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 내가 항상 함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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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agathos 댓글 0건 조회 7,029회 작성일 23-06-04 14:18본문
가라! 내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마28:16~20
2023, 6/4. 11:00(삼위일체 주일)
삼위일체 주일로 시작된 성령감림 절기
오늘 이 예배의 자리에 나온 여러분에게 주님의 충만하신 은총과 평화가 함께 하시길 빈다. 오늘은 성령강림 후 첫 번째 주일로, ‘삼위일체 주일’이다. 삼위일체는 우리 기독교의 중요한 신관이다. 하나님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계시는데, 이 삼위가 일체라는 고백이다. 교회는 성령강림 다음 주일을 삼위일체 주일로 지키고 있다. 교회력의 절반을 차지하는 절기가 성령강림 절기인데, 왜 이 절기가 이렇게 많고, 또한 삼위일체 주일로부터 이 절기가 시작된 것일까? 그 이유가 무엇일까? 교회사적으로 지금을 교회시대, 선교시대, 은혜시대라고 말한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중요한 방편이 성령과 동행하는 것임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성령과 동행하는 삶이란 곧 삼위일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라는 믿음을 굳게 새기기 위함이다. 즉,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하나시라는 고백이 그저 신학언어로만 ‘이해’되지 않고 일상의 신앙실천을 통해 ‘경험’되어야 할 고백인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아버지와 하나이신 예수님은, 또한 성령님과 하나이신 분이시다. 삼위일체 주일은 이렇듯 하나이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께서 우리에게 사명을 주시고, 사명을 감당하도록 동행하며 도와주심을 믿고 새기는 주일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이 신앙의 순례길에 있는 나와 여러분 모두에게 함께 하시길 기원한다.
갈릴리로 가라!
본문은 예수님의 대위임(The Great Commission)을 주제로 한 말씀이다. 열한 제자는 부활하신 주님을 뵙기 위해 갈릴리로 갔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명령하셨고, 또한 주님께서 그들보다 먼저 그곳에 가 계셨기 때문이다. 사실 갈릴리는 주님 사역의 출발지였고, 중심지였다. 또한 대부분 제자들의 고향이기도 하다. 제사장과 서기관과 통치자의 도시 예루살렘에서 주님은 죽임을 당하셨다. 그들은 주님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 나라의 진실과 대면할 용기가 없었고, 변화를 받아들일 마음이 없었고, 비록 엘리트 집단이었으나 진리에 대해 무지하고 무관심했다. 그들은 자기의 일천한 경험과 지식을 고수하면서 진리이신 주님을 거부했고, 오히려 자신들의 살아온 방식에 따라 주님을 처형했다. 한 마디로 주님과 제자들의 여정은 예루살렘에 이르러 끝났다. 그들의 꿈이 그곳에서 좌절된 듯 보였고, 실패한 것처럼 보였다. 제자들 역시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주님의 부활소식은 좌절된 꿈에 새로운 희망을 불러일으켰다.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주님은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셔서 제자들보다 먼저 갈릴리에 가 계셨다. 가난한 어부와 세리들, 세상에서 찢기고 고단한 삶을 살고 있던 이들이 주님을 만나 삶의 새로운 희망과 용기를 가졌던 그곳으로 부활하신 주님은 먼저 가 계셨다. 이제 갈릴리는 특정한 지역명칭이 아니다. 그곳은 부활하신 주님과 만나 삶이 변화되는 장소의 대명사가 되었다. 마음이 가난한 이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인생의 새로운 희망과 용기를 얻고, 변화의 한길로 나아가는 역사가 시작된 곳이 갈릴리다. 그래서 갈릴리는 새로운 희망과 용기를 얻고, 변화를 경험하는 모든 시대 모든 장소의 상징이 된 것이다. 제자들은 갈릴리로 가서(16) 주님을 뵙고, 경배를 드렸다. 물론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었다(17).
