에 전환점을 가져다준 디딤돌이 되었다.

 

간절하면 통한다고 했다. 너무도 간절히 주님을 보고 싶어 하니까 그에게 기회가 주어졌다. 그의 눈에 돌무화과나무가 들어온 것이다. 주님께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보여주신 것이다. 간절함은 꿈을 현실로 만드는 힘이다. 뻔한 싸움, 그래서 생기는 뻔한 승부를 뒤집을 유일한 동기는 간절함이다. 간절함은 승리를 부른다. 기회는 간절한 사람에게 찾아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인생의 기회는 그것을 볼 수 있는 눈과 붙잡을 수 있는 간절함을 가진 사람이 나타나기까지 잠자고 있다.’고 했다. 삭개오의 간절함이 본문 여러 곳에 나온다. 우선 앞에서 말씀 드린 헬라어 ①제테오(3)를 비롯해서 돌무화과나무를 발견하고 ②앞으로 달려간 것(4), 그리고 서둘러 그 위로 ③올라간 것(4/ 내려놓지 않으면 올라갈 수 없음→그러니 그 자체가 간절함의 표현임), 또한 주님의 말씀을 듣고 ④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주님을 자기 집으로 영접한 것(6) 등이다. 그의 이와 같은 간절함은 환경의 장애, 자기 자신의 장애를 극복하고, 주님을 볼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주님을 만나고 주님을 자신의 집으로 영접하는 영광을 갖게 해주었다. 그리하여 그와 그의 온 집이 주님을 왕으로 모시게 되었다(9).

 

돌무화과나무, 십자가

본문의 돌무화과나무를 히브리어로 ‘쉬크마’(שקמה)라고 한다. ‘재활’(再活), 혹은 ‘갱생’(更生)이란 뜻이다. 이는 삭개오의 상황과 절묘하게 잘 어울린다. 이 나무는 그가 재활의 삶, 갱생의 삶을 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바로 이 나무 때문에 그는 장애물을 넘어설 수 있었고, 주님을 볼 수 있었다. 또한 주님을 만나고, 자신의 집으로 주님을 영접하여 온 가족이 구원을 받게 되었다. 그래서 주님을 왕으로 모신 심령, 주님을 왕으로 모신 가정이 되었다. 모두가 이 나무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가 되고, 주님을 가장 잘 보여주는 ‘창’이 되고, 주님을 만나게 해주는 ‘장소’가 되는 돌무화과나무는 무엇일까? 그것은 ‘십자가’다. 십자가는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다. 십자가를 통하여 주님을 가장 잘 볼 수가 있고, 십자가를 통하여 주님을 만날 수가 있다. 십자가는 만남의 장소다. 우리에게 십자가를 바라보게 하고, 십자가로 가까이 나아가게 하는 것은 간절함이다. 주님을 보고자하고 만나고자하는 간절함이다. 이런 사람에게 십자가는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 주님을 바라보는 창, 주님을 만나는 장소다. 그래서 재활의 삶, 갱생의 삶을 보장해준다. 금번에 고난주간특별새벽예배를 드리는 것도 주님을 보고자하고 만나고자하는 열정과 간절함을 회복하기 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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