떡만으로 살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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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agathos 댓글 0건 조회 23회 작성일 25-11-09 12:33본문
떡만으로 살 수 없다!
마4:1~4(신4면)
2025. 11/9, 11:00(성령강림 23번째 주일)
본능을 넘어서려면
수천㎞나 떨어진 자기 둥지를 찾아 어김없이 매년 돌아오는 새를 철새라고 한다. 이렇게 철새가 자기 둥지를 찾아 돌아온 것을 회귀본능(回歸本能), 혹은 귀소본능(歸巢本能)이라고 한다. 본능적으로 타고난 시간, 방위 감각이 마치 체내시계처럼 작동하기 때문이다. 주변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것이 제비다. 그래서 고전 소설에도 등장하는 우리에게 아주 친근한 새다. 제비는 보통 3~4월에 우리나라로 돌아와 집을 짓고 알을 낳아 새끼를 부화시켜 가을에는 12,000km 이상을 날아 월동지로 이동한다. 그리고 다시 이듬해 봄에 우리나라로 돌아온다. 제비는 태양의 위치, 지형지물, 지구 자기장 등을 활용해 경로를 기억하는 뛰어난 귀소성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매년 거의 같은 경로로 이동한다. 월동지는 주로 필리핀 루손섬 등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 인간에게도 유사한 본능이 있다. 어떤 사람이 방위개념이 전혀 없는 첩첩산중 오지에서 길을 잃었다. 어디로든 한 방향으로만 간다면 끝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열심히 앞을 향해 숲을 헤쳐 나갔다. 하지만 결국은 출발지점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더라는 것이다. 나중에 구조가 되어 헬기에서 내려다보니 원을 그리며 제자리만 맴돌았던 것이다. 자기는 앞으로 간다고 갔는데 결국은 같은 길을 돌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을 심리학에서는 ‘윤형본능’(輪形本能, Ring-Wanderung)이라고 한다. 사실 우리 인생이 그렇다. 본능에 따라 움직인다면 아무리 목표를 향해 앞으로 달려도 늘 제자리만 맴돌게 되어 있다. 매년 초마다 같은 계획, 같은 결심을 반복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흔히 사람들은 본능에 충실하라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 본능만으로는 인생을 올바르게 살 수가 없다. 그래서 하나님께 이런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방법을 주셨다. 그것이 ‘말씀’이다. 말씀을 의지하고, 말씀을 따라서 살면 본능을 뛰어넘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복되고 아름다운 삶을 살 수가 있다. 인생의 한계인 죽음을 넘어 영생을, 나아가 천국까지 이르도록 해준다.
말씀이 먼저다.
본문은 말씀의 중요성에 대한 우리 예수님의 말씀이다. 주님은 이 땅에 오셔서 공생애를 기도로 시작하셨다. 주님은 광야로 가셔서 그곳에서 40주야를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기도에 집중하셨다. 그때 마귀가 이런 주님을 찾아와 시험했다. 그 첫 번째가 돌을 가지고 떡을 만들어 먹으라는 것이었다. 돌로 떡을 만들어 먹을 수 있는 엄청난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왜 굶고 있느냐는 것이다. 사실 이는 현재 금식 중인 주님의 상황에 가장 절실한 문제였다. 그렇지만 여기엔 마귀의 숨은 의도가 있었다. 그것은 곧 능력을 사적인 유익을 위해 사용하라는 것, 특히 떡에서 자유롭지 못한 사람으로 전락시키려는 것이다. 주님께서 이러한 마귀의 의도를 모르실리 없었고, 그래서 단호한 말씀으로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셨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하시니’(4).
마귀가 금식으로 허기진 주님께 다가와 이 먹는 문제, 특히 떡을 가장 먼저 거론한 것은 의미가 있다. 떡은 ‘누구’에게나 ‘어디’에서나 ‘항상’(그때나 지금이나)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프랑스 대혁명 당시 사람들이 빵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외쳤던 것처럼, 빵(떡)은 모든 사람에게 가장 절실한 관심거리다. 오늘날도 한 정부의 성공여부는 먹는 문제(경제정책)로 판가름이 난다. 그러니 마귀의 이 시험은 굉장히 현실적이고 거부하기 힘든 중요한 문제다. 그렇지만 주님은 그럼에도 떡보다 더 중요한 것이 말씀이라고 선언하셨다. 결국 이것은 단순히 먹는 문제가 이니라 ‘우선순위’ 문제인 것이다. 마귀는 현실적인 이유로 떡을 우선순위로 이야기했으나 주님은 당장 주릴지라도 떡이 우선순위가 아니라 말씀이라고 선언하신 것이다. 아울러 주님은 사람은 떡 이상의 존재라는 것이다. 떡만으로는 살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런데 마귀는 현실적인 이유를 들어 떡이 전부인 것처럼 우리를, 심지어는 주님까지 속이려고 한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얼마나 많은 성도가 마귀의 이 속임수에 속고 있는지 모른다. 그래서 현실적인 이유로 주님과 주님의 말씀이 우선순위에서 자꾸로 밀려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주일성수를 자꾸 놓치고, 말씀과 기도 생활을 거르고, 예배생활에 자주 펑크를 내고, 물질적인 헌신(십일조와 같은)을 힘들어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한 번뿐인 인생이다. 그래서 일생(一生)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우선순위가 분명해야 한다. 주님의 말씀이 모든 것의 우선이어야 한다. 사람은 먹는 대로 만들어진다는 말이 있다. 말씀을 우선순위에 두고 부지런히 먹으면 하나님의 자녀인 경건한 성도가 된다. 현실만 맴돌게 하는 본능을 넘어서 주님의 영광스러운 뜻을 이루는 삶을 살 수가 있는 것이다.
