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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의 통로Ⅳ, ‘헌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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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3,166회 작성일 12-02-05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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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의 통로Ⅳ, ‘헌금’

행5:1~11

2012. 2/5   08:00, 11:00

신앙은 ‘현재형’이다.

쿠바의 작은 교회에서 있었던 일이다. 테오필로라는 사람이 그의 친구에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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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자네에게 양 백 마리가 있다면 그 절반을 주님의 일을 위해 바칠 수 있겠나?’

‘그럼, 그렇게 하고말고.’

‘소 백 마리를 가지고 있어도 역시 그럴 수 있겠나?’

‘물론, 그렇게 해야지.’

‘그래? 그럼 자네에게 있는 돼지 두 마리 중 한 마리는 주님께 바칠 수 있겠지?’

 

그 친구가 잠시 생각하다가 이렇게 대답했다.

 

‘아니, 그럴 수는 없지. 돼지 두 마리가 전 재산인 줄 뻔히 아는 자네가 내게 그렇게 말하다니 섭섭하네. 아무튼 바쁜 일이 있어서 나 먼저 가네.’

 

테오필로의 친구처럼 우리 주변에도 ‘가정법’ 신자가 많다. 믿음은 가정법이 아니라 ‘현재형’이다. 현재 따르고, 드리고, 섬기고,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 궁색할지라도 현재 가지고 있는 것으로 섬기는 것이 믿음이지 ‘만일~한다면~하겠다.’는 것은 믿음이 아니다. 지금 하지 못한 사람은 다음에 기회가 주어저도 못한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가 가진 것을 가지고 ‘지금’ 섬기기를 원하신다. 주님의 제자가 되었던 사람들의 공통점이 주님의 부르심에 ‘즉시’ 응답했던 사람들이다(마4:20,22). ‘곧’, ‘즉시’라는 부사가 제자됨의 중요한 조건이었다. 반면 즉시 따르지 못한 사람을 향하여 주님은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눅9:52)고 하셨다. 그저 지금 있는 그대로 주님께 나아가고, 드리고, 섬기고, 충성하자. 물질적 헌신(헌금)도 마찬가지다. 이 시간에는 복이 따라다니는 복된 인생이 되는 비결 네 번째 ‘헌금’에 대하여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헌금을 하고도 저주를 받은 사람들

본문은 헌금을 드리고도 저주를 받은 부부의 이야기다. 잘못된 헌금생활이 가져온 불행한 사건이다(본문내용생략). 이는 헌금의 정신을 무너뜨리는 것, 헌금을 이기적인 목적으로 악용하는 것(헌금의 잘못된 동기와 목적), 나아가서 헌금으로 장난치는 것에 대한 경계를 교훈하고 있다. 초대교회는 모든 교회들이 닮고 싶어 하는 모범적인 교회다. 특히 재물사용에 있어서 아주 훌륭한 교회였다. 신자들이 아끼지 않고 헌금하여 구성원 모두가 서로 나눠썼다(有無相通을 이룸). 이것은 역사상의 많은 교회들 중에서도 초대교회가 특별히 자랑할 만한 모습이다. 그런데 그 아름다운 초대교회에, 특히 재물사용에 있어 모범을 보인 그 교회에, 바로 재물사용에 시험이 있었다. 사탄이 초대교회의 가장 모범적인 모습에 대하여 시험을 한 것이다. 그렇다. 자랑스럽게 여기는 모습이 사탄의 표적이 될 수 있음을 기억해야한다. 아무튼 이 사건은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헌금을 하고도 저주를 받았다는 불행한 내용이지만 동시에 헌금이 복의 통로인 것을 확실하고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이들 부부가 헌금을 하고도 저주를 받은 이유가 무엇인가? 그들의 헌신이 복의 통로가 아닌 저주의 통로가 된 이유가 무엇인가?

 

허영심과 경쟁심에서 비롯된 위선

앞에서 말한 대로 초대교회는 가난한 이웃들과 나누기 위해 자신의 소유를 팔아 그 값을 다 드린 사람들이 있었다(행4:32~35). 그 대표적인 사람이 구브로 출신 바나바였다(행4:36).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행4:37). 그러자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그의 헌신에 찬사를 보냈고, 그는 초대교회에서 중요한 사람이 되었다. 물론 이 모두는 그의 탁월한 신앙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그의 물질적 헌신도 어느 정도 작용했으리라 생각한다. 그런데 이를 부러워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바나바처럼 남들에게 잘 보여 지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그들이다. 그래서 그들 역시 밭을 팔아 그 값을 드렸다. 바나바처럼 되고 싶어 하는 것(잘 된 사람, 잘 한 사람을 닮고 싶어 하는 것), 가난한 이웃을 위해 자신의 소유를 판 것, 그리고 그 값의 일부를 드린 것 모두 잘 한 일이다. 문제는 일부만 드리고 전부를 드린 것처럼 속인 것이다. 또한 사람(사도들)을 속인 것이 결국은 주님을 속인 것인 줄 모른 것이 문제다.

