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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기할 줄 모르는 열정을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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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4,520회 작성일 14-03-30 1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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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기할 줄 모르는 열정을 주소서.

막10:46~52

2014. 3/30. 08:00, 11:00

기적을 만드는 사람

행복에는 3가지 요건이 있다고 한다. 행복하다고 ‘생각’하고, 행복하다고 ‘말’하고, 행복한 사람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불행한 처지에 있어도 행복하다고 생각하고, 행복하다고 말하고, 행복한 것처럼 행동하면 행복이 찾아온다는 것이다. 사람은 생각한 대로, 말한 대로, 행동한 대로 된다. 생각은 말에, 말은 행동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특히 믿음의 생각, 믿음의 말, 믿음의 행동은 더욱 그렇다. 믿음은 단순히 ‘’가 아니라 ‘+∞’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을 바라는 것들의 실상’(11:1)이라고 했다. 여기서 ‘실상’을 헬라어로 ‘휘포스타시스’(ὑπόστασις)라고 한다. ‘아래로부터 받쳐준다.’는 뜻이다. 믿음이 곧 소망의 ‘근거’(기초, 토대)라는 것이다. 믿음은 소망뿐만 아니라 모든 것의 근거다. 사랑의 근거, 용서의 근거, 축복의 근거, 행복의 근거, 관계의 근거, 나아가서 인생의 근거다. 바로 이 믿음을 근거로 하여 행복하다고 생각하고, 행복하다고 말하고, 행복하다고 행동하면 정말 행복한 사람이 된다. 이 믿음을 근거로 ‘잘된다. 잘되고 있다. 잘될 것이다. 잘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말하고, 그렇게 행동하면 그렇게 된다. 삶에서 기적을 만들어내는 사람이 된다. 본문에도 믿음을 근거로 하여 삶의 기적을 만들어낸 사람이 나온다.

 

길 없는 길을 간 제자

 어떤 분은 본문에 나온 바디메오를 가리켜 ‘길 없는 길을 간 제자’라고 불렀다. 본문을 읽고 묵상하면서 이 표현이 참으로 적절하다는 생각을 했다. “맹인 거지”(46)라는 비참하고 절망적인 상황에서 이를 떨치고 일어나 믿음의 길을 간다는 것은 곧 길 없는 길을 간 것이다.

 

동일한 기사가 누가복음(18:35~43)에도 나온다. 그런데 본문에는 ‘바디메오’라고 그의 이름이 소개되어 있다. 아마도 이는 그가 처한 상황을 강조하기 위함인 것 같다. 우리도 누군가를 소개할 때 주변에 인지도가 높은 사람을 들어서 소개한다. 아버지가 잘 알려진 분이면 ‘~의 아들’이라고 소개하고, 형이나 동생이 잘 알려져 있으면 ‘~의 동생’, 혹은 ‘~의 형’이라고 소개한다. 또한 자녀가 유명하면 ‘~의 부친’이라고 소개한다. 여기서 ‘그를 디메오의 아들 바디메오’라고 한 것은 그의 아버지가 그 지역(여리고)에서 유력한 사람이란 뜻이다. 문제는 그의 아버지가 그 지역의 유력인사라도 그는 맹인이고 거지다. 부모나 형제들이 아무리 유력해도 내가 별 볼 일 없으면 그들의 존재는 내게 더 큰 상실감, 좌절감, 절망감만 줄 뿐이다. 본문은 바디메오의 이런 상황을 강조하기 위해 그의 아버지를 소개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 있던 그가 예수님을 만나서 치유된 사건이 아주 간절하게 표현되어 있다. 그래서 이런 그의 모습을 두고 길 없는 길을 간 사람이라 한 것이다. 이를 가능하게 한 것은 ‘포기할 줄 모르는 열정’이다. 이것이 우리가 맹인 거지 바디메오에게서 배워야할 점이다. 어떻게 이런 태도를 가질 수 있었을까?

