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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의 통로Ⅹ, ‘겸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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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4,628회 작성일 12-04-01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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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의 통로Ⅹ, ‘겸손’

마15:21~28

2012. 4/1   08:00, 11:00(종려주일)

머리를 많이 숙이라! 그러면.......

옛날 어느 왕이 민심을 살피러 밖으로 나왔다가 길가에서 비바람에 깎이고 사람들에게 시달려 볼 품 없는 초라한 돌부처를 보게 되었다. 왕은 가던 길을 멈추고 그 돌부처를 향해 공손히 절을 했다. 그 모습을 본 신하가 ‘어찌하여 전하께서는 이런 하찮은 돌부처에게 머리를 숙이시옵니까?’ 하고 물었다. 왕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주변을 돌아보고 궁으로 돌아왔다. 다음날 왕은 그 신하를 불러 아홉 개의 짐승 목과 한 개의 사람 목을 주면서 그것들을 시장에 내다 팔고 오라고 하였다. 저녁때가 되어 그 신하는 짐승 목은 다 팔았는데, 사람 목은 팔지 못했다며 다시 가져왔다. 그러자 왕은 그 신하에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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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서도 잘 팔리는 짐승의 목보다 한 번 죽으면 어느 누구도 찾지 않는 쓸모없는 그 목, 살아 있을 때 그 목으로 머리를 많이 숙이라. 그러면 이루지 못할 일이 없다.’

 

베들레헴에 예수님탄생기념교회가 있다. 넓은 구유광장을 지나면 예배당 입구가 나오는데, 겨우 한 사람정도 그것도 허리를 굽혀야 들어갈 수 있을 만큼 건물에 비해서 문이 작고 낮다. 그래서 누구든지 그곳에 들어가려면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굽혀야만 한다. 이 예배당의 문을 이렇게 특별하게 만든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님께서 가장 낮은 곳 구유로 오셨으니 그 주님을 만나고 섬기기 위해선 겸손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라고 한다. 금번 성지순례에서 그 문을 혼자서 서 너 번 왕복하며 겸손의 중요성을 새기면서 겸손한 예배, 겸손한 기도, 겸손한 찬양, 겸손한 섬김, 겸손한 목회, 겸손한 신앙을 스스로 다짐했다. 앞서 어느 왕의 말처럼 머리를 숙이면, 곧 겸손하면 이루지 못할 일이 없다. 이 시간은 복의 통로 열 번째, ‘겸손’에 대하여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아름다운 겸손의 모델

본문은 주님께서 잠시 쉬기 위하여 유대지역을 벗어나 두로와 시돈지역으로 가셨을 때 일이다. 그런데 주님의 소문을 듣고 그 지역에 살고 있는 한 여인이 주님을 찾아와서 귀신에 붙잡혀 고통을 당하고 있는 딸을 구원해 달라고 간청했다(22).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주님은 그녀의 간청을 외면한다(23). 그것도 민족감정을 앞세워 상대방을 무시하는 모욕적인 발언까지 하시면서 말이다(24,26). 평소 차별 없이 사람을 대하시고, 질병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보시면 불쌍히 여기시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말씀과 행동이다. 그렇지만 이 여인은 주님의 이런 말씀과 행동에 전혀 개의치 않고, 오히려 이를 긍정적으로 수용했다(27). 그래서 결국은 주님께 감동을 드리고, 자신의 문제를 해결 받았다(28). 이 여인의 모습은 자신의 아이를 살리고자 주님께 매달리는 간절한 모정 이상의 교훈을 우리에게 준다. 그것은 아름다운 ‘겸손의 모델’이다. 참된 겸손이 무엇이고, 겸손한 사람이 어떤 복을 누리게 되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이 여인이 보여준 참된 겸손은 ‘엎드림’이다(25). 즉 주님 앞에 엎드린 것, 주님의 이름으로,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엎드리는 것이 참된 겸손이다. 그리고 자신의 존재를 정확하게 인식하는 것이다(27). 감히 주님의 은혜를 구할 자격은 없지만 주님의 은혜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인 것을 아는 것이다. 모 장관처럼 만나는 사람마다 90°로 고개를 숙여 인사한다고, 선거철마다 흔히 볼 수 있는 후보자들이 유권자들 앞에서 넙죽 엎드려 큰 절을 한다고 겸손이 아니다. 겸손은 외적인 모습이나 행동이 아니다. 오히려 겸손을 가장한 위선일 수 있다. 그래서 스피노자는 겸손을 ‘오만한 행위’라고, 심지어는 일종의 ‘노예근성’이라고 비난했다. 위선적인 겸손에 대한 경고라고 할 수 있다. 참된 겸손은 본문의 이 여인처럼 자신이 얼마나 형편없는 존재인지를 알고 주님 앞에 엎드리는 것이다.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안된다는 것을 알기에 주님의 은혜를 구하기 위하여 그 앞에 엎드리는 것이 참된 겸손이다. 중요한 것은 이 겸손이 사람을 살리고, 주님께 칭찬받는 소중한 사람을 만든다. 본문에서 이 사실을 확인할 수가 있다.

 

주님은 겸손한 사람에게 은혜를 주신다.

물은 낮은 곳으로 흐른다. 주님의 은혜도 마찬가지다. 낮은 곳, 깨지고 부서져서 부드러운 곳, 겸손한 곳으로 임한다. 거기서 기뻐하는 꽃과 아름다운 열매를 맺도록 한다. 주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기 때문이다(약4:6). 또한 겸손한 사람의 소원을 들어주시는 분이기 때문이다(시10:17). 그러니 겸손이 주님의 은혜를 받는 자세이고, 또한 그 은혜를 유지하며 누리는 자세다.

