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을 위한 달음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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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agathos 댓글 0건 조회 2,943회 작성일 24-03-31 13:09본문
생명을 위한 달음질
마28:1~10
2024. 3/31(부활주일). 11:00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
토끼 한 마리가 도토리나무 아래서 낮잠을 자고 있었다. 한참 단잠을 자고 있는데 도토리가 토끼 머리에 떨어졌다. 잠결에 깜짝 놀란 토끼는 무슨 변이라도 난줄 알고 뛰기 시작했다. 갑자기 뛰어가는 토끼를 보고 주변에 있던 노루, 사슴, 여우, 늑대 등 다른 산짐승도 덩달아 뛰었다. 이를 지켜보던 산림의 왕 사자가 그들 앞을 가로막고 서서 ‘너희들 어디를 향해 달리고, 왜 달리고 있는가?’ 라고 물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에 대한 대답을 명쾌하게 하지 못했다.
남이 뛰니까 덩달아 뛰는 산짐승의 모습이 어쩌면 우리 모습은 아닌지 모르겠다. 우리도 아침부터 저녁까지 정신없이 뛰면서 바쁘게 살고 있다. 식사하면서 신문을 보고, 일하러가면서 뉴스를 듣고, 운전을 하면서 화장을 하고, 걸으면서 어디론가 전화를 한다. 그저 사회라고 하는 거대한 구조 속에 매몰되어 왜 사는지, 무엇을 위해 사는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 없이 덩달아 바쁘게 살고 있는 것이다. 삶은 바빠야 좋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일견 맞는 말이다. 하지만 바쁘게 살다보면 소중한 것을 잃게 된다(忙=心+亡).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인의 삶이 삭막한 사막이 되어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흔히 인생을 달리기에 비유한다. 그런데 인생이란 달리기는 속도보다 방향이 중요하다. 얼마나 빨리 달리느냐보다 무엇을 위해 달리고, 어디를 향해 달리고 있느냐가 더 중요하다. 방향 없이 달리고, 잘못된 방향으로 달리는 것만큼 어리석고 위험한 일이 없기 때문이다. 인생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얼마나’가 아니다. 얼마나 많이 가지고, 얼마나 많이 배우고, 얼마나 많이 누리고, 얼마나 빨리 이루고, 얼마나 빨리 달리고, 얼마나 오래 사느냐에 있지 않다. ‘어떻게’ 살았느냐, ‘무엇을’ 위해 살았느냐에 있다.
무덤을 향해 달리는 사람들
본문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아침에 일어난 광경이다. 여기에도 달리는 사람들이 나온다.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한 몇 명의 여성이 그 주인공이다. 그들은 주님이 부활하신 날 아침에 주님의 무덤으로 달려갔다(1). 그들은 다시 살아날 것(마26:32)이라는 주님의 말씀을 믿고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달려간 것이 아니다. 죽으신 주님의 주검에 향을 바르기 위해 비통한 마음으로 가고 있었다(막16:1). 이것은 주님을 모르던 지난날 우리 모습이고, 주님을 모른 사람들의 모습이다. 열심히 달리고 있으나 무덤을 향해, 죽음을 향해, 절망을 향해 달리고 있는 것이 인생이다. 그것도 까닭모를 슬픔과 고통을 마음에 품고 말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렇게 슬픔과 고통을 품고 이른 아침부터 달려왔는데, 막상 무덤에 도착해보니 그곳이 텅 비어있었다(눅24:3). 그래서 그들은 망연자실(茫然自失)하고 말았다(요20:11). 어쩌면 이렇게도 우리 인생을 잘 보여주고 있는지 모르겠다. 온갖 힘을 다해 달렸으나 마지막이 아무것도 아닌 것(Nothing), 이것이 인생이다. 세상 모든 부귀영화를 누렸던 솔로몬의 고백이 이것이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1:2).
어떤 사람이 속고 사는 것이 인생이라 했다. 맞는 말이다. 이렇게 성경이 인생은 ‘모든 것이 헛되다.’(Everything is Nothing)고 말씀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자신의 삶만은 그렇지 않을 것이라 생각고 힘을 다해 달리고 있다. 이것은 자신의 바람일 뿐 현실은 아니다. 자기 자신에게 스스로 속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속지 않고는 살 수가 없다. 그래서 인생이 비극인 것이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 베드로도 같은 고백을 했다.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눅5:5). 또한 주님을 따르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자 옛 생활로 돌아갔던 베드로를 포함한 여러 제자들도 이런 고백을 했다.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하매 저희도 우리도 함께 가겠다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이 밤에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더니.......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요21:3,5). 왜 열심히 수고해도 얻은 것이 없는 텅 빈 인생이 될까? 왜 누구보다도 열심히, 그리고 성실하게 살았던 사람이 종국에 가서 헛살았다, 잘못 살았다고 말하며 방황하는 것일까? 달리되 방향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무덤을 향해, 주검을 향해 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겨를 심어 알곡을 거둘 수가 없는 것이다.
