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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주어’가 된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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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agathos 댓글 0건 조회 1,378회 작성일 24-08-11 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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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주어가 된 삶

41:9~24

2024. 8/11(성령강림 열세 번째 주일)

바로 앞에 선 요셉

요셉의 인생은 억울함의 연속이었다. 형들에게 미움을 받아 이집트까지 노예로 팔려갔다. 그 이유는 아버지 야곱의 네 명의 아내 중에 라헬에 대한 편애가 라헬의 소생인 요셉에까지 이어졌고, 이에 화가 난 다른 형제들이 요셉에게 이렇게 해코지를 한 것이었다. 그는 이집트에서 바로의 친위대장 보디발의 집에 노예가 되었고, 그나마 주인 보디발에게 신뢰를 받으며 노예살이를 잘 하였다. 그런데 보디발 아내의 누명으로 감옥에 갇히게 되었고, 그 감옥에서 기약(期約)없이 보낸 세월이 2년이었다. 본문은 이런 그가 갑자기 감옥에서 나와 이집트 왕 바로 앞에 서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그 이유는 이렇다. 어느 날 이집트 왕 바로가 연거푸 두 개의 꿈을 꾸었다(꿈 내용은 생략). 문제는 이집트 그 똑똑하고 지혜로운 현인들과 점술가 누구도 그 꿈을 해석하지 못했고, 이로 인해 바로의 번민이 깊어졌다. 그때 바로의 술을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게 되었다. 그는 2년 전에 있었던 일을 회고하며, 2년 전에 왕의 진노로 떡 굽는 관원장과 함께 감옥에 갇혔을 때 하룻저녁에 둘 다 꿈을 꾸었고, 해석을 못해 전전긍긍하고 있을 때 그곳에 갇혀있던 히브리 소년이 그 꿈을 해석해 주었는데, 그의 해석대로 떡 굽는 관원장은 처형되고, 자신은 복직이 되어 왕을 계속 섬기게 되었다고 했다. 아마 그 소년이라면 왕의 꿈을 충분히 해석할 수 있을 것이라고 천거했다. 그러자 바로 즉시 사람을 감옥으로 보내 요셉을 그의 앞으로 데리고 온 것이다. 그래서 요셉이 바로 앞에 서게 된 것이다.

 

하나님입니다.

이후 바로와 요셉 간의 대화를 보면 누가 왕이고, 누가 금방 감옥에서 나온 죄수인지를 구별하기가 어렵다. 특히 바로 왕의 초조함과 서두름에 비해 요셉의 침착하고 당당함이 아주 돋보인다. 바로가 먼저 입을 열었다. ‘바로가 요셉에게 이르되 내가 한 꿈을 꾸었으니 그것을 해석하는 자가 없더니 들은 즉 너는 꿈을 들으면 능히 푼다 하더라.’(15). 여기서 뭔가 초조와 조급함이 느껴지지 않는가? 이에 대한 요셉의 답변이다. ‘요셉이 바로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편안한 대답을 하시리이다.’(16). 답을 주는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건조할 정도로 침착하고 담담한 모습이다. 사실 죄수가 대제국의 왕 앞에 서는 일이 흔한 일이겠는가? 국가를 위해 큰 공을 세운 것도 아니고 죄수의 몸으로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겠는가? 그러니 요셉에게는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의 신상에 대해서 단 한 마디도 말하지 않았다. 그저 너는 꿈을 들으면 능히 푼다 하더라.’는 바로 말에 라는 단어를 하나님이란 단어로 바꿔서 대답했다. 그리고 바로의 꿈 이야기를 듣고 해석은 물론 대안까지 내놓았다(33~36). 그러자 바로가 요셉을 향해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38)이라고 말하며 그 자리에서 이집트의 총리로 임명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이 세 분의 족장과 비교했을 때 요셉의 가장 큰 특징이 그 숱한 역경을 겪으면서 단 한 번도 꿈이나 환상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거나 음성을 들은 일이 없다는 것이다. 세 분 족장에게는 그 흔한 일이 요셉의 생애에서는 한 번도 없었다.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형들을 찾아갔다가 형들에게 붙잡혀 이유도 모르고 물 없는 웅덩이에 갇혀 두려움에 떨며 밤새 울부짖을 때도, 미디안 상인에게 노예로 팔려갈 때 온 사막을 채울 만큼 큰 소리로 살려달라고 애원할 때도, 바로의 시위대장 보디발의 집에서 10여 년 동안 성실하게 섬겼으나 보디발의 아내가 노예가 여주인을 겁탈하려했다는 파렴치한 누명을 씌워 감옥에 가둘 때도, 이국만리 낯선 땅에서 2년 동안 감옥살이를 할 때도, 하나님께서 찾아오시기는커녕 위로와 소망의 말씀 한 마디도 해주시지 않았다. 신학자들은 요셉이 경험한 이런 상황을 신의 부재현상이라고 한다. 이런 상황이라면 하나님께서 무엇이라고 한 말씀 쯤 했을 법도 한데, 그의 삶에서 역사하신 흔적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말이 바뀌었다는 것은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런 상황에서 요셉은 하나님의 임재로 충만해졌다. 신의 부재 속에서 오히려 신의 편재를 경험한 것이다. , 하나님이 그를 잠시 외면하셨기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그가 하나님의 품에 안겨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하나님의 품에 있는데 어떤 다른 조치가 필요했겠는가? 물론 그도 처음에는 이를 몰랐기 때문에 몸부림쳤다. 형들에게 애원한 것을 비롯하여 감옥에 갇혀서 술 맡은 관원장의 꿈을 해석해주고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며 기억해달라고 부탁한 것이 그것이다. 그렇지만 2년 동안 감옥살이를 통해 그곳도 하나님께서 계시고, 자신이 하나님의 임재 안에 있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의 삶에 이런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자신의 억울함을 풀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는데도 자신의 신상에 대해서는 단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또한 꿈의 해몽은 하나님이 하신다고 담담하게 고백한 것이다. 이와 같은 고백은 뒤에서도 계속된다. 그가 자신을 팔아먹은 형들을 만났을 때 한 말이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45:6,7a). 자신은 팔려온 것이 아니라 보냄을 받았고, 형들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니 형들은 이 일로 조금도 마음 쓰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아버지 야곱이 죽자 형들은 걱정이 생겼다. 아버지도 죽었으니 이제 요셉의 보복이 시작되리라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아버지의 유언을 빙자하여 용서를 구했다. 그때 요셉이 울면서 말했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까.’(50:19).

