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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은 사랑의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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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agathos 댓글 0건 조회 17회 작성일 25-12-21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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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은 사랑의 시간이다.

25:31~46

2025. 12/21, 11:00(대림절 넷째 주일)

기다림, 사랑의 또 다른 이름

오늘날 모든 것이 속도를 지향한다매체이론가 폴 비릴리오(Paul Virilio)는 현대를 가리켜 속도를 지향하는 사회, 속도사회라고 했다. 가속사회, 자꾸만 빨라지는 세상이다. 인터넷도, 자동차도, 기술도, 생활도, 노래도, 심지어 배달도 빠름을 지향한다. 어떤 분이 ‘K을 가리켜 제자리를 지키기 위해 죽도록 뛰어야 하는 우리 사회의 상징이라고 했다. 이렇게 빠름을 지향하다 보니 기다림의 가치를 찾기 힘든 시대가 되었다기다림은 이제 낭비와 동의어가 되어버렸다. , 기다림을 비효율적인 낭비하는 시간으로 보고 그 시간을 무척 힘들어한다. 그래서 잠시도 기다리지 못해 안달하고, 심지어는 화를 쏟아내기도 하고, 실망하기도 한다. 그러나 기다림은 결코 낭비가 아니다. 그것은 가장 깊고, 가장 조용한 방법으로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이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시간을 내어주고, 그 사람의 성공과 행복을 묵묵히 응원하며 기다려 준다. 이 모든 것이 기다림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기다림을 사랑의 또 다른 이름이라고 한다.

 

그렇다. 기다림은 우리에게 사랑의 진정한 의미를 가르쳐준다. 기다림 속에서 우리는 관계의 소중함을 깨닫고, 서로를 향한 신뢰를 쌓아가고, 삶의 깊이를 더하게 된다. 그 기다림 속에서 사랑의 향기는 더욱 진해진다. 사실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려 주는 것은 소중한 시간을 선물하는 것이다. 기다림은 궁극적으로 사랑이기 때문이다. 사랑하면 기다리게 되고, 사랑하는 것만큼 기다리게 된다(야곱과 라헬). 그래서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모든 것을 견딘다고 했다. 사랑하면 사랑하는 대상에 대해 인내하고, 사랑하는 대상을 위해 어려운 상황도 견딘다. 기다림은 사랑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으로 충만해진다. 사랑하는 대상으로 충만해질 때 우리 가슴은 벅찬 사랑으로 가득 차게 된다. 우리에게 주님의 승천과 재림의 사이, 곧 기다림의 시간(Interim)을 주신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다시 오실 주님을 바라보며 우리의 삶을 주님으로 가득 채우기 위함이다. 그래서 흔히 기다림을 나를 만들어가시는 하나님의 시간이라고도 한다. 그러므로 기다림은 낭비가 아니고자신이 누구인지를 생각하고,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으로 채워가는 시간이다.

 

 

행해야 함에도 행하지 않는 죄(sin of omission)

마태복음 25장에는 종말과 관련된 세 개의 비유가 연속해서 나온다. 첫째가 열 처녀 비유이고, 다음이 달란트 비유, 그리고 마지막으로 양과 염소의 비유다. 본문은 양과 염소의 비유로, 다시 오신 주님께서 만국 백성을 모아놓고 심판을 하시는 장면이다. 이 비유 역시 기다림의 시간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내용이다. 주님은 이 비유를 통해 우리에게 세 가지 소중한 가르침을 주시고 있다. 첫째, 모든 사람이 예외 없이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심판을 받는다는 것이다. 심판에는 예외도 없고, 어떤 인종적, 계층적 차별도 존재하지 않는다. 구원에 대한 메시지(복음)가 차별 없이 주어지듯 심판도 차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둘째,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일지라도 주님이 기뻐하시는 사역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은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행해야 함에도 행하지 않음의 죄로 인하여 심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주님의 사역에의 참여는 선택이 아니고 당위성을 지닌 성도의 책임과 의무이다. 셋째, 자신이 속한 세상에서 책임을 행하면서 제자의 삶을 사는 사람은 심판에서 칭찬과 상급을 받는다는 것이다. 구원받은 삶 속에서 신실함과 근면함을 증명한 것에 대한 상급이다.

 

 

여기서 주님의 심판은 의인과 악인, 곧 염소로부터 양을 구별하는 것인데, 그 심판의 기준이 사랑의 실천이다. 우선 이 비유는 에 대한 우리의 생각에 도전을 준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죄를 행하지 말아야 할 것을 행함’(sin of commission)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성경에는 다른 종류의 죄도 있다. 그것은 마땅히 행해야 함에도 행하지 않는 행위’(sin of omission) 또한 죄라고 가르치고 있다. 이 비유는 바로 이점을 강조하고 있다. , 믿음의 문제가 아니라 행해야 함에도 행하지 않음으로 인한 죄로 심판을 받을 수 있음을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이점을 야고보도 강조하고 있다.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4:17). 좀 더 설명을 하자면, 우리 기독교 구원론의 핵심이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以信得求)라고 하는데, 이 비유는 마치 믿음 외에 다른 방법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이 비유는 믿음 외에 다른 방법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라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성도가 감당해야 하는 사회적 책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 ‘사랑의 실천’(선한 일)이 구원의 근거, 또는 원인이 되기보다 당연한 결과라는 것이다. 열매를 보면 그 나무를 알 수 있다(7:16)는 주님의 말씀처럼 기독교 구원론을 소위 귀납법적으로 접근한 것이다. 이것은 마태복음이 일관되게 주장하고 있는 내용이다.


