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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 호소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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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agathos 댓글 0건 조회 478회 작성일 24-08-18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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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 호소해야 할까?

5:15~6:1

2024. 8/18(성령강림 열네 번째 주일)

모세의 일생

세월이 바뀌면 사람도 바뀌고, 정권도 바뀌고, 환경도 바뀌고, 사람의 인심도 바뀌게 된다. 1장에서 이를 실감할 수 있다. 요셉을 생명의 부양자’, 혹은 생명의 공급자로 떠받들고, 이런 요셉의 가족이라고 환대하던 이집트 사람들이 돌변해서 요셉의 후손인 이스라엘을 경계하다 못해 그들을 노예로 만들어 온갖 착취를 일삼았다. 그들의 번성에 놀라 산아제한 정책을 시행하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남아살해, 더 나아가 남아자진살해라는 끔찍한 정책까지 시행했다. 참으로 격세지감(隔世之感)이 아닐 수 없다. 바로 그 엄혹한 시절에 민족의 구원자로 한 아이가 태어났는데, 그가 곧 모세. 이 모세는 바로의 공주 아들로 40, 광야에서 이드로의 데릴사위로 40, 80세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120세까지 민족구원이라는 하나님의 사역자로 40년을 살았다.

 

복음전도자 D. L. 무디는 모세의 120년 생애를 3기로 나눠서 설명했다. 처음 40년은 이집트 공주의 아들이라는 고귀한 신분으로, 이집트의 선진학문을 다 배워 말과 일에 힘이 있는 모든 것을 갖춘 사람이었다. 거기다가 외모 또한 출중한 사람이었다. 무디는 이때의 모세를 ‘I am something’의 사람이라고 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모세를 사용하지 않으셨다. 모세가 자기 민족을 학대하는 이집트 사람을 쳐 죽였는데, 이 때문에 살인자로 쫓기는 신세가 되어 미디안 광야로 숨어들어갔다. 무디는 이때의 모세를 ‘I am nothing’의 사람이라고 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라고 자포자기 속에 살아간 40년이다. 이때 모세는 이드로의 데릴사위로 광야에서 장인의 양을 치는 목동으로 살았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런 모세를 부르셨다.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여기던 시기에는 쫓기는 도망자, 실패자로 끝맺게 하시더니, ‘아무것도 아니다.’ 라고 할 때 찾아오셨다. 모세의 제3기 즉, 80세에서부터 120세까지의 모세를 무디는 ‘I am everything’의 사람이라고 했다. 자신에 대한 절망을 통해 하나님께서 공급하신 힘과 능력으로 무엇이든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이다. 공급하시는 그 힘으로, 공급하시는 그 능력으로 자기 민족을 구원하는 사명을 감당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본문은 그 사명을 가지고 바로 앞에 서서 담대하게 하나님의 뜻을 전했으나 단박에 거절을 당한 이후의 모습이다.

 

실패한 첫 번째 사역

어떤 사람이 화단에 있는 나무들의 가지가 거슬리고 보기가 싫어 큰 맘 먹고 가지를 쳐주었다. 하지만 그 볼품없는 나무는 아버지가 애써 산에서 옮겨 심어놓은 자연산 두릅나무들이었다. 순을 따먹으려고 애지중지 키우고 있었는데, 그 가지를 다 쳐버린 것이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에게 강한 등짝 스매싱을 당했다는 슬픈 이야기다. 이 사람처럼 좋은 의도로 한 일인데 정작 상대방에게 민폐가 되고, 결과적으로 부정적인 상황을 만드는 경우가 있다. 본문의 모세가 그랬다. 자기 백성을 위해 하나님께서 보내셔서 이집트 왕 바로 앞에 서게 되었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말씀을 바로에게 전했다.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을 보내라. 그러면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5:1).

 

이와 같은 모세의 명령에 이집트 왕 바로가 어떻게 반응했을까? 모세의 명령을 선뜻 받아주었을까? 그랬다면 뒤 이야기는 없었을 것이다. 한 마디로 바로가 코웃음을 쳤다. 여호와가 누구기에 나에게 명령을 하고, 내가 그 명령을 받들어야 하느냐고 반문했다(:2). 그리고는 한가해서 이런 허튼 생각을 한 것이라며 감독들과 기록관들에게 명령하여 이런 생각을 품지 못하도록 노역을 더욱 강화하도록 명령했다. 전에는 짚을 제공하면서 벽돌을 만들도록 했는데, 짚을 직접 구해다가 전과 같은 양의 벽돌을 만들도록 했다(:7,8). 백성을 바로의 압제에서 해방시키겠다고 한 일이었는데, 오히려 더 심한 압제를 당하게 만들었다. 모세가 의도했던 것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이렇게 모세의 첫 번째 사역은 완전히 실패로 끝나고 만 것이다. 게다가 백성의 원망까지 듣게 되었다.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우리를 바로의 눈과 그의 신하의 눈에 미운 것이 되게 하고, 그들의 손에 칼을 주어 우리를 죽이게 하는 도다. 여호와는 너희를 살피시고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21).

