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의 통로Ⅻ, ‘화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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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3,846회 작성일 12-04-22 15:31본문
복의 통로Ⅻ, ‘화목’
창26:12~33
2012. 4/22, 08:00 11:00
관계의 원리
동양에서는 관계의 원리로 세 가지를 강조했다. 첫째는 ‘성’(誠)의 원리고, 둘째는 ‘경’(敬), 그리고 셋째는 ‘화’(和)다. 건강하고 좋은 관계를 위해선 먼저 성실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실에서 신뢰가 생기고, 신뢰를 바탕으로 관계가 형성된다. 성실은 인격의 도덕적 핵심원리다. 인격에서 성실을 빼면 남는 것이 없다. 이것은 태양에서 빛을 제거하는 것과 같다. 성실이 없는 곳에 존재도 없다. 그러므로 성실이 없는 관계는 무의미하다. 그리고 인간은 서로 존경(중)해야 한다. 우리는 산을 좋아하지만 산을 존경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꽃도 돈도 마찬가지다. 이 세상에서 존경의 대상은 오직 인격(人格)밖에 없다.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이다. 건강하고 좋은 관계는 서로 존중하고 존경함에 있다. 또한 화목해야 한다. 화는 화평(목)의 화요, 조화의 화요, 화합의 화다. 공자는 동(同)과 화(和)를 구별하여 ‘동이불화’(同而不和)의 질서와 ‘화이부동’(和而不同)의 질서로 갈라놓았다. 동은 획일주의를 의미한다. 사람의 개성과 인격을 무시하고 한 가지 테두리 속에 모든 사람을 억지로 쓸어 넣는 것이다. 그러나 화는 각자의 개성과 인격을 존중하고 서로 아름다운 화평(목), 조화. 화합의 질서를 이루는 것이다. 이것이 건강한 인간생활, 인간관계의 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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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목의 길
화목은 모든 관계의 절대적인 요소다. 신자의 관계, 특히 신앙공동체인 교회 안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야고보는 신앙공동체의 화목을 강조하기 위해서 신앙공동체 안에서의 갈등과 불화를 ‘전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약4:1). 갈등과 불화가 얼마나 무섭고 무익하고 치명적인가를 강조한 것이다. 저는 강변의 이단교회를 볼 때마다 신자와 교회의 화목(평)의 중요성을 생각한다. 사실 그 이단을 키운 것은 이 지역에 있는 신자와 교회의 갈등과 불화가 그 원인이다. 틈이 생기면 그곳으로 바람이 들어오고 먼지가 들어오고 물이 스며드는 것처럼 갈등과 불화가 있는 곳에 이단이 틈을 탄다. 갈등과 불화는 마귀의 전략이고 전술이다. 갈등이 있는 곳에는 마귀가 있고, 그 결과는 마귀 외에 모두를 패자로 만든다. 그러니 화목이 복의 통로인 것이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복의 통로 열두 번째, ‘화목’에 대하여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창세기 26장은 이삭에 대한 이야기다. 이삭이 어떤 사람인가를 아주 잘 보여주는 부분이다. 이삭은 한 마디로 ‘화목의 사람’이다. 순종이 아브라함 믿음의 특징이었다면 화목은 이삭 믿음의 특징이다. 이삭이 흉년으로 잠시 불레셋 사람의 땅에 거했을 때 있었던 사건이다(1). 하나님은 불레셋 사람들이 시기할 만큼 이삭을 축복하여 주셔서(12), 그곳에서 거부가 되었다(13). 이방인인 그가 잘되자 그게 시기가 나서 그들은 자기네 땅에서 나가 달라고 했다(14,16). 그래서 이삭은 그곳을 나와 다른 곳으로 갔으나 그들이 계속 따라오면서 시비를 걸었다(18,19,20). 그렇지만 이삭은 그들의 시비에 대항하지 않고 더 이상 시비가 없는 곳까지(22) 조용히 양보만 했다. 이와 같은 이삭의 태도는 ‘화목의 길’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1. 인내(忍耐)
‘인중유화’(忍中有和)라는 말이 있다. ‘참는 가운데 화목이 있다’는 뜻이다. 오랜 세월을 살아온 부부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가정을 지키는 최고의 미덕은 참는 것이라고 한다. 남남으로 살았던 사람이 서로 만났고, 게다가 성격도 생각도 배경도 다른 사람이 만났으니 화목보다 갈등의 여지가 훨씬 많다. 그러니 아무리 부부간이지만 서로 참지 않고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가 없다. 당(唐)나라 시대에 장공예(張公藝)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9대가 한 집에서 살았다고 한다. 황제가 그를 불러 그 비결을 물었다. 그랬더니 그가 참을 ‘인’(忍)을 백 개를 써서 황제에게 바쳤다. 참고 참고 참고......또 참는 것이 비결이라는 뜻이다.