심판의 기준

주님은 유대 지역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목가적 풍경을 최후의 심판에 대한 비유로 사용하셨다. 심판이란 목자가 염소로부터 양을 갈라내듯이 갈라놓는 것이다. 그런데 그 심판의 기준이 양과 염소의 습성이 아니다. 그 기준은 심판을 진행 중인 인자, 주님을 향한 태도. 주님은 주님 자신을 돌보고 도와주고 사랑을 베푼 사람(곧 사랑을 실천한 사람)을 양에 비유하셨고, 주님이 고난에 처해서 괴로움을 당하는 것을 보고도 도와주거나 돌봐주지 않은 사람(곧 사랑을 실천하지 않은 사람)을 염소에 비유하셨다. 주님께서는 심판의 자리에 앉아 양들을 복 받을 자들’(34)이라고 부르시고, 염소들을 저주를 받은 자들’(41)이라고 부르셨다. 이것은 주님께서 지상에 계실 때 주님을 영접한 사람에게는 축복을 선언하시고, 주님을 거부한 사람에게는 저주를 선언하신 것과 같은 기준이다.

 

 

하나님 나라가 시작된 이후로 심판과 결부된 조건은 항상 주님과 관계된 것이다. 한편으로는 영생과 축복이, 다른 한 편으로는 영벌과 저주가 선언되는 직접적인 이유는 주님을 모셨느냐 그렇지 아니하냐 하는 것이다(3:16, 5:24). 그런데 이 비유에서 양과 염소의 모습으로 등장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주님을 만난 적이 없다. 주님을 육체로 만나지 못한 사람들이다. 그러니 그들은 당연히 주님을 대접한 적도 없고, 푸대접한 적도 없다. 주님을 만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양들은 주님의 판결을 생소하게 느끼고(37,38), 염소들은 주님의 선고를 억울해 했다(44). 주님이 자신에 대한 태도 여부로 영생과 영벌을 선언하는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심판의 기준이 주님과 관계된 것이지만 중요한 것은 주님을 알았다거나 몰랐다는 것에 있지 않고 주님께 무엇을 했느냐에 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양과 염소가 실제로 주님에게 한 행동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한 행동을 근거로 선언하고 있다(40,45). 그러니까 다른 사람에게 행한 선한 행위를 주님께 한 것으로 보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양과 염소가 어떤 사람에게 한 행동을 주님에게 한 것으로 평가한 것일까? ‘지극히 작은 자 하나’(40,45)이다. 이런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고, 마시게 하고, 영접하고, 입혀주고, 보살펴주고, 찾아가 주는 지극히 일상적인 사랑의 실천이 곧 주님께 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를 실천하는 것이 기다림의 기간이고, 또한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의 삶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주님을 업은 사람

시리아에 오펠로라는 힘이 센 사람이 있었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힘이 센 사람의 신하가 되는 것이 소원이었다. 그래서 그는 막강한 힘을 가진 왕의 신하가 되었데 그 왕이 악마에 대하여 무서워 떠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는 그 왕을 떠나 악마의 신하가 되었다. 그리고 악마를 따라다니며 나쁜 짓을 많이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교회당 옆을 지나는데 십자가를 보고 악마는 도망을 쳤다. 이제 그는 예수님의 신하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한 수도사를 찾아가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지 물었다. 수도사는 가난한 사람을 섬기는 일이  예수님을 만나는 길이라며 강가에 머물면서 가난한 여행자들을 건네주라고 했다 말에 따라 그는 강가에서 돈이 없어 배를 타고 가지 못하는 사람들을 업고 강을 건네주는 일을 하였다그러던 어느 날, 억수같이 비가 쏟아지는 밤에 한 소년이 문을 두드리면서 강을 꼭 건너야 위독한 어머니를 만날 수 있다면서 사정을 하였다. 비 때문에 그는 서너 번 거절하다가 소년의 딱한 사정을 듣고 건네 주기로 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했다. 소년을 업고 강을 건너는데 물속으로 들어갈수록 소년이 점점 무거워지기 시작하더니 급기야는 걸을 수가 없을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그는 소년에게 너무 무거워서 마치 세상을 짊어진  같다.’라고 말하자 소년이 이렇게 말했다. ‘두려워 마라너는 세상뿐만 아니라 세상의 창조자를 짊어지고 있느니라내가  네가 기다린 예수다!’ 그리고는 소년이 홀연히 사라졌다. 졸지에 그는 예수님을 등에 업은 사람이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훗날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주님을 업은 사람이란 뜻의 크리스토퍼(헬라어로는 크리스토포로스Χριστοφοροs=그리스도Χριστοs+데려가다운반하다라는 뜻의 페로φερω)라고 부르게 되었다.

 

 

우리 기독교는 신비의 종교다. 그런데 기독교 신비 가운데 가장 큰 신비는 우리가 섬기는 지극히 작은 사람이 주님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단순히 사람을 섬기는 것이 아니다. 그가 섬기는 지극히 작은 사람이 주님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섬김이 주님을 섬기는 것이라면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의무가 아니라 오히려 특권이고 영광이다. 이 특권과 영광을 실천하는 기간이 기다림의 시간이다. 사랑의 실천을 통해 주님을 뜨겁게 만나고, 주님으로 채워가는 시간이다. 섬김을 통해 삶의 현장에 주님을 뜨겁게 만나고, 주님의 가득 채워가는 나날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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