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뜨겁게 사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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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agathos 댓글 0건 조회 18회 작성일 26-04-26 13:46본문
다시 뜨겁게 사랑하라.
말1:6~10
2026. 4/26. 11:00
마음이 없는 선물
매달 어머니에게 커다란 선물 상자를 보낸 아들이 있었다. 이를 본 이웃들은 ‘저 집 아들은 참 지극정성이네’라며 칭찬했고, 그는 곧 효자로 소문이 났다. 하지만 어머니의 마음은 무너졌다. 아들이 보낸 상자 안에는 먹다 남긴 딱딱하게 굳은 빵 조각, 작동이 멈추기 직전인 낡은 중고 가전제품, 심지어 어떤 날은 유효기간이 한참 지나 배탈이 날 법한 음식물이 담겨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는전화로 어머니에게 항상 이렇게 말했다. ‘어머니, 제가 이번 달에도 잊지 않고 보낸 선물 잘 받았죠? 저처럼 꼬박꼬박 챙기는 자식도 없어요. 제 성의를 생각해서 고맙게 받으세요.’
이 아들에게 선물은 어머니를 향한 사랑의 표현이 아니라 해야 할 숙제 정도로, 자식으로서 도리를 다했다는 ‘자기만족’이자 ‘의무’였다. 그러다 보니 먹다 남은 것, 사용할 수도 없는 것, 심지어는 먹을 수도 없는 것을 보내면서 정성을 다했다고 생각한 것이다. 무엇이든 어머니는 받아줄 것이라고 여기는 당연함, 이 당연함에서 비롯된 무례함이다. 이런 아들에 대해 누구에게도 말할 수가 없으니 어머니의 마음이 무너진 것이다. 이 이야기 속 아들의 모습은 말라기 시대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이다. 그들은 예배드릴 때 하나님을 만나는 설렘보다 마지 못해 참석하여 그저 출석 체크 완료라는 안도감만 느끼고, 가장 좋은 시간과 열정은 자기를 위해 쓰고, 남는 자투리 시간과 힘 빠진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면서 정성을 다했다고 착각한 것이다. 하나님은 선물의 양이나 종류가 아니라 그 ‘선물이 내 삶에서 어떤 가치를 지닌 것인가’를보신다. 또한 이것이 우리의 모습은 아닌지 모르겠다.
말라기서의 특징
말라기서는 바벨론에서 고국으로 돌아와 새로 성전을 건축하여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의 영적 상태를 잘 보여주는 구약성경의 마지막 책이다. 본서는 총 ‘55절’인데, 그중에서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것이 ‘47절’이나 된다. 성경 전체에서 하나님의 말씀 비중이 가장 높다. 약 85% 이상이 하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이다. 본서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논쟁/설전’(Debate) 형식을 빌려 당시 타락한 영적 상태를 날카롭게 지적한다. 즉, ‘하나님의 말씀 → 백성의 반문 → 하나님께서 증거를 제시’의 구조로 논쟁(설전)이 전개되고 있다. 이런 구조로 논쟁이 모두 6개가 나오고 있는데, 본문은 두 번째 논쟁의 일부다. 그리고 이 두 번째 논쟁은 그들의 형식적인 예배(제사)에 대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 아버지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버지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경외함)이 어디 있느냐.’(6). 왜 나를 공경하지도 않고 경외하지도 않고 멸시하느냐는 것이다. 그러자 그들이 이렇게 반문했다.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6b). 우리가 꼬박꼬박 챙겨서 예배도 드리고, 예물도 드리지 않았냐는 것이다. 이에 하나님께서 그 증거를 제시하셨다. 그 내용이 7절 이하다. 더러운 떡을 제단에 드리고(7), 눈먼 것과 병든 것을 희생물로 바치고(8), 훔친 물건과 저는 것을 가지고 왔다(13). 이 모두는 하나님을 경멸히 여기기 때문이라는 것이다(7,8). 그러면서 이렇게 물으셨다.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 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으며 너를 받아주겠느냐.’(8b).
영적 온도를 높여라!
그렇다면 그들이 왜 이렇게 된 것일까? 그들은 하나님을 ‘아버지’와 ‘주인’이라 불렀지만, 정작 이에 걸맞은 ‘존경’과 ‘경외함’(두려움)이 없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자녀가 되는 특권, 그래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기도할 수 있는 특권을 은혜가 아니라 ‘당연함’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은혜를 당연하게 여기면 가장 먼저 감사가 죽고, 감사가 죽으면 영적 불감증에 빠지게 된다. 영적 불감증은 설렘과 감격, 경외심이 사라진 형식적이고 타성에 젖은 신앙생활로 이어진다. 그러니 최선이 아닌 찌꺼기를 드리게 되는 것이다. 나에게는 필요 없지만 버리기는 아까우니까 그것을 예물이라며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더러운 떡을 제단에 드리고, 눈먼 것, 저는 것, 병든 것을 희생 제물로 드렸다. 또한 사명을 짐으로(13절 ‘이 일이 얼마나 번거로운고’), 섬김을 귀찮은 노동으로 여겼다. 이렇게 ‘억지로 하는 순종’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고, 오히려 우리 영혼을 메마르게 만든다. 그러니 영적 온도가 급격히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이 ‘영적 온도’를 높이는 것이다. 어떻게 영적 온도를 높일 수 있을까?