본문에서도 이삭과 불레셋의 화평에는 이삭의 인내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물이 귀한 땅에서 우물을 막고 흙으로 메우는 것은 선전포고나 다름없는 일이었고, 우물을 메우는 것은 당시 정복자의 한 모습이었다(왕하3:25). 불레셋 사람들은 이삭에게 정복자처럼 이삭이 파놓은 우물들을 메웠다. 그렇지만 이런 횡포에도 이삭이 끝까지 참았기에 화평이 유지된 것이다.
2. 양보(讓步)
소리나라에 가장 시끄러운 소리마을이 있었다. 이 마을엔 ‘도레미파솔라시’의 일곱 소리가 살고 있었는데, 이들은 서로 자신의 소리만을 주장하며 한 치의 양보도 하지 않았고, 그 결과 소리나라에서 제일 시끄러운 마을이 되었다. 이 마을 아이들은 이런 어른들의 모습이 너무 싫었다. 그래서 그들이 모여 해결책을 의논하였으나 어른들을 설득시킬 방법이 없었다. 그러던 중 ‘도도’가 어른들이 싸우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자, ‘미미’가 따라서 기도를 했고, ‘솔솔’도 기도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세 아이의 소리가 하나로 어우러져 듣기 좋은 화음(和音)이 된 것이다. 다른 아이들도 함께 어우러져 소리를 내 보았고, 이 소리들은 멋진 화음이 되어 너무도 듣기 좋은 소리가 되었다. 아이들의 이 멋진 소리를 듣고, 늘 자신의 소리만 주장하던 어른들은 반성하게 되었고, 서로 조금씩 자신의 소리를 양보하여 멋진 화음을 만들었다. 그래서 소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마을이 되었다.
합창이나 중창에서 화음의 비결은 ‘소리의 양보’에 있다. 사람마다 혹은 악기 하나하나가 제 멋대로 자기만의 소리를 내면 소음이지만 함께 어울려 소리를 내면 화음이 된다. 그러기 위해선 자기 소리만 높이지 않고 다른 사람의 소리를 들으며 자신의 소리를 양보할 수 있어야 한다. 양보를 영어로 ‘concede’라고 한다. 이 단어는 ‘함께’(con)라는 말과 ‘가다’(cedere)라는 말의 합성어다. 즉 양보는 ‘함께 간다.’는 뜻이다. 가령 어른과 아이가 길을 가고 있다면 아무래도 어른은 보폭이 넓고 힘이 좋아서 어린이보다 훨씬 빨리 갈 수 있다. 이런 경우 어른이 아이의 속도에 맞춰준다. 함께 가기 위해서다. 이것이 양보다. 사람 사이의 화목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불이익을 감수하고 양보할 때, 스스로 권리를 포기하고 양보할 때 화목하게 된다. 이삭은 불레셋 사람들이 찾아와서 우물을 메우며 행패를 부릴 따마다 그곳을 그들에게 양보하고 다른 곳으로 장소를 옮겨갔다. 그래서 다툼을 피할 수가 있었다.
3. 희생(犧牲)
앞서 말한 인내와 양보는 희생을 전제한다. 희생이 없이는 참을 수 없고, 희생이 없이는 양보도 없다. 참을 ‘인’(忍)은 마음 ‘심’(心)에 칼 ‘도’(刀)가 합쳐진 것이다. 마음에다 칼을 꽂고 있는 모습이다. 가슴에 비수를 꽂고 있는 것과 같은 희생을 감내해야 인내를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양보 역시 마찬가지다. 자신의 이익이나 권리를 희생해야 양보할 수가 있다. 그러므로 희생은 화목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이를 증거하고 있다. 주님의 희생을 통하여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 사이의 화목이 주어진 것이다(엡2:14~16). 그래서 성경은 예수님을 화목제물이라(롬3:25)고 말씀한 것이다.
