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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세대가 아니라 다음 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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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agathos 댓글 0건 조회 749회 작성일 24-08-04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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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세대가 아니라 다음 세대

2:6~10

2024. 8/4(성령강림 열두 번째 주일)

다음 세대가 위태롭다!

우리 사회에서 위기라는 말이 이제는 일상어가 되었다. 사회, 정치, 교육, 경제는 물론이고 교회도 마찬가지다. 특히 교회를 향한 경고음은 곳곳에서 나오고 있다. 그 중에서도 성도의 수 감소현상이 두드러진다. 통계마다 다르지만 2020년부터 매년 전국에서 4,000여 교회가 문을 닫고 있는 상황이다. 교회의 미래를 이끌어갈 다음세대의 상황은 더 심각하다. 우리 교단의 경우 교회학교 학생의 수가 지난 10년간 41.9%가 감소했다. 거의 절반이 줄어든 셈이다. 교회학교 규모도 점점 줄어들고 있다. 서울 도심 교회 중 교회학교를 운영하는 곳은 57%에 불과하다고 한다. 절반에 가까운 교회가 다음 세대 양육을 못하고 있는 것이다이것은 단지 교회학교의 위기, 다음 세대의 위기가 아니라 한국교회의 위기이고, 존립의 문제다. 한국교회가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영광스러운 교회로서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다음 세대가 신앙의 대를 이어가야 한다.

 

물론 이는 어제 오늘의 문제는 아니다. 위기는 항상 있어왔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지금 우리가 직면한 현실은 항상 그래왔다고 말하기엔 너무 심각하다. 그리고 이런 현상이 가져올 미래는 너무도 분명하다. 이와 같은 경고를 사사시대를 통해 실감할 수가 있다. 본문을 보면 사사시대 이스라엘도 다음세대에 대한 심각한 위기를 겪게 된 것 같다. 출애굽 이후 광야세대, 곧 가나안 정복전쟁을 치룬 세대와 전쟁 이후에 태어난 새로운 세대가 전혀 다른 세대였다. 그래서 본문은 정복전쟁 이후에 태어난 세대를 부모의 세대를 이은 다음세대가 아니라 부모의 세대와 전혀 다른’ 세대라고 표현하고 있다. 본문은 이와 같은 상황에 직면한 이스라엘에게 주신 하나님의 경고와 권면의 말씀이다. 이 말씀을 통해 오늘날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길 기도한다.

 

다른 세대로 전락한 이유 

7절을 같이 읽겠다. ‘백성이 여호수아의 사는 날 동안과 여호수아 뒤에 생존한 장로들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큰일을 본 자의 사는 날 동안에 여호와를 섬겼더라.여호수아가 살아있을 동안 즉, 하나님의 종의 강력한 리더십이 자리를 잡고 있었을 때에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섬겼다. 또 그 여호수아와 함께 정복전쟁을 치룬 정복(개척)세대가 살아있을 동안에는 그들이 하나님을 섬겼다. 그러나 정복세대가 가고, 그들의 자녀세대가 이스라엘 역사의 주류를 이루면서부터 상황이 달라졌다. ‘그 세대 사람도 다 그 열조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10a). 후에 일어난 세대는 다음세대(next generation). 그런데 본문은 그들을 다음세대라고 하지 않고, 다른세대(another generation)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다른은 히브리어로 아헤르’(אחר)인데, 이는 단순히 또 다른(another)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아헤르는 질적으로 다른(different)이란 뜻이다. , 새로운 세대는 광야세대, 곧 가나안 정복세대와 완전히 달랐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렇게도 달랐을까? 물론 세월이 바뀌고, 생활환경과 여건이 바뀌었으니 다른 점이 많은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결코 바뀌어서는 안 될 것이 바뀌어버린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다.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10b). 그래서 그들은 조상의 아름다운 믿음의 유산을 계승 발전시키지 않고 다른 길로 가서, 다른 신을 섬기고, 다른 소망을 좇아 사는, 다른 세대(different generation)가 된 것이다. 이것은 변화가 아니라 변질이다. 왜 이렇게 그들이 변질된 것일까?

 

 