 

실패에 대한 하나님의 뜻

사실 이럴 때가 가장 힘든 같다. 자신이 하고 싶어서 한 일도 아니고, 억지로 몰아세워서 그 일을 하게 해놓고, 일이 순적하게 잘 되도록 한 것도 아니고, 안 되면 혼자서 욕은 다 얻어먹고..... 참으로 난감한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지금 모세가 이런 상황에 빠졌다.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께서 모세를 이런 상황으로 몰아가신 것이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 당신이 세우신 종에게 승리의 기쁨보다 실패의 아픔을 주신 것일까? 왜 이렇게 당신의 종을 난처한 상황으로 몰아넣으신 것일까? 사실 구약시대 예언자들의 삶이 대부분 그랬다. 그 중에서 예레미야의 삶과 사역이 대표적이다. 하나님께서 그를 어머니 복중에서 선택하여 20살 약관의 나이에 예언자로 부름을 받았는데, 그는 사역하는 내내 실패만 경험했다. 이럴 거면 왜 그를 부르셨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래서 그는 사역파업을 선언하기도 했다. 이런 예레미야를 강의하다 내가 큰 은혜를 받았다. 나와 같은 작은 교회를 섬기고 있는 사람은 실패한 목회자란 말을 듣고 속이 많이 상하고 원망이 깊었다. 그러다가 예레미야를 통해 위로를 받았다. 이런 나를 위해 예레미야를 세우셨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주님께 부름을 받은 사람도, 그리고 주님의 일에도 실패가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실패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훈련시키기 위해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다루시기도 하고, 실패를 통해 다루시기도 한다. 신명기에 있는 말씀이다. 이 모두가 마침내 복을 주시기 위함이라고 말하고 있다.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하심이었느니라.’(8:16). 주님께서 주실 복을 받기에 합당한 그릇으로 만들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복을 주시려고 해도 받을 사람이 준비가 되어있지 않으면 허사가 되고 만다. 이런 의미에서 모세의 실패는 모세 자신 때문이라기보다 백성 때문인 것 같다. 5장 전체를 살펴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들일 준비되어 아직 되어있지 않은 것 같다. 그렇다고 모세에게 주신 교훈을 배제할 수는 없다. 적이 결코 만만치 않다는 것과, 그러니 방심하지 말고 하나님을 더욱 깊이 신뢰하라는 신호인 것이다.

 

하나님께 돌아가자!

실패는 끝이 아니다. 하나님께 나오라는 일종의 신호와 같다. 본문에 실패에 대한 반응이 나온다. 우선, 이스라엘 지도자들의 반응이다. ‘이스라엘 자손의 기록원들이 가서 바로에게 호소하여 이르되왕은 어찌하여 당신의 종들에게 이같이 하시나이까.’(15). 문제가 발생하자 이스라엘 기록원들은 바로에게 가서 호소하였다. ‘왕은 어찌하여 당신의 종들에게 이같이 하시나이까.문제가 발생하자 하나님이 아니라 바로를 찾아가는 것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의 영적 상태이고, 또한 영적 수준을 잘 보여준다. 그들은 하나님의 눈보다 바로의 눈과 그의 신하의 눈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우리를 바로의 눈과 그의 신하의 눈에 미운 것이 되게 하고, 그들의 손에 칼을 주어 우리를 죽이게 하는 도다....’(21). 그래서 모세의 실패는 모세 자신보다 백성 때문이라고 말한 것이다. 하여간 그들의 호소는 거절당하고 말았다(17).

 

다음은, 모세의 반응이다. 모세는 참담하고 억울한 심정을 뒤로하고 하나님께 돌아가서 호소했다. ‘모세가 여호와께 돌아와서 아뢰되 주여 어찌하여 이 백성이 하대를 당하게 하셨나이까. 어찌하여 나를 보내셨나이까.’(22). 모세는 여호와께 돌아갔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하나님께 돌아와서 호소했다. 하나님 어찌하여’ ‘하나님 어찌하여’ 라고 탄식하며 호소했다. 문제를 만났을 때 우리는 누구를 찾아가야 할까? 누구에게 호소하고, 누구의 손을 잡아야 할까? 세상 권력자인 바로일까? 아니면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일까? 이스라엘 기록관들은 하나님이 아닌 현실의 권력자를 찾아갔고, 그에게 호소했고, 그의 손을 잡았다. 그렇지만 그는 오히려 그들을 더욱 가혹하게 억압하고 탄압하는 손으로 다가왔다. ‘이제 가서 일하라. 짚은 너희에게 주지 않을지라도 벽돌은 수량대로 바칠지니라.’(18). 반면에 모세는 문제의 해결이 하나님께 있음을 알고 하나님을 찾아갔고, 하나님께 호소했고, 하나님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하나님께 응답을 받았다. ‘내가 바로에게 하는 일을 네가 보리라. 강한 손으로 말미암아 바로가 그들을 보내리라. 강한 손으로 말미암아 바로가 그들을 그의 땅에서 쫓아내리라.’(16:1).

 

답은 분명하다. 문제를 만났을 때 우리 또한 모세처럼 하나님께 돌아가고, 하나님께 호소하고, 하나님의 손을 잡아야 한다하나님만이 우리의 아픈 상처를 싸매주시고 치료해주실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손을 잡으면 우리를 가로막고 있는 근심의 산이 평지로 바뀌게 될 것이다. 세상의 손은 폭력의 손이지만 하나님의 손은 자비의 손이고, 사랑의 손이다. 세상의 손은 약하고 짧지만 하나님의 손은 강하고 영원하다. 강하고 영원하신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 인생이 되자. 그러기 위해선 하나님을 부지런히 찾고, 크고 작은 일을 가리지 않고 하나님께 호소하자. 이것이 모세의 주특기였다. 노년의 모세가 광야 40년 동안 자기백성을 성공적으로 잘 이끌 수 있었던 비결이 이 주특기를 잘 활용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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