‘예수를 뵙고, 경배하나’ 여기서 ‘뵙고’를 뜻하는 헬라어 동사는 ‘에이도’(εἴδω)다. 이는 단순히 눈에 보이는 것(see)을 뜻한다. 이와 비교하여 같은 본다는 뜻의 ‘호라오’(ὁράω)라는 단어가 있다. 마음으로 보는 것, 곧 숨겨진 깊은 것을 보게 되고 알게 되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마태는 여기서 ‘호라오’가 아니라 ‘에이도’를 사용하고 있다. 당시 제자들의 영적 상태를 보여주려고 한 것이다. 그들이 주님을 보고 있으나 마음으로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을 뵙고도 의심하는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우리의 문제도 여기에 있다. 신앙생활은 하고 있으나 마음으로 주님을 보지 못한 것이 문제다. 성경은 읽어도 숨겨진 깊은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영적인 깊은 것을 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니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이런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것에 매어 사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 살아야 하는데, 여전히 정과 욕심에 사로잡혀 사는 것이다.
주님의 명령
눈은 현세적인 보이는 것에만 머물러 있고, 주님의 부활을 의심하는 그들에게 부활하신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본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18~20). 준비도, 자격도 갖추지 못한 자들에게 이런 엄청난 당부의 말씀을 하신 것이다. 우선, 주님은 명령자로서의 권세를 말씀하신다. 명령은 권세를 가진 사람이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았다.’(18)고 선포하셨다. 이는 세상을 호령하는 권력을 뜻하지 않는다. 주님이 받으신 권세는 어떤 사회적 지위에 기댄 권세가 아니라 복음적 삶에 대한 충실함에서 흘러나오는 권세다. 자기를 위해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는 권세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 기꺼이 자기를 내어주는 권세다. 모두를 위해 기꺼이 양보하고, 내려놓고, 포기할 줄 아는 권세다. 이것이 주님께서 받으신 권세다. 그러므로 비움으로써 채워지는 내면의 힘으로 충만한 사람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은 사람이고, 부활하신 주님의 권세에 동참하는 사람이다. 이런 권세를 가지신 주님께서 영적인 눈이 열리지 않아 여전히 의심하는 제자들에게 위대한 명령을 하신 것이다.
제자를 삼는다는 것
이렇듯 세상과 다른 권세를 받으신 주님은 제자들을 모든 민족에게로 보내셨다. 그리고 그들을 제자로 삼으라고 하셨다. 이 말씀은 그들을 지배하고, 가르침을 받드는 아랫사람으로 만들라는 지배명령이 아니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이 말씀을 이렇게 잘못 적용한 적이 있다. 제국주의 시대의 선교가 그랬다. 이 말씀을 오해해서 서양의 우월한 물질적 지위를 바탕으로 비서구세계를 지배하는 것을 선교로 여겼다. 대표적인 곳이 남미와 북미 선교다. 총과 대포를 앞세워 나라를 점령하여 강제로 개종을 시키고 개종을 거부하는 사람은 끔찍하게 죽였다. 당시 서구 기독교인에 의해 죽은 남북 아메리카 원주민인 인디오들이 얼마나 많은지 그 기록을 보면 끔찍하다. 그래서 당시 선교사는 제국주의의 앞잡이로 인식이 되었다. 많은 기독교인이 노예무역에 종사했다. 본문을 오해한 잘못된 선교관이 낳은 비극이다.