 

1. 정확한 믿음

예수님께서 여러 사람과 함께 여리고를 나가실 때(누가복음에서는 여리고로 들어오실 때)다. 무슨 일로 주변이 소란한 것이냐고 바디메오가 물었고, 어떤 사람이 나사렛 예수와 그 일행 때문이라고 말해주었다. 그러자 그는 큰 소리로 외쳤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47).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나사렛 예수란 말을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여’ 라고 고쳐 부른 내용이다. 나사렛 예수란 그냥 일반적인 이름이다. 특히 당시 유대사회에서 예수는 아주 흔한 이름이었다. 그래서 구별하기 위해 이름 앞에 지명을 붙여서 불렀다. 하지만 다윗의 자손 예수란 신앙고백이다. 구원자 메시야가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다는 것은 구약성경에 약속된 내용이고, 유대인의 오래된 신앙이다. 그는 나사렛 예수가 곧 성경에 약속된 메시야라고 믿은 것이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하신 일들을 직접 본 눈뜬 사람은 나사렛 예수라고 했는데, 보지도 못한 그는 메시야로 고백한 것이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그러므로 영적인 눈이 열려야지 육적인 눈만으로는 건강한 신앙생활이 힘들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포기할 줄 모르는 그의 열정은 이와 같은 그의 믿음 때문이다. 믿음이 열정의 근거가 된 것이고, 그 열정이 그를 포기하지 않도록 만든 것이다.

 

2. 확실한 목표

그가 예수님을 향해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외친 것은 단순히 동냥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동냥해서 하루하루 연명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눈을 뜨는 것이 목표였다. 그가 몇 살이고, 언제 맹인이 되었는지에 대하여 성경은 침묵하고 있지만, 어느 기록에 보니 그의 아버지 디메오는 여리고에서 유명한 상인이었고, 바디메오는 그의 셋째 아들로 7세에 소경이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유대인은 장성하면 자립을 해야 했다. 비록 그가 소경이지만 그래서 자립을 위해 구걸을 한 것이라고 한다. 이는 그가 소경이 된 것이 상당히 오래 되었음을 말해준다. 그런데도 눈을 뜨고자 하는 간절한 열망을 갖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대개의 경우 아무리 불편한 것도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지고 익숙해지면 포기를 한다. 그런데 그는 눈 뜨는 것을 포기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에게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기회는 목표가 분명한 사람에게 찾아온다. 그리고 목표가 분명한 사람은 주변의 어떤 장애에도 무너지지 않는다. 그가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외쳤을 때, 사람들은 그가 구걸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조용히 하라고 꾸짖었다. 그렇지만 그는 더욱 크게 소리를 질렀다. 단순히 동냥이 목표였다면 그는 잠잠했을 것이다. 사람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고선 어떤 동정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사람들의 동정을 받아 동냥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주님의 주의를 끌어 눈을 뜨는 것이 목표였다. 때문에 더 크게, 더 간절하게 외친 것이다.

 

확실한 목표를 갖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행동하게 하는 힘’이 되기 때문이다. 한 아이가 여름방학동안 하루에 12시간씩 피아노를 치겠다고 했다. 그 이유는 다음에 미국카네기홀에서 연주하는 것이 그의 꿈이었다. 하루에 12시간씩 피아노를 치겠다고 그 아이를 움직인 것은 엄마의 잔소리가 아니다. 작은 가슴에 품은 ‘목표’였다. 목표는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힘이다. 또한 목표는 ‘주도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만든다. 목표가 분명하지 않는 사람은 상황에 끌려 다니며 허송세월을 하기가 쉽다. 작은 문제 앞에서도 쉽게 무릎을 꿇는다. 그러나 목표가 분명한 사람은 상황에 끌려 다니지도, 시간을 낭비하지도, 또한 처한 상황에 주저앉지도 않는다. 자신이 주도적으로 모든 것을 이끈다. 바로 이것이 바디메오로 하여금 주변 사람들의 꾸짖음에도 불구하고 주도적으로 행동하게 하는 힘이었다. 그래서 결국 자신의 꿈을 이루게 된 것이다.