화목을 위해서는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한다. 이삭은 화목을 위해서 매번 우물을 다시 파야하는 대가를 치렀다. 물이 흔하지 않는 곳이라 우물을 판다고 하여 물이 나온다는 보장도 없고, 게다가 깊이 파야 물을 얻을 수 있으니 우물을 팔 수 있는 장비도 없는 상황에서 우물을 파는 것은 큰 공사였다. 그리고 우물은 사람과 가축의 생명을 위해서 양보할 수 없는 소중한 재산이다. 이런 상황에서 매번 파놓은 우물을 양보를 하고 새로운 곳에서 우물을 파는 것은 굉장한 희생이다. 중요한 것은 이삭의 이런 희생이 있었기에 불화를 막고 화목을 가져온 것이다. 무슨 일이든 값진 일에는 반드시 희생이 따른다. 화목도 마찬가지다. 내가 참고 양보하고 희생할 때 화목이 있다.
화목의 복
‘退一步 海闊天空’(퇴일보 해활천공)이란 말이 있다. ‘한 발짝 물러서면 바다처럼 넓고 하늘처럼 활짝 열린다.’는 뜻이다. 참고 양보하면 좁디좁은 구속에서 벗어나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갈 수 있다. 세상에 일방적인 것은 없다. 심은 만큼 거두고, 심는 대로 거두는 것이 하나님의 법칙이고 하나님의 정의다. 인내와 양보, 희생을 통한 화목의 삶에는 반드시 주님의 복이 따른다. 이는 이삭의 삶에서 정확하게 성취되었다.
“이삭이 거기서 옮겨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다투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르호봇이라 하여 이르되 이제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넓게 하셨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로다 하였도다.”(22).
이것은 화목을 위하여 희생을 감수하며 참고 양보한 사람 이삭이 얻은 복이다. 하나님은 화목을 위해 참고 양보하며 희생을 감수한 이삭에게 더 이상 다툴 필요가 없는 넓은 곳(‘르호봇’)으로 인도하셨다. 더 좋은 곳, 더 넓고 큰 곳을 주셨다. 이는 두 가지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하나는 ‘형통한 삶’이다.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란 말처럼 관계가 화목하면 모든 것이 형통하게 되는 법이다. 이것이 화목의 복이다. 다른 하나는 ‘영향력 있는 삶’이다. 참고 양보하고 희생하는 사람이 큰 사람이다. 성숙한 사람이고, 훌륭한 사람이다. 주님께서 인정하시고 기뻐하시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의 특징은 주변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게 된다는 점이다. 이삭의 인내와 양보, 희생을 본 불레셋 왕 아비멜렉은 그의 친구 아훗삿과 군대장관 비골과 함께 이삭에게 와서 화친을 요청했다.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 우리의 사이 곧 우리와 너 사이에 맹세하여 너와 계약을 맺으리라 말하였노라.”(28).
전에는 부담스러워 쫓아냈고, 계속해서 괴롭혔는데, 자신들의 이러한 태도에도 끝까지 참고 양보하고 희생하는 이삭의 삶이 그들에게 큰 감동을 준 것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이삭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보게 된 것이다. 하나님이 함께 한 사람이 아니고는 도저히 그럴 수 없다는 판단을 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에게 달려와 서둘러 화친을 요청한 것이다. 화목이란 상대방을 힘이 제압하지 않고 사랑으로 감동시키는 것이다. 화목이란 스스로 무릎을 꿇게 만드는 것이다. 아비멜렉이 달려와서 화친을 요구한 것은 이삭의 영향력이 크게 확장된 것을 의미한다. 전에는 별 볼 일없는 떠돌이 정도로 생각했는데, 이제는 자신들의 평화로운 삶을 보장할 만큼 중요한 인물로 여기게 된 것이다. 주님은 ‘화평하게 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마5:9)고 하셨다. 우리가 화목을 위하여 참고 양보하고 희생할 때 나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하나님의 자녀됨이 세상에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와 좋은 관계를 맺고 싶을 만큼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 되게 하신다. 이런 화목의 복을 위하여 기꺼이 참고 양보하고 희생해서 어느 곳에서든 화목을 만드는 사람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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