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만드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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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agathos 댓글 0건 조회 7,401회 작성일 23-05-14 13:33본문
길을 만드는 사람
막2:23~28
2023, 5/14. 11:00
장성(長城)과 가도(街道)
달에서 지구를 보면 인간이 만든 두 개의 인공물이 보인다고 한다. 하나는 중국이 만든 만리장성이고, 다른 하나는 로마가 만든 도로다. 물론 웃자고 하는 소리일 것이지만, 이 둘이 인류역사에 끼친 영향은 크다. 비슷한 시기(주전3세기)에 같은 기술과 힘을 가지고, 중국은 장성(5,000㎞)을 쌓고, 로마는 도로(150,000㎞)를 만들었다. 로마 인근에 있던 