우선, ‘당연함’이라는 독을 제거해야 한다. 말라기 시대 이스라엘 백성의 문제는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숱한 은혜를 당연함으로 여기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당연하게 여기던 것들을 ‘감사’로, ‘경이로움’으로 바꾸는 연습이 필요하다. 내가 구원을 받아 천국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비롯하여 이렇게 건강한 모습으로 예배드리고, 기도와 찬양을 드리고, 오늘이라는 일상을 누리고 있는 것을 당연한 권리가 아닌 ‘특별한 은혜’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사실 우리가 가진 그 어떤 것도 당연한 것은 없다. ‘당연한 것은 없다.’라는 사실을 깨달으면 필연적으로 감사가 따라온다. 세상은 온통 경이로움으로 가득 차게 된다. 아인슈타인의 말이다. ‘인생을 사는 방법은 딱 두 가지다. 하나는 아무것도 기적이 아닌 것처럼 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모든 것이 기적인 것처럼 사는 것이다.’ 여기서 삶의 태도와 삶의 질이 결정된다. 아무것도 기적이 아닌 것처럼 사는 사람의 삶은 나른하고 지루할 수밖에 없다. 반면에 모든 것이 기적인 것처럼 사는 사람의 삶은 감사와 경이로움으로 가득 찰 수밖에 없다. 이런 삶의 태도가 영적 온도를 높이는 비결이다.
다음은, 사명을 짐이 아니라 특권으로 바꾸는 것이다. 무거운 짐을 평생 떠안고 살아야 한다는 것은 참으로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이다. 주변에 의외로 이렇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많다. 당시 이스라엘의 제사장들도 그랬다. ‘이 일이 얼마나 번거로운고’(13). 하나님을 섬기는 일, 곧 제사(예배) 드리는 일이 번거롭다는 뜻이다. ‘번거롭다.’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마탈라아’(מַתְּלָאָה)라고 한다. 어떤 일을 ‘진저리나게 싫어하거나 가치 없게 여겨서 느끼는 심리적 피로감’을 뜻한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마치 ‘에너지를 갉아먹는 노동’처럼 취급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흠 없는 제물을 원하셨는데, 그들은 ‘대충 아무거나 드리면 되지 왜 이렇게 까다롭게 구냐’며 불평하면서 비아냥거렸다. 그들에게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가 특권이 아니라 차라리 하지 않는 것이 나은 짐으로 여겼던 것이다. 그러니 영적 온도가 뚝뚝 떨어지는 영적 불감증에 빠져서 설렘과 감격, 경외심이 사라진 형식적이고 타성에 젖은 신앙생활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영적 온도를 올려야 한다. 예배를 비롯한 모든 경건한 활동이 번거로운 짐이 아니라 영광스러운 특권으로 여겨야 한다. 사실이 그렇다. 우리가 믿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선택에서 시작이 되었다.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고르고 골라 우리가 선택을 받은 것이다. 그러니 선택은 특권이다. 선택이 특권이라면 선택 이후 일어나는 모든 일도 특권인 것이다.
사랑이 묘약(妙藥)이다.
‘오늘도 일해야 한다.’ ‘오늘도 일할 수 있다.’ 서로 비슷하지만 매우 다르다. 전자는 그래서 힘들고 싫다는 것이다. 짐으로 의무감으로 하는 일이라 그렇다. 반면에 후자는 이렇게 힘들고 어려운 시기에, 그리고 이 나이에 할 일이 있다는 것이다. 일을 짐이 아니라 기회로 본 것이다. 그래서 감사하고 행복하다는 것이다. 같은 일인데 일에 대한 태도에 따라 반응이 이렇게 다르다. 이런 태도는 바라보는 관점 때문이다. 행복이란 대상의 문제가 아니라 ‘관점’의 문제다. 그러니 외부 환경을 바꾸는 것보다 내 마음의 렌즈를 닦는 것이 훨씬 빠르고 확실한 변화의 시작이다. 같은 상황이라도 그것을 가로막는 ‘벽’으로 보느냐, 타고 넘을 ‘디딤돌’로 보느냐에 따라 우리가 내딛는 다음 발자국은 완전히 달라진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도 다르지 않다. 예배에 대한 관점, 기도에 대한 관점, 섬김에 대한 관점, 사명에 대한 관점에 따라 평가와 태도가 완전히 달라진다. 뜨겁고 감격스럽게, 감사와 설렘으로 예배하고 기도하고 섬기고 헌신하고 충성하게 된다.
무엇이 이런 관점을 갖게 할까? ‘사랑’이다. 〈사랑의 묘약〉이란 오페라가 있는데, 사랑에 묘약이 있는 것이 아니고 사랑 자체가 ‘묘약’(신통하게 잘 듣는 약)이다. 과학자들은 사랑을 뇌에서 분비되는 화학 물질의 잔치라고 부른다. 도파민(상대만 봐도 가슴이 뛰고 행복해지는 ‘천연 마약’ 같은 역할), 옥시토신(깊은 유대감과 신뢰를 만드는 ‘공감 호르몬’), 페닐에틸아민(일면 ‘콩깍지 호르몬’), 노르에피네프린(심박수를 높이고 에너지를 분출하는 ‘활력 호르몬’), 바소프레신(책임과 헌신과 충성을 끌어내는) 등이 사랑할 때 나온다. 그러니 사랑하면 상대방도 행복하게 만들지만 당사자가 더 행복하게 된다. 그래서 사랑에 빠지면 행복한 것이다. 주님을 섬기는 것이 행복하고, 주님을 예배하고 헌신하는 것이 기쁘고, 주님께 기도하고 찬양하는 것이 즐거운 것은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사랑이 식으면 말라기 당시 이스라엘 백성처럼 영적 불감증에 빠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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