본문에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는 주님의 명령은 주님으로부터 보고 듣고 배운 바를 전하라는 뜻이다. 주님께 배운 섬김과 돌봄과 사랑을 전하여, 열방을 주님의 제자로 만들라는 명령이다. 이와 같은 주님의 명령이 신실하게 잘 수행된 선교지가 있다. 바로 우리나라다. 우리나라 선교는 밑으로부터의 선교, 자기를 희생하며 섬김과 돌봄의 선교였다. 즉, 주님께 배운 섬김과 돌봄과 사랑을 전하여, 민족을 주님의 제자로 삼는 선교였다. 그래서 우리나라에 온 선교사들은 섬기는 일부터 시작했다. 백성을 깨우치기 위해 학교를 세웠고, 질병퇴치를 위해 병원을 세웠다. 부모가 없는 아이들을 위해 고아원을 세우고, 사회와 가족으로부터 버림받은 병자를 모아 그들을 치료하며 보살폈다. 사회 계몽활동에도 힘썼다. 대표적인 사람이 호머 헐버트(H. Hulbert) 선교사다. 그는 23살에 우리나라에 왔는데, 우리나라 최초 근대식 공립교육기관인 육영공원에서 영어교사로 일했다. 그는 우리나라에 온지 4일 만에 한글을 터득했고, 3년 만에 한글로 된「사민필지」(士民必知)라는 서양식 교과서를 출판했다. 그는 주시경 선생과 함께 한글을 연구하여 띄어쓰기, 쉼표, 마침표를 도입하여 최초의 한글신문인 독립신문에 적용했다. 그는 한글의 우수성과 과학성을 미국언론과 영자신문에 기고하여 알렸다. 뿐만 아니라 을사늑약이 채결되자 고종의 밀사로 헤이그에 파송되어 한일합방의 부당성을 세계에 알리기도 했다. 그는 누구보다도 한글과 우리나라를 사랑했다. 그래서 안중근 의사는 그에 대해 이런 말을 남겼다. ‘나는 한 번도 헐버트를 만난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한국인이라면 단 하루도 그의 이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의 소원대로 그는 지금은 양화진에 묻혀있다. 우리나라에서 기독교의 영향력이 크고, 인식이 좋은 것, 우리나라가 선교강국이 된 것은 주님께 배운 섬김과 돌봄과 사랑을 전한 이들의 영향이 크다.
우리는 주님의 대사(大使)
나는 개인적으로 본문에서 크게 감동이 되고, 은혜가 된 것은 제자들이 아직 영적인 눈이 뜨이지 않아 여전히 주님을 의심하는 사람이 있음에도 막중한 사명을 주신 주님의 은혜다. 물론 그들을 제자로 부르실 때도 자격이 있어서 부르신 것은 아니었다. 당시 그들은 마치 밭에 심는 것이 금지된 겨자와 같은 존재였다. 그런데 주님께서 그런 그들을 부르셔서 당신의 정원에 심으신 것이다. 주님 나라 역군으로 삼으신 것이다. 그래서 이런 그들에게 이 엄청난 명령과 위임을 하신 것이다. 이 놀라운 은혜를 내 자신에게 견주어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주님도 모르는 죄인의 가정에서 태어난 나를 불러 주님을 믿게 하시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주님의 몸인 교회와 성도를 섬기도록 목사로 세워주셨고, 아무나 경험할 수 없는 선교지에서 4년 동안 사역을 하게 하시고, 또한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몸인 교회를 개척하여 섬기는 은혜까지 주셨다. 어느 것 하나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다. 여전히 영적으로 미욱한 자였는데 제자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주님께서 내게 은혜를 베푸신 것이다. 그러니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래서 본문이 더욱 은혜가 되었다.
여러분,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보냄 받은 사람이다. 섬김의 권세, 사랑의 권세, 배려와 나눔의 권세로 가족을 깨우고, 이웃을 깨우고, 세상을 깨우라는 사명을 받아 파송된 사람이다. 우리를 통해 주님께서 영광 받으시고, 우리를 통해 세상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하나라는 것을 알게 하는 일로 우리가 부름 받았다. 그러므로 우리 각 사람이 주님의 대사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겠다. 그리고 지금 우리 선 곳이 선교지라는 사실 또한 기억하기 바란다. 이 사실을 기억하고, 또 끝 날까지 항상 함께 하신다는 주님의 말씀 의지하여, 맡겨주신 사명 감당하는 데 부족함 없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
관련링크
- https://youtu.be/1hQeZ0Mqz4E 4887회 연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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