 

3. 주님의 관심

비즈니스 세계에서 성공과 실패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관심’이다. 자신이 팔려고 하는 물건에 어떻게 사람의 관심을 집중시키느냐가 관건이다. 아무리 좋은 제품도 사람의 관심을 끌지 못하면 그대로 사장되고 말지만 별 볼 일 없는 것이라도 관심을 모으면 대박이 난다. 백화점이나 마트를 가보면 이것을 실감할 수가 있다. 특히 현대는 거의 기술의 평준화가 되었기 때문에 소비자의 관심을 이끌어내는 것이 더욱 중요하게 되었다. 광고를 현대산업의 꽃이라고 부른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인생의 관건은 무엇보다도 주님의 관심을 끄는 것이다. 주님으로 하여금 내 인생에, 내 문제에 관심을 가지시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주님께서 바디메오에게 관심을 갖자 그의 인생이 완전히 바뀌었다. 맹인 거지로 멸시 받으며 살아온 비참하고 절망적인 그의 삶이 순식간에 변화되었다. 남들처럼 보고 싶어 하던 그의 간절한 열망이 주님 말씀 한 마디로 해결되었다. 사람들이 조용히 하라고 꾸짖어도 더 크게, 더 간절히 주님을 불렀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여러 장애에도 불구하고 포기할 수 없었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자신에게, 자신의 문제에 주님의 관심을 집중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결국 그는 해냈다. 주님은 걸음을 멈추고 서서 “그를 부르라”고 하셨고, 그는 겉옷을 버려두고 뛰어 일어나 주님께로 달려갔다. 그의 간절한 마음을 잘 보여주는 부분이다. 이런 태도가 자신과 자신의 문제에 주님의 관심을 집중시킨 비결이다. 그것은 간절함이다. 절실함이고, 절박함이다. 지난주일 기도는 마음을 여는 것, 마음을 넓히는 것이라고 했는데, 간절함, 절실함, 절박함이 그것이다. 기도를 통하여 내 마음이 간절하고 절실하고 절박해 질 때 주님은 걸음을 멈추고 나를 주목하시고, 나를 데리고 오라고 말씀하시고, 무엇을 해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실 것이다.

 

더 파라! 깊이 파라! 계속 파라!

록펠러는 젊었을 때 금광을 하나 샀다. 몇 개월을 파고 들어갔지만 그곳에서 그는 금 조각 하나 찾지 못했다. 속아서 광산을 산 것이다. 광부들은 월급을 주지 않는다고 난리를 치고, 사채업자들은 협박을 하고, 빚은 눈덩이처럼 늘어났다. 그 절망적인 가운데 그는 폐광으로 들어가서 무릎 꿇고 기도했다. 한 참을 기도하는데, 그 마음에 갈6:9의 말씀이 떠올랐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때가 이루매 거두리라.” 그는 이 말씀을 붙들고 다시 기도했다. 그 때 그 마음에 ‘더 파라. 깊이 파라. 계속 파라.’는 음성이 들려왔다. 그는 기도를 마치고 광부들을 설득하여 광산을 더 깊이 파 들어갔다. 그러나 금은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그 금광에서 다른 것이 나왔다. 바로 석유다. 석유가 나온 것이다. 이것을 기반으로 그는 미국의 대표적인 자본가가 되었다. 성공의 가장 무서운 병은 쉽게 포기하는 것이고, 실패하지 않는 최선의 비결은 성공할 때까지 포기하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주님은 어떤 경우에도 포기하지 않고 하려고 하는 사람에게 능력을 주시고, 지혜를 주시고, 방법을 주시고, 기회를 주신다. 도울 수 있는 사람을 붙여주신다. 

 

사람이 한 평생을 살다보면 별별 일들을 겪게 된다. 형통하고 기쁠 때도 있지만 원하지 않는 어려움과 아픔을 겪기도 한다. 꽃샘추위 없는 봄이 없듯이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다. 이 때 중요한 것은 우리의 태도다. 바디메오처럼 포기할 줄 모르는 열정이다. 이것을 결정하는 것이 ‘믿음’이고, 이 믿음에 기초한 확실한 ‘목표’이다. 그리고 이 목표를 성취하기 위한 주님의 ‘관심’이다. 사람의 의지나 노력도 굉장하다. 그러나 의지와 노력에는 한계가 있다. 그것을 넘어서도록 도우시는 분이 주님이시다. 주님의 관심을 받으면 우리 역시 어떤 상황에서도 기적을 만드는 사람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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