첫째, 구원의 은혜를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애굽 땅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내신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12a). 그들은 과거 이집트에서 종살이 하던 비천한 노예백성이었다. 날마다 바로의 압제 아래서 흙 이기고, 벽돌 굽고, 벽돌 나르고, 일하는 기계처럼 살다가 죽을 자들이었다. 거기에는 자유도, 인권도, 평안도 없었다. 그런 그들을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겨 그곳에서 탈출시켜 마침내 약속의 땅, 소망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에 이르게 하셨다. 그리하여 그들이 건축하지도 않은 아름다운 성읍에서 거주하게 하시고, 채우지 아니한 아름다운 물건이 가득한 집에 살게 하시고, 파지도 않은 우물을 얻게 하시고, 심지도 않는 과일이며 곡식을 배불리 먹게 하셨다. 모두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다. 그래서 그들은 이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원의 은혜를 평생 기억하며 살아야 했다. 감사하며 살아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렸다. 그들이 과거에 얼마나 비참한 노예백성이었는가를 잊어버렸다. 지금의 축복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렸다. 세월이 수십 년, 수백 년이 지난 것도 아니다. 불과 한 세대도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그 은혜를 잊어버렸다. 이처럼 구원의 은혜를 잊어버릴 때 신앙이 변질되고 타락할 수밖에 없다. 성경에 기억이란 단어가 많이 나온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기억해야 잊지 않고, 잊지 않아야 변질되지 않기 때문이다. 더욱 충만한, 감사가 넘치는 생생하고 신선한 신앙생활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둘째, 가나안 문화가 사로잡혔기 때문이다. ‘곧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겼으므로’(13). 고대는 신정(神政)사회였고, 그들의 문화는 대부분 종교와 관련이 깊다. 당시 가나안은 여러 민족이 살았고, 민족마다 섬기는 신이 있었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신이 바알과 아스다롯이다. 바알과 아스다롯은 풍요의 신으로 가나안의 농경 신이다. 그래서 농부들에게 매우 실용적인 신이었고, 당장 눈앞에 보이는 물질적 풍요와 쾌락을 약속해주기 때문에 매력적이었다. 그리고 그 신들을 섬기는 축제는 먹고, 마시고, 춤추고, 뛰노는 것으로 큰 재미와 쾌락을 주었다. 반면에 여호와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도 않고, 오직 하나님 한 분만 섬길 것을 요구하고, 게다가 엄격한 윤리적인 요구는 부담스럽고 재미가 없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구원의 은혜를 기억하지 못한 자녀 세대가 현실적이고 감각적인 즐거움을 주는 가나안의 문화에 사로잡혀 가나안 우상을 섬기게 된 것이다. 이것이 그들이 다음세대가 아닌 다른 세대로 변질된 또 하나의 이유다.


 

셋째, 여호와를 알도록 힘써 가르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10). 왜 다음세대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다른 세대가 되었을까? 부모세대가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까닭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행하신 구원의 역사를 알지 못한 것이다. 물론 그들에게도 자녀를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정복시대였기에 전장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다보니 자녀를 가르칠 수 없었을 수도 있고, 또한 개척시대였기에 한 뼘의 땅이라도 더 확보하기 위해 살다보니 자녀교육을 소홀히 했을 수도 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많은 사람이 이렇게 말한다. ‘시대가 그러니 어쩔 수 없지 않느냐. 요즘 시대가 물질적이고, 세속적이고, 자기중심적이고, 감각적이기 때문에 복음적인 제자를 키우기 어렵다. 학교공부도 버거운데 거기다 어떻게 성경까지 시킬 수 있느냐. 그래서 믿음 있는 자녀를 키우기 어렵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때가 있고, 우선순위가 있다. 이것을 놓치면 도리어 화가 될 수 있다. 자녀의 신앙교육이 그렇다. 아무리 바빠도 미루거나 소홀히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모세가 가나안 정복을 앞둔 정복세대에게 그의 두 번째 설교 서두에서 자녀의 신앙교육을 역설했다. 그것이 소위 신명기 6장에 나온 쉐마의 말씀이다.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지니라.’(6:6-9). 시도 때도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라는 것이다. 가나안 정복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이 허락하신 땅을 자자손손 누리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사단의 똘마니가 되게 할 것인가?

모든 문제의 뿌리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오스카 와일드(Oscar F. Wilde)는 이런 말을 했다. ‘하나님을 모르는 교육은 현명한 악마를 키우는 것과 같다.’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을 배우지 않으면 아무리 최고의 교육을 받고, 최고의 대학을 나와도 사단의 똘마니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잠언은 여호와를 아는 것’,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고 반복적으로 외치고 있다. 그래야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가 다음세대, 곧 자녀와 후배에게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도록 줄기차게 가르쳐야 할 이유다.


 

다음세대는 소망의 세대이고, 동시에 막중한 책임과 사명을 걸머진 세대다.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계승해나갈 소망스런 다음세대를 키울 것인가? 세속주의에 변질된 다른 세대를 키울 것인가? 다음세대를 영성 깊은 하나님의 자녀로 키울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을 대적한 사단의 똘마니로 키울 것인가?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한나처럼 민족을 위기로부터 구원한 사무엘과 같은 구원자로 키울 것인가? 엘리처럼 집안을 말아먹고 민족의 위기를 자초한 홉니와 비느하스 같은 불량배로 키울 것인가?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신앙은 강물처럼 끊임없이 흐르고, 계승되어야 의미가 있지, 단절되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버나드 쇼(G. B. Shaw)의 말이다. ‘나의 삶은 잠깐 타다가 말 촛불이 아니라 다음세대까지 계속해서 타오를 횃불이 되고 싶다.’ 우리의 인생과 신앙이 당대에만 잠깐 타다가 꺼져버리는 촛불이 되지 말자. 다음세대에도, 그 다음세대에도 계속해서 활활 타오르는 횃불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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