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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김 불멸의 법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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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agathos 댓글 0건 조회 287회 작성일 24-12-15 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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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김 불멸의 법칙

25:31~46

2024. 12/15 11:00(대강절 셋째 주일)

끝은 반드시 온다.

본문은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성도의 삶의 자세에 대한 세 번째 비유, ‘양과 염소의 비유. 열 처녀 비유와 달란트 비유, 그리고 본문의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반드시 이 온다. , 주님께서 반드시 재림하신다는 것이다. 앞의 두 비유는 먼 어느 날주님이 오신다(6,19)고 했는데, 본문은 그 주님이 이미 오셨고, 심판이 시작되었다(31). 그리고 주님의 재림은 심판을 동반하게 된다. 열 처녀 비유에서는 슬기로운 처녀와 미련한 처녀, 달란트 비유에서는 착하고 충성된 종과 악하고 게으른 종으로 심판이 행해졌고, 분문에서는 복 받을 자와 저주 받을 자, 곧 영생에 들어갈 의인과 영벌에 들어갈 악인으로 심판이 행해졌다. 특히 본문이 강조한 것은 주님의 심판(재림) 때 중요시 되는 것은 사랑의 계명,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22:39)는 말씀을 얼마나 구체적으로 실천했는가 하는 점이다.

 

심판의 특징

25장의 비유들은 독립적이면서 또한 서로 연결되어 있다. 열 처녀 비유는 주님이 언제 오실지 모르니 깨어 준비하고 있어라는 것이고, 달란트 비유는 깨어 준비하는 것은 달란트를 맡겨주신 주님을 위해 충성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양과 염소 비유는 우리가 충성해야 할 내용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본문에 충성해야 할 구체적인 내용 여섯 가지가 제시되어 있다. 굶주린 자를 먹이는 일, 목마른 자를 마시게 하는 일, 나그네를 영접하는 일, 헐벗은 자를 입히는 일, 병든 자를 돌보아주는 일, 그리고 옥에 갇힌 자를 찾아보는 일이다. 이런 사랑의 행동이 네 번이나 반복해서 강조되고 있다(35~36, 37~39, 42~43, 44). 이들은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사회적, 경제적, 육체적으로 연약한 지극히 작은 자들이다. 주님은 이런 사람에게 행한 사랑의 실천이 곧 주님 자신에게 행한 것이라고 강조하셨다(40,45). 이런 사람을 성심껏 섬기는 일이 주님께 충성하는 것이고, 깨어 준비하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주님께서 행하신 최후 심판의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1. 주님의 심판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데 있다.

주님의 심판에서 다루어지는 죄는 우리가 범한 악행이나 계명을 어긴 것이 아니다(sins of commission). 마땅히 해야 함에도 게으름과 무관심으로 그냥 지나쳐버리고 행하지 않은 것이다(sins of omission). 본문에 저주를 받을 자들’(41)이라 하여 영벌’(46)에 처하게 된 사람들의 죄 목록에는 그들이 행한 악행은 하나도 언급되어 있지 않다. 오직 작은 자들에게 사랑의 행위를 하지 않은 일만 언급되고 있다(42~43절에 아니하였고라는 표현이 5회 반복). 물론 복 받을 자들’(34)로 인정이 되어 영생’(46)에 들어가게 된 사람들도 악행을 저지르지 않아서라기보다 작은 자들에게 사랑의 행위를 한 것 때문이다. 이와 같은 내용은 앞의 두 비유에서도 마찬가지다. 어리석은 다섯 처녀가 어떤 악행을 저질러서 혼인잔치에 들어가지 못한 것이 아니라 준비해야 할 기름을 준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 달란트 받았던 종 역시 그가 저지른 악행 때문에 바깥 어두운 데로 쫓겨난 것이 아니라 게을러서 달란트를 땅에 묻어두고 아무 것도 하지 않은 것 때문이다.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는 마땅히’ 깨어서 준비해야하고, 종은 주인이 맡겨주신 것에 마땅히’ 충성해야하고,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주님이 사랑하는 지체들(이웃)마땅히’ 사랑해야한다. 이런 일을 게을리 하는 것이 죄다. 이를 야고보의 표현을 빌리면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인 것(2:26)이다. 본문은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을 정죄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마태복음의 핵심사상이다(5:20,48, 7:24~27, 18:21~35, 21:19 ). 본문은 이런 의미에서 마태사상의 요약이고 결론이다. 전통적으로 마태복음을 신앙공동체를 위한 훈련독본’, 혹은 교회교과서라고 부른 것도 이 때문이다. 아무튼 이웃을 사랑하는 것, 특히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연약한 사람을 사랑으로 돌보는 것은 교회와 성도가 해야 할 마땅한 일이다. 이것이 곧 주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이며(40), ‘산 믿음의 증거다.

 

2. 주님의 심판은 영적 파종의 법칙에 의존한다.

바울은 영적 파종의 법칙을 강조한 바 있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6:7,8). 바울은 여기서 심는 대로 거둔다.’는 중요한 영적 원리를 제시하고 있는데, 본문에 이 원리가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 연약한 이웃에게 사랑의 행위를 심은 사람에게 주님은 영생을 선물로 주셨고, 이것을 외면한 사람에겐 영벌을 주셨다. 주님은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는 분이요, 아무리 사소한 것, 심지어 냉수 한 그릇까지도 그 행한 것을 갚으시는 분이다. 비슷한 말씀을 주님께서도 하셨다.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10:40~42).

 

여기서 중요한 진리를 하나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현재의 삶이 우리의 미래를 결정한다는 사실이다. 현재의 마음가짐과 태도에서 미래의 내 모습이 결정되고, 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의 삶이 저 나라에서의 삶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현재, 여기에서의 삶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현재 무엇을 심고, 어디에 심고, 얼마나 심느냐에 관심을 가지라고 말씀한다. 아울러 현재라는 시간을 미래를 위한 투자의 기회로 알고 선용하라고 권면한다.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딤전6:18,19).

 

물리학에 원소불멸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다. 이 볼펜이 불에 타서 없어지면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이 볼펜을 구성하고 있는 원소는 없어지지 않고 이 우주공간에 영원히 남아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원소불멸의 법칙이다. 물리학에 원소불멸의 법칙이 있는 것처럼, 신앙에는 섬김 불멸의 법칙이 있다. 우리가 역사의 이랑에 심은 작은 섬김의 씨앗은 언젠가는 꽃피어 열매를 맺을 것이다. 물론 남이 보지 않는 데서 하는 일이라 사람은 모를 수 있다. 그렇지만 주님은 완벽하게 기억하셨다가 반드시 보상해 주신다. 주님은 영적 파종의 법칙에 따라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영적 파종의 법칙과 일반적인 인과율과 혼동을 한다. 그런데 영적 파종의 법칙은 인과율과 다르다. 인과율에는 덤이나 용서, 은혜가 설 자리가 없다. 하지만 이 영적 파종의 법칙은 증대의 법칙이다. 한 개를 심으면 하나의 열매가 열리는 것이 아니라 그 하나에서 100, 60, 30배의 열매를 거둔다. 본문에서 의인이 사소한 사랑의 실천을 통해 영생을 선물로 받은 것이 그 예다. 그러므로 성도는 내가 쏜 화살을 어디서 찾을까 염려하지 말고, 기회가 있고 힘이 있는 한 무한히 화살을 날려 보내야 한다. 본문의 의인들은 자신이 행한 선행에 대하여 전혀 기억을 못하였다. 반면에 악인들은 베풀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고 변명했다. 의인은 섬기는 것을 마땅히 해야 할 사명으로 여겼기 때문이고, 습관화(일상화) 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은밀한섬김이다. 주님은 다 보시고 또한 기억하셔서 영생으로 보답하셨다.

 

사랑의 청지기

어느 목사님이 신장에 이상이 있어서 병원에 입원했다. 검진결과 신장이식을 해야만 목회활동을 계속할 수 있다는 결과가 나왔다. 어느 주일, 다른 교회 목사님이 그 교회에서 설교를 하게 되었는데, 설교 중에 목사님의 안타까운 사정을 알리면서 목사님을 위해 신장기증을 원하는 사람이 있으면 손을 들어보라고 했다. 여기저기서 손을 들기 시작하더니 천 여 명의 성도 거의가 손을 들었다. 이 목사님은 성도의 사랑과 헌신에 큰 감동을 받았다. 하지만 모두가 기증하겠다고 나서니 그것도 문제였다. 그래서 목사님이 한 가지 제안을 했다. 모두가 기증을 원하고 있는데 특정인을 지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것 같으니 오리털을 날려서 그것이 내려앉는 사람을 기증자로 정하겠다고 했다. 그리고는 오리털을 하나 뽑아 회중석을 향하여 날려 보냈다. 그런데 그 오리털이 어느 곳으로 내려앉으려고 하자 그 주변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공중을 바라보며, ‘주여! 할렐루야! 아멘!’을 외쳤다. 내려앉으려던 오리털이 다시 공중으로 올라가 다른 곳으로 갔고, 그곳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났다. 이 일이 계속해서 반복되었고, 결국 오리털은 밖으로 멀리 날아가 버렸고, 기증자는 정하지 못했다.

 

지어낸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것이 우리의 현주소가 아닌지 모르겠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마음만 가지고는 부족하다. 사랑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다. 사랑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실천이고 희생이다. 주린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른 사람에게 마실 것을 주고, 나그네를 영접하여 환대하는 것이 사랑이다. 상대방의 필요를 채우기 위하여 자신의 소중한 것까지 기꺼이 내어주는 것이다. 우리는 주님의 청지기다. 특히 이웃을 돌보고 섬겨야 할 사랑의 청지기. 본문은 사랑의 청지기로서의 삶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 모두 이 일을 충성스럽게 잘 감당하여 주님 다시 오실 때 영생의 복을 받을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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