 

대개의 경우 주님은 사람들의 요구에 항상 적극적으로, 기대이상으로 반응하셨다. 그런데 본문의 경우는 예외다. 아주 소극적이다. 아니 아주 모욕적이다. 아무튼 그 분명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반면에 한 가지 분명하게 드러난 것이 있는데, 그것은 이 가나안 여인의 자세다. 주님의 반응이 거칠어질수록 그녀의 반응은 더욱 겸손해진다. 주님의 반응이 ‘무시’(23)에서 ‘거부’(24)로, 거부에서 ‘모욕’(26)으로 그 강도가 강해질수록 그녀의 자세 또한 점점 더 낮아졌다. 22절에서는 “소리를 질러”, 25절은 “와서.......절하며”, 그리고 27절에는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고 외쳤다. 모욕적인 주님의 말씀에 이처럼 놀라운 기지(奇智)를 발휘할 수 있는 것은 겸손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이와 같은 그녀의 겸손함이 주님을 감동시켰다. 그래서 주님이 이렇게 선언하셨다.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28).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겸손하면 주님의 은혜를 받는다. 겸손하면 소원을 이루게 된다. 주님을 감동시킨다. 원문에는 ‘여자여’라는 단어 앞에 감탄사 ‘오’가 있다. “오 여자여.......” 그러나 이보다 더 크고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주님의 ‘칭찬’을 받은 것이다.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주님께서 이렇게 칭찬하신 것은 가나안 여인이 최초다. 마태복음이 유대인 공동체에게 주어진 복음인데, 정작 주님께 칭찬을 받은 사람은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이고, 남자가 아니라 여자였다. 당시 유대인들은 이방인에 대한, 여자에 대한 심각한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주님은 민족적인 차별을 넘고, 남녀의 차별을 넘어 이 여인에게 이렇게 큰 영광을 안겨 주신 것이다. 여기 ‘여자여’ 라는 단어만 보아도 그렇다. 이 단어는 존칭어로 주님이 어머니 마리아를 부를 때도 이 단어를 사용하셨다(요2:4). 이 여인은 이방인이고 그 중에서도 여성이었으니 정말 개와 같은 취급을 받는 인생이었는데 주님께서 그를 크게 높여 칭찬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사건은 민족과 성별을 뛰어넘는 복음의 보편성, 그리고 주님께서 찾으시는 사람이 누구인가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주님은 겸손한 믿음의 사람을 찾고 계신다. 그를 높이 들어 칭찬하시고, 축복하신다.

 

주님께 사랑받고 인정받고 칭찬받는 것은 우리 모두의 소망이고 관심이다. 비결은 겸손한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가나안 여인처럼 겸손하게 주님을 찾고, 겸손하게 무릎을 꿇고, 겸손하게 구하는 것이다. ‘복을 받으려는 우리의 열정보다 복을 주시려는 주님의 열정이 더 크다.’고 어거스틴은 말했다. 그러므로 우리가 겸손한 믿음의 사람이 되기만 하면 주님의 복은 우리에게 쏟아지고, 흘러넘친다. 저와 여러분이 이런 복을 경험하고 누릴 수 있기를 바란다.

 

정말 중요한 것은.......

좋은 글이 있어 소개한다. ‘정말 중요한 것은 당신이 어떤 차를 모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람을 태워 주느냐는 것이다. 정말 중요한 것은 당신이 사는 집의 크기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람을 집에 초대하느냐는 것이다. 정말 중요한 것은 당신이 얼마나 가졌느냐가 아니라 남에게 얼마나 베푸느냐는 것이다. 정말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은 친구가 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람이 당신을 친구로 생각하느냐는 것이다.......정말 중요한 것은 당신이 얼마나 좋은 동네에 사느냐가 아니라 당신이 이웃을 어떻게 대하느냐는 것이다.’ 여기에 몇 가지 덧붙인다면 정말 중요한 것은 당신이 얼마나 많은 업적을 남겼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많이 섬겼느냐는 것이고, 정말 중요한 것은 당신이 얼마나 높이 올라갔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겸손하게 마음을 낮췄느냐는 것이다.

 

여기에 ‘겸손하게 마음의 낮춤’을 덧붙인 것은 사실 이것이 다른 모든 것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겸손이 없이는 내 차에 다른 사람을 기꺼이 태울 수 없고, 겸손이 없이는 내 집에 다른 사람을 기꺼이 초대할 수 없고, 겸손이 없이는 기꺼이 남에게 베풀 수 없고, 겸손이 없이는 다른 사람을 기꺼이 섬길 수가 없다. 나아가서 겸손이 없이 주님의 은혜를 담을 수 없고, 겸손이 없이는 주님의 능력을 담을 수 없다. 겸손이 없이 주님 앞에 나아갈 수도 없다. 그래서 예로부터 겸손을 신자가 갖춰야 할 ‘최고의 덕’이라고 여겼다. 오늘은 주님께서 어린 새끼 나귀를 타시고 사람들의 환영을 받으며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신 날이다. 사람들이 주님이 가시는 길 위에 종려나무 가지를 깔고, 손에는 그 가지를 들고 환영했다고 하여 ‘종려주일’이라고 부른다. 만왕의 왕에 대한 환영치고는 너무 초라한 모습이다. 그런데 성경은 이 모습을 두고 주님께서 섬기는 겸손의 왕으로 오셨기 때문이라고 말씀한다. 결국 이는 겸손한 사람, 겸손한 마음이 아니고는 주님을 모셔드릴 수 없음을 보여준 것이다. 겸손은 주님의 모든 복이 우리에게로 임하는 통로다. 가나안 여인처럼 겸손하게 주님을 찾고, 겸손하게 무릎을 꿇고, 겸손하게 구하는 삶을 살자. 무엇보다도 겸손하게 주님을 마음속에 모셔드리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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