 

이와 같은 요셉의 고백에서 중요한 것을 발견할 수가 있다. 그것은 그의 말에 주어가 바뀐 것이다.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다(40:14와 비교). 그는 하나님이 주어가 된 삶을 산 것이다. 사람의 변화는 말의 변화로부터 알 수 있다. 말에는 사람의 생각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이 바뀌었다는 것은 그 사람의 생각이 바뀌었다는 뜻이다. 더 나아가 그 사람이 바뀌었다는 뜻이다.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즉’(23:7). 그가 하는 생각이 바로 그 사람의 실체라는 뜻이다. 변화된 모습이 가장 먼저 말로 표현이 되기 때문이다. 앞에서 소개한 대로 바로 왕 앞에선 죄수 요셉의 말이 완전히 바뀌었다. 나아가 그의 삶도 완전히 바뀌었다. 무명의 히브리 출신 노예죄수에서 일약 대제국의 총리가 되었다. 그것도 단 한 장의 이력서도 없이 나이 30에 말 그대로 벼락출세를 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이 주어가 된 삶을 살게 되니 모든 것이 이렇게 바뀌게 된 것이다. 말도, 인생도, 환경도 바뀌게 된 것이다.

 

하나님이 주인 된 삶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편안한 대답을 하시리이다.’(16). 이는 요셉의 삶에 하나님이 주인이 되었음을 대외적으로 선포하는 것이자, 신앙고백이다. 우리는 주변에 많은 부러움을 받고 살았던 사람이 어느 날 전에 언제 그랬냐는 듯 초라하게 사는 사람이 많다. 언제 그가 그렇게 부자로 살았지? 언제 그가 그렇게 화려하고 유명하게 살았지? 할 정도로 말이다. 그러니 겸손해야 한다. 내가 지금 부유하다고 자랑하지 말고, 가난하다고 절망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고백해야 할 것은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이 통치하신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요셉처럼 하나님이 내 삶과 말에 주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 요셉의 말에는 내가 사라지고, 철저하게 하나님만이 주어가 되고 있다. ‘바로께서 꿈을 두 번 겹쳐 꾸신 것은 하나님이 이 일을 정하셨음이라. 하나님이 속히 행하시리니’(32). 여기서 요셉은 하나님을 두 번이나 말하고 있다. 하나님이 정하셨고, 하나님이 행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어가 된 사람은 자신을 철저히 하나님의 도구로 인정한 사람이다. 다시 말하면 모세의 손에 들린 지팡이, 삼갈의 손에 들린 소모는 막대기, 삼손의 손에 들린 나귀의 턱뼈, 주님 손에 들린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와 같은 존재로 자신을 인식한다.

 

우리 삶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이 주어로 인정될 때 역사가 일어난다. 우리뿐만 아니라 교회가 세상에서 승리자로 드러나느냐, 실패자로 드러나느냐는 우리와 교회 가운데 하나님께서 주어로 인정되고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로 결정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삶에서 하나님을 주어로 얼마나 사용하고 있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하나님이 다 하셨어!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야! 하나님이 그 사람을 보내 도와주셨어! 하나님이 문제를 해결해주셨어!....’ 매사가 하나님이 주어가 되어야 한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 주어가 될 때 삶의 어려운 문제들을 하나님께서 책임져주신다. 이런 은혜가 우리 삶에서 풍성하게 경험될 수 있기를 바란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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