 

본문은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을 통하여 적게 하면서 많이 한 것처럼 보이려는 거짓과 위선에 대한 경계의 말씀이다. 그들의 이런 거짓과 위선의 배경에는 남들보다 더 잘 보이고 싶은 ‘허영심’과 남들보다 못하지 않게 보이려는 ‘경쟁심’이 있었다. 이 허영심과 경쟁심이 경건을 이익의 수단으로 전락시켰다. 즉 헌금을 교회 내에서 명예를 얻는 것으로 생각하게 만든 것이다. 결국 이것은 주님께 경건하게 보이려고 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경건한 것처럼 보이려고 한 것이다. 그리고 주님께 어떻게 보일 것인가에 마음을 두지 않고,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일 것인가에만 관심을 가지다보니 거짓과 위선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이는 앞에서 ‘자랑스럽게 여기는 모습이 사탄의 표적이 된다.’는 말과 깊은 연관이 있다. 그 이유는 신자들이 서로 경쟁을 하고 더 경건해 보이려고 하는 것은 교회에서 중요하게 생각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분야일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어느 교회가 선교에 집중적인 관심이 있다면 신자들은 선교에 있어 서로 경쟁하여 시험거리를 만들기 쉽다. 아무튼 신자들이 허영심과 경쟁심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도 문제지만 더 심각한 것은 교회 지도자들이 이를 조장한다는 점이다. 소위 목회에 성공(?)한 분들을 보면, 신자들 간의 경쟁을 적절하게 잘 활용한다. 왜냐하면 경쟁심이 성취의 중요한 동기가 되기 때문이다. 헌금도 경쟁을 유발하면 많이 하게 된다. 물론 여기에도 긍정적인 면이 있지만 그 결과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처럼 거짓과 위선에 빠뜨려 헌금을 하고도 저주를 받게 만든다.

 

모두가 주님의 것이다.

어떤 사람이 멋진 침대 하나를 새로 샀다. 그래서 그것을 사람들에게 자랑을 하고 싶었다. 어떻게 자랑할까 궁리를 하다가 꾀병을 부리기로 했다. 꾀병으로 앓아누워 있으면 사람들이 병문안을 와서 침대를 보겠다는 생각에서다. 이 사람의 병 소문이 나자 이웃들이 문병을 왔다. 그런데 그의 이웃 중에 새로 속바지를 구입하고 그것을 어떻게 자랑할까 고민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문병을 와서 방에 들어가자마자 한 발을 침대 위에 올려놓고는 속바지를 살짝 보이면서 이렇게 인사를 했다.

 

‘아니, 어디가 편찮으셔서 거동도 못하고 이렇게 누워 계십니까?’

 

그랬더니 침대 구경을 시키려고 꾀병을 앓던 사람이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내가 앓고 있는 병이나 댁이 앓고 있는 병이나 똑같은 병인 것 같습니다.’

 

자랑하고 싶은 병, 보여주고 싶은 병, 인정받고 싶은 병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병이고, 또한 걸리기 쉬운 병이다. 하지만 신앙은 이것을 넘어서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경건이 이익의 수단으로 전락된다. 즉 헌금의 정신을 무너뜨리게 되고, 나아가서 헌금을 하고도 저주를 받는, 헌금을 복의 통로가 아닌 저주의 통로가 되게 만든다.

 

물질이란 주님께서 주님의 나라와 영광을 위하여, 몸 된 교회의 사역과 지체들을 위한 선한 사역을 위하여 사용하도록 우리에게 맡겨주신 것이다. 그러니 이것을 사사로운 이익의 도구로 사용해서는 안된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헌금을 허영심과 경쟁심의 도구로 삼으려했다가 참사를 당한 것은 결국 헌금의 정신을 망각한데 있다. 본문 2절과 3절에 ‘감추다’라는 말이 나온다. 이는 헬라어로 ‘노스피조’(νοσφιζω)인데, ‘자기에게 속하지 않은 것을 자기를 위해서 갈라놓다. 혹은 떼어놓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단어가 디도서(2:10)에서 유일하게 사용되고 있다. 여기서는 ‘훔치다’는 뜻으로 사용이 되고 있다. 자기 것의 일부를 떼어놓은 것인데, 성경은 이것을 훔친 것으로 말씀한다. 이는 그들이 판 밭 값이 그들의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것은 그들의 밭 값에만 해당되는 말씀이 아니다. 모든 소유에 해당되는 말씀이다. 소유뿐만 아니라 삶도 마찬가지다. 내게 속한 그 어느 것도 나의 소유를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그저 주님의 것을 빌려 쓰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렌트인생’이라 하는 것이다. 또한 주님께서 맡기신 것을 관리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청지기 인생’이라 하는 것이다.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라는 고백에서 건강한 믿음, 건강한 헌금생활이 시작된다. 헌금을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 사용하지 않고, 적게 하면서 많이 한 것처럼 속이지도 않는다. 그래서 헌금을 저주의 통로가 아닌 축복의 통로가 되게 하는 것이다.

 

복의 근거를 찾으시는 하나님

모든 것에 부요하신 주님께서 뭔가 부족한 것이 있어서 우리에게 물질적 헌신을 요구하신 것이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무엇이든지 많이 드리고, 다 드리라고 하셨을 것이다. 굳이 소산의 ‘처음 익은 열매’, 혹은 ‘십일조’만 드리라고 하시지 않았을 것이다. 주님의 이러한 요구에는 두 가지 중요한 뜻이 있다. 하나는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주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인정하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에게 복을 주실 근거를 찾고 계신다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주목해야 할 중요한 사항으로 헌금의 중요성이자 헌금을 드려야할 이유다. 헌금은 ‘물질의 주인이 주님이심을 고백하는 것인 동시에 주께서 베푸실 복의 근거’다(잠3:9,10). 이런 믿음과 고백에 기초하여 물질적인 헌신을 하는 사람에게 헌금은 복의 통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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