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의 통로Ⅸ, ‘섬김’
페이지 정보
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4,569회 작성일 12-03-26 09:43본문
복의 통로Ⅸ, ‘섬김’
마20:20~28
2012. 3/25 08:00, 11:00
서번트 리더십(Servant Leadership)
요즈음 리더십에서 ‘심김’이란 단어가 매우 강조되고 있다. 그래서 ‘섬기는 리더십’(Servant Leadership)이 크게 주목을 받고 있다. 이 용어를 처음 사용한 사람은 로버트 그린리프(R. Greenleaf)이다. 그는 섬기는 리더십을 설명하기 위해 헤르만 헷세(H. Hesse)의 소설 「동방순례」를 인용하고 있다.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동방순례는 각자의 목표를 향해 동방으로 여행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어떤 사람은 진리를 찾아서, 어떤 사람은 뱀을 잡아 돈을 벌기 위해서, 어떤 사람은 사랑을 찾아 동방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순례단에 레오(Leo)라는 하인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먹고 자고 걷는 동안 그는 묵묵히 섬기는 일에만 열중했다. 순례자들이 힘들어 할 때 노래를 불러주고 휘파람을 불면서 지친 그들에게 활력을 불어넣었다. 그는 사람들과 마주치면 ‘무엇을 도와드릴까요?’라고 물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가 갑자기 일행 중에서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러자 순례자들은 그가 해를 당한 것이 아닌가 걱정하며 찾아 나섰다. 그가 비록 하인이었지만 사람들이 걱정할 만큼 중요한 인물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 다음부터 일어났다. 여행길은 기쁘지 않았고, 서로 다투기 시작하여 마침내 순례를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사람들은 그때서야 비로소 레오가 자신들을 이끈 진정한 지도자였음을 깨닫게 된다. 먼 후일 그들이 레오를 만나게 되는데, 그들은 충격적 사실은 알게 된다. 그것은 레오가 하인이 아니라 그들을 파송한 선교단의 지도자였다. 레오의 리더십이 바로 섬기는 리더십이었다. 역사는 섬김의 기적을 연출할 리더를 찾고, 섬김이 리더를 만든다. 섬김만이 기적의 리더십을 세운다. 이 시간에는 복의 통로 아홉 번째, ‘섬김’에 대하여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야망의 요청
본문은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면서 제자들에게 하신 교훈이다. 동행중이던 제자들 사이에 다툼이 일어났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자기 어머니를 내세워 주님이 왕이 되시면 자신들에게 주님의 좌우편 자리를 달라고 부탁했다. 소위 야망의 요청이다. 그리고 이 사실을 알게 된 다른 제자들이 분노했다. 뜻이 같으면 화목하지만 욕심이 같으면 다투는 법이다. 지금 주님은 죽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가시는데 제자들은 권력욕심에 눈이 멀어 있었던 것이다. 십자가의 길이 그들의 눈에는 영달의 길로 보인 것이다. 주님은 이미 세 번이나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이 고난의 길, 죽음의 길이라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그들은 깨닫지 못했다. 이는 그들의 마음이 권력에 대한 야망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욕심에 눈이 멀고, 욕심에 귀가 막히고, 욕심에 마음이 가려져 있으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가르침을 받아도 깨닫지 못한 법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 욕심에 사로잡히면 모든 것을 자기 편의대로 보고, 자기 편의대로 듣고, 자기 편의대로 생각하고, 자기 편의대로 판단하게 된다. 사실 제자들이 그랬다. 주님이 죽으러 가신다고 하니까! 그들은 이 말씀을 왕이 되는 과정에서 일어날 가벼운 충돌 정도로 이해했다. 그리고 3일 후에 부활하신다니까! 결국은 주님이 승리하여 왕이 되시는 것으로 착각했다. 그래서 이런 엉뚱한 생각, 엉뚱한 요구, 엉뚱한 행동을 벌인 것이다.
신앙은 섬김의 길이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의 잘못된 생각을 잡아주시고자 본문의 말씀을 주신 것이다. 섬김을 받는 사람이 되지 말고 섬기는 사람이 되라는 것이다. 이방인의 집권자들처럼 형제 위에 군림하여 지배하는 사람이 되지 말고 형제를 섬기는 사람이 되라는 뜻이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26,27).
이 말씀은 제자들의 생각과 행동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가를 보여주면서, 동시에 섬김에 대한 혁명적인 선포다. 섬김에 대한 이해와 가치를 완전히 뒤집어 놓은 말씀이다. 당시 그리스-로마사회에서 섬김은 노예의 의무였다. 섬김은 노예들에게나 요구되는 덕목이지 자유인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것이다. 자유인의 덕목은 섬김을 받고 지배하는 것이다. 헬라어에 ‘섬기다’는 뜻의 단어(διακονία)와 ‘노예’라는 뜻의 단어(διακονος)가 어원이 같은 것도 이 때문이다. 훗날 ‘디아코니아’나 ‘디아코노스’는 우리 기독교 공동체의 특징을 나타내는 중요한 용어가 되었다. 그런데 주님은 이런 문화에서 살고, 이런 정신으로 숨을 쉬고 있는 사람들에게 ‘섬기는 자가 되고, 섬기는 종이 되어야 한다.’고 역설하신 것이다. 그러니 이 말씀이 듣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충격이었겠는가? 사실 주님의 교훈 대부분이 그랬다. 그래서 주님의 제자가 되겠다고 찾아왔던 한 부자 청년은 심히 근심하며 떠났고(눅18:23), 요한복음에서도 주님의 교훈이 너무 어렵다며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떠났다(6:60,55). 어려운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가치에 충돌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자면 모든 기득권을 포기해야만했기 때문이다. 섬김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모든 기득권을 내려놓는 희생과 헌신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주님은 섬김의 종으로 오셨다.