말씀이 삶의 지표다.
그렇다면 왜 말씀을 우선순위에 두어야 하는가? 어떻게 현실만 맴돌게 하는 본능을 넘어서 주님의 영광스러운 뜻을 이루는 삶을 살 수가 있는가? 말씀이 곧 ‘삶의 지표’이기 때문이다. 망망대해에서 배 한 척이 침몰하고 있었다. 모두 구명보트에 옮겨탔다고 생각했는데, 한 명이 없었다. 모두가 절박한 표정으로 안절부절하고 있을 때 그 사람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가 손에 꽉 쥐고 있는 것을 보여주며 말했다. ‘나침반을 잊고 나왔기에......’ 나침반이 없다면 구명보트에 탔어도 바다 위를 표류할 수밖에 없다. 낯선 곳에서 꼭 필요한 것이 나침반이다. 물론 지도도 중요하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이 나침반이다. 특히 사막에서는 지도보다 나침반이 중요하다고 한다. 사막은 날씨의 변덕이 심한 데다가 모래폭풍이라도 부는 날이면 지형이 완전히 바뀌어 버린다고 한다. 지도에 표기된 길도 지형지물도 다 사라져 버린다. 그래서 지도가 무용지물이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침반은 그렇지 않다. 지구의 어디를 가도 남과 북을 정확하게 가리킨다. 이런 의미에서 말씀은 나침반과 같다. 상황, 환경, 시간에 상관없이 한결같기 때문이다. ‘천지는 없어질지언정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마24:35). 말씀의 영원성, 말씀의 불변성에 대한 주님의 말씀이다. 선지자 이사야도 같은 말을 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사40:8).
어느 대학 졸업식에서 한 교수가 졸업생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제 여러분은 위험한 바다에 배를 띄워 항해를 떠난다는 것을 기억하라!’ 이 말에 졸업생들은 숙연해졌다. 식이 끝난 뒤 한 학생이 그 교수에게 다가가 말했다. ‘교수님, 우리가 위험한 바다를 향해 출발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러면서 주머니에서 작은 성경을 꺼내 보여주면서 이어 말했다. ‘나침반이 여기 있으니까요!’ 그렇다. 말씀이 험난한 인생의 바다에서 올바른 방향과 목표를 가르쳐주는 삶의 나침반이다. 그래서 성경 저자는 이런 고백을 하고 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이니이다.’(시119:105). 말씀은 우리의 일상을 비춰주는 ‘등’이고, 나아갈 방향과 목표를 보여주는 ‘빛’이라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성경을 ‘캐논’(canon)이라고 한다. 이는 ‘잣대’, 혹은 ‘기준’이라는 뜻이다. 말씀이 우리 삶의 잣대요, 기준이라는 의미다. 말씀을 삶의 기준으로 삼고 사셨던 모델이 우리 예수님이시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이유는 한 가지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이다. 주님은 십자가를 지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셨지만 아버지 뜻대로 하시라고 기도를 마쳤다. 십자가를 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에 순종하신 것이다. 주님 삶의 기준은 항상 하나님 뜻이었고, 말씀이었다. 늘 여기에 선택의 기준을 두고 사셨다. 우리 선택도 주님과 동일해야 한다. 주님을 따르는 제자이기 때문이다.
먹는 대로 된다.
먹는 음식에 따라 몸과 마음의 건강이 결정된다. 그래서 먹는 대로 된다는 말이 있다. 이는 단순히 배고픔을 해결하는 것을 넘어, 섭취하는 영양분이 신체뿐만 아니라 정신 건강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의미한다. 유명한 프랑스 미식가인 브리아 사바랭(J. A, Brillat-Savarin)이란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 ‘당신이 무엇을 먹었는지 말해달라. 그러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려주겠다.’ 이 말의 본래 의미는 음식 취향을 통해 그 사람의 신분이나 경제력을 알 수 있다는 뜻이다. 먹는 것이 육체와 정신 건강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지만 그가 어떤 사람인지도 알 수가 있다.
먹는 것이 중요하고, 특히 무엇을 먹느냐가 중요하다. 생명은 먹는 것에 따라 변화가 생기기 때문이다. 잘 먹고, 골고루 먹고, 건강한 것을 먹어야 건강한 생명을 유지할 수가 있다. 그래서 요즘 건강한 먹거리 문제가 중요한 화제가 되고 있는 것이다. 이 먹는 것은 육체적 생명뿐만 아니라 영적인 생명, 곧 영혼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 영적 생명을 위해서는 빵이 아니라 말씀을 먹어야 한다. 말씀이 생명의 양식이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서 말씀을 먹는다는 것은 비유적인 표현이다. 말씀을 먹는다는 것은 말씀의 강에 발만 담그는 것도 아니라 말씀의 홍수에 내 존재와 사역을 모두 내어 맡기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씀을 즐거워하여 읽고 듣고 공부하고 묵상하는 일에 집중하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말씀을 컨트롤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나를 컨트롤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이 말씀을 먹는다는 것이고, 동시에 제대로 말씀을 먹었다는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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