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지 않는 바람은 바람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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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agathos 댓글 0건 조회 197회 작성일 24-10-27 12:36본문
불지 않는 바람은 바람이 아니다.
히4:12
2024. 10/27(성령강림 스물네 번째 주일, 종교개혁 기념주일)
거위의 꿈
오늘은 종교개혁 507주년 기념주일이다. 1517년 10월 31일 마르틴 루터가 로마 카톨릭 교회를 향해 95개 조항의 반박문을 발표했고, 이것이 종교개혁의 신호탄이 되었다. 교회는 이를 기념하여 매년 10월 마지막 주일을 종교개혁주일로 지키고 있다. 교회사를 보면, 이런 시도가 몇 번이 있었으나 모두 좌절되었다.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키기 100여 년 전에도 체코에서 있었으나 좌절되고 말았다. 로마 카톨릭 교회의 거대한 세력 앞에 무참히 꺾이고 말았다. 그 주인공이 ‘얀 후스’(Jan Hus)다. 금번 순천남노회 동(東)시찰에서 주최한 ‘교회 및 문화탐방’에서 체코를 방문했고, 얀 후스를 만나고 왔다.
후스는 체코 프라하 대학 총장이자 카톨릭 사제였고, 학자였다. 그는 모국어인 체코어로 설교를 했고, 성경도 번역하였다. 당시 로마 카톨릭 교회는 라틴어를 신성한 언어라고 말하며 교회 미사(예배)에서 라틴어만 사용하도록 했고, 라틴어로 된 성경을 모국어로 번역할 수 없도록 규정하였다. 그러니 라틴어를 모르는 대부분의 사람은 성경을 읽을 수도 없었고, 예배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보니 성경은 사제와 교회의 전유물이 되었고, 마음대로 교권을 휘둘렀다. 게다가 당시 프랑스 아비뇽과 로마에 각각 교황이 있었고, 교황청에서 면죄부 판매로 어지러운 때였다. 이런 교회를 향해 후스는 죄를 사할 수 있는 분은 하나님뿐이며 면죄부를 파는 사람은 가룟 유다와 같다고 했다. 예수님도 12제자 중에 배신자가 있었는데, 교황청에 배신자가 없고 완벽하다고 볼 수 없다고 했다. 이런 말들은 교황청의 심기를 건드리기에 충분했고, 교황청은 그를 제거하기로 작정했다. 그래서 결국 1415년 7월 6일에 화형을 당하게 된다.
꿈은 이뤄진다.
악마가 그려진 종이 모자를 쓰고 형장(刑場)으로 갔는데, 가는 동안 그는 시편(시20편 21편)을 읊조렸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교황을 비롯한 교회와 세속 권력이 지금 나에게 이단 모자를 덮어씌웠지만 주님께서는 나에게 황금의 관을 머리에 씌우셨다. 나를 지금 벌주는 자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마치 골고다 언덕을 오를 때의 예수님을 연상시킨다. 그리고 이렇게 기도했다. ‘사랑하는 예수님, 주님의 말씀과 복음을 위해 이 잔인하고 끔찍한 죽음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견디게 해주십시오. 주님의 복음과 말씀을 위해 이 끔찍하고 수치스럽고 잔인한 죽음을 매우 인내하고 겸허하게 견디고 싶습니다. 죽음도 생명도 그 외에 어떤 것도 저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분리시킬 수 없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어쨌든 후스의 종교개혁은 그의 죽음으로 끝이 났다. 물론 후스가 순교당한 후에 그의 정신을 이어받은 사람들이 개혁을 진행하였으나 로마 카톨릭 교회의 폭압에 좌절되고 말았다.
후스가 죽기 전에 남겼다는 유명한 말이 있다. 후스라는 말이 체코어로 ‘거위’를 뜻한다고 한다. ‘너희는 지금 거위를 죽인다. 그러나 백년 뒤에는 죽일 수도, 삶을 수도 없는 백조가 나타날 것이다.’ 그의 이 예고는 적중이 되었다. 그가 순교를 당하고 102년 후(1517년 10월 31일)에 독일에서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켰다. 결과적으로 루터의 등장을 예언한 셈이 되었다. 그리고 프랑스에서는 존 칼빈, 스위스에서는 울리히 쯔빙글리가 개혁에 동참하면서 개혁의 바람은 온 유럽으로 들불처럼 번져갔다. 100년 전에 떨어진 개혁의 씨앗이 100년 후에 싹이 나고 꽃을 피워 열매를 맺게 된 것이다. 그래서 우리 개혁교회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오직 말씀
그렇다면 개혁자들이 목숨을 걸고 강조한 것, 곧 회복하려고 했던 것은 무엇이었나? 그것은 오직 ‘말씀’이다. 말씀의 권위를 회복하는 것이다. 교황도 교회도 말씀의 권위를 넘어설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개인도 교회도 말씀으로 돌아가서 신앙을 새롭게, 교회를 새롭게 하자는 것이다. 루터가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면서, 번역의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성경이 모든 인간의 손에 들어가게 하자. 그래서 그들이 직접 성경을 읽고, 말씀을 해석하며, 성경의 빛을 따라가서 영적인 자유를 찾도록 하자. 백성이 성경에 입각한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사람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두려워하게 만들자!’ 말씀이 능력이고 권세이고 방법이기 때문이다. 본문도 이를 확인시켜 주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여기서 ‘살아있다.’는 것은 말씀이 단순한 글자나 소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이 담겨있다는 의미다. 그래서 우리가 이 말씀을 듣고 읽고 배우고 묵상하면 우리에게 생명을 주고, 그 생명을 더욱 풍성하게 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활력이 있다.’는 것은 힘이 있고 능력이 있어 우리의 삶에 영향을 준다는 의미다. 즉 말씀을 듣고 읽고 배우고 묵상할 때 깨우침, 위로, 권면, 변화, 교훈과 훈련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예리하다.’는 것은 우리 마음의 깊은 곳까지 들추어낸다는 의미다. 이것이 개혁자들이 말씀만을 강조한 이유다.
그러므로 살아있고, 활력이 있는 말씀으로 새롭게 되기 위해선 말씀을 가까이 하고, 말씀을 잘 알아야 한다. 말씀을 사랑해야 한다. 때문에 개혁자들이 모국어로 예배를 인도하고, 모국어로 설교하고, 또한 서둘러 모국어로 성경을 번역하였다. 이러한 사상이 후스를 기념하는 동상 아래 그가 남긴 문구에 잘 드러나고 있다. 거기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여, 진리를 찾으라. 진리를 들으라. 진리를 배우라. 진리를 사랑하라. 진리를 말하라. 진리를 지키라. 죽기까지 진리를 증언하라!’ 여기서 그가 말한 진리가 무엇일까? 하나님의 말씀이고, 그 말씀이 몸으로 드러난 ‘예수 그리스도’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복음’이다. 후스의 동상, 그의 손에는 성경이 들려있다. 그가 불에 타 죽으면서까지 지키려했던 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다. 말씀을 사랑하고, 말씀을 지키고, 죽기까지 말씀을 증거했던 그의 삶을 보여준 것이다. 이것이 모든 성도가 추구해야 할 삶의 태도다. 우리 또한 말씀을 사랑하고, 말씀을 지키고, 죽기까지 말씀을 증거하자! 그리하여 우리 마음에서 개혁의 바람을 끊임없이 일으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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