주님은 몸소 섬김의 본을 보여주셨다. 주님의 생애 전체, 탄생에서 죽으심까지 모두를 ‘섬김’이란 한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 그래서 주님은 본문에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섬기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28).
주님은 섬김의 길 위에 계시고, 섬기는 중에 계신다. 제자들은 영광을 받으려고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으나 주님은 섬김을 완성하기 위해서 가고 계셨다. 지금까지 주님께서 보여주셨던 삶이 온통 섬기는 삶이었다. 십자가를 통하여 그것을 완성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가고 계신 것이다. 그런데 그 와중에 제자들 사이에서 이런 해프닝이 벌어졌다. 이는 주님이 섬기는 종으로 오셨고, 자신들 역시 주님처럼 섬기는 종이란 사실을 잊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사순절이다. 어느 때보다 주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어야 한다. 주님의 삶을 닮아가야 한다. 그것은 섬기는 삶을 실천하는 것이다. 더 낮은 자세로 섬기는 것이다. 사실 신앙의 본질은 섬김에 있다. 그리고 신자는 섬기는 ‘종’(διακονος)이다. 유감스럽게도 워렌 위어스비(Warren W. Wiersbe)는 ‘오늘날 교회속의 슬픈 현상은 유명한 사람들은 많으나 종이 너무 적다.’고 했다. 어디든지 마찬가지지만 특히 교회는 주인은 주님 한 분으로 족하고 모두가 섬기는 종이 되어야 한다. 주님만 주인인 교회, 그리고 모두가 섬기는 종인 교회가 좋은 교회다. 그리고 주님을 섬기는 듯 모두를 섬기는 사람, 그가 참으로 좋은 신자다.
섬기는 자가 잘된다(欲爲大者, 當爲人役).
섬기면 손해고, 실패하고, 없어질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회사도 서비스가 우수한 회사가 성장한다. 「최상의 서비스」라는 책을 쓴 발 지(Val Gee)는 ‘고객의 68%가 단골이 되지 않는 오직 한 가지 이유는 나쁜 서비스 때문이다. 한 사람의 불만고객이 10~20명의 다른 사람들에게 불평한다.’고 했다. 섬김이 결코 손해가 아니라는 말이다. 오히려 섬기는 회사가 잘되고, 서로 섬기는 가정이 행복하고, 섬기는 교회가 건강한 교회이고, 섬기는 나라가 살기 좋은 나라다. 사람들은 세상이 1등만 기억하는 못된 세상이라고 하소연하지만, 사실 세상은 1등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자를 기억한다. 그렇지 않다면 예수님의 이름은 역사상에서 이미 지워졌을 것이다. 주님은 1등이 되어 세상을 지배하지 않고 스스로 섬기는 종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상은 주님을 기억하고, 앞으로도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 주님뿐만 아니라 주님처럼 사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참된 성공, 참으로 잘되고, 잘사는 길이 무엇인지 분명해졌다. 그것은 섬기는 것이다.
예수 잘 믿으세요!
은퇴하고 남한산성에 계시던 한경직 목사님에게 후배 목회자들이 새해 인사차 찾아갔다. 목사님에게 절을 하고 덕담 한 마디 요청하자. 한 목사님이 지그시 눈을 감고 잠시 기도하더니 ‘목사님들, 예수 잘 믿으세요!’ 라고 했다고 한다. 아니 무슨 뚱딴지같은 말인가? 목회자들에게 예수 잘 믿으라니.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 보다 더 중요하고 본질적인 말이 없는 것 같다. 목사직을 잘 수행해서 목회를 잘하고, 교회를 부흥시키고, 왕성하게 활동해서 명성을 얻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예수 잘 믿어서 좋은 신자가 되는 것이다. 목사도 목사이기 전에 신자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위기에 처한 것은 목사가 부족해서가 아니다. 예수 잘 믿는 좋은 신자가 없는 것이 문제다. 사회도 마찬가지다.
‘예수 잘 믿으세요!’ 이 시대에 우리가 꼭 들어야 할 소중한 권면이다. 예수를 잘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처럼 사는 것이다. 예수님처럼 사는 것은 예수님처럼 섬기는 것이다. 우리 모두 예수 잘 믿자!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님처럼 잘 섬기자! 부디 인생을 살아가면서 후회되지 않도록 섬김의 삶을 살자. 이것이 곧 주님 앞에서 큰 자, 으뜸이 되는 인생이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