부활, 삶의 전환점(turning point)
그런데 텅 빈 그곳에서 이 여인들은 천사를 통하여 예수님의 부활소식을 듣고(5,6), 이어서 직접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게 된다(9). 그래서 두려움이 경배로, 절망이 소망으로, 슬픔과 고통이 기쁨과 환희로 바뀌게 되었다. 텅 빈 인생이 충만한 인생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다시 달리게 된다(8). 물론 똑같은 달리기지만 방향, 태도, 내용과 의미가 완전히 바뀐 달리기였다. 전에는 무덤을 향한, 주검을 향한 달리기였는데, 이제는 소망을 향한, 생명을 향한 달리기가 되었고, 전에는 슬픔과 고통을 품고 달렸는데, 이제는 큰 기쁨과 사명(10)을 가지고 달리게 되었다. 이것은 순식간에 일어난 사건이다. 그리고 이 사건의 중심에 ‘주님의 부활’이 있다. 그래서 주님의 부활을 달리는 인생의 ‘전환점’(turning point)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누구든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면 삶의 방향이 바뀌게 된다. 달리는 방향과 목표, 내용과 의미가 바뀌게 된다.
사실 부활이라고 하는 사건 자체가 철저한 변화의 의미를 담고 있다. 부활은 땅의 존재가 신적인 존재로 변한 사건이다. 존재의 변화와 존재의 이동을 가져온 사건이 부활이다. 또한 부활은 ‘죽음이 끝이다.’는 보편적인 상식을 뒤집었다. 오히려 죽음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임을 보여주었다. 이런 부활의 능력은 믿는 사람들에게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그러므로 지금 있는 이 자리, 이 시간이 내 삶의 전환점이 되기 위해선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야 한다. 그래야 부활의 소망, 기쁨, 생명을 향한 달음질이 시작된다.
생명을 위한 달음질
부활을 통한 변화된 삶을 극적으로 보여준 사람이 사도 바울이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기 전 바울의 삶은 죽음을 향한 질주, 나아가 다른 사람을 죽이기 위한 질주였다.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까지 죽음으로 몰아넣는 폭주 기관차와 같았다. 그가 가는 곳마다 체포와 감금, 박해가 일어났고, 주변에 사망의 냄새를 풍기며 두려움과 공포를 증폭시켰다. 그런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남으로 달리는 방향이 완전히 바뀌게 되었다. 전에는 생명의 복음에 대한 훼방자, 파괴자, 박해자였으나 이제는 복음의 옹호자로, 변호자로, 전파자로 변했다. 그래서 이 복음을 위해, 복음전파의 사명을 위해 달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이렇게 고백한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4). 생명을 향한 달음질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걸겠다는 고백이자 다짐이고 각오다. 이것은 부활을 경험한 사람의 공통점이다. 본문의 여인들 역시 부활의 현장을 목격하고(6), 증인을 만난 후(7), 달리기 시작했다(8/함께 읽음).
부활은 혼자만 간직할 수 없는 큰 기쁨이고, 다른 사람과 나누고 싶고 함께 하고 싶은 소망이고, 생명이다. 그래서 이를 경험한 사람은 누군가에게 ‘알게 하려고’(8) 달리게 된다. 여기에다 부활의 소식을 ‘알게 하는 것’이 부활하신 주님의 당부이자, 명령이기도 하다(10). 그러니 주님의 부활을 경험한 사람은 이 일에 더욱 목숨을 걸게 된 것이다. 바울의 고백이 이를 입증해 준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고전9:16). 복음을 위한 달음질의 당위성(當爲性)을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부터 시작된 수많은 부활의 증인이 부활의 복음을 위해 목숨을 건 달음질을 한 것이고, 그것이 우리에게까지 이어졌다. 이제는 우리가 그 바턴을 이어받아 달려야 하고, 다음 세대에게 이어주어야 한다. 이것이 우리 성도와 교회의 사명이다. 정호승 시인의 말처럼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 사랑이 끝나는 곳에서도 사랑으로 남아있는 사람이 우리 주님이시다. 더 나아가 주님은 생명이 끝나는 곳에서도 생명이 되어 한없이 생명의 길을 걷는 사람이 되셨다. 이것이 ‘부활’이다. 이 부활의 계절에 절망이 소망으로, 저주가 축복으로, 죽음이 생명으로, 슬픔이 기쁨으로 변하는 복을 경험하여 누리기 바라며, 그리고 부활의 복음을 위한 달음질을 통하여 고치고 회복하고 세우고 살리는 일에 헌신하는 나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란다.
관련링크
- https://youtu.be/Ky0pmGgz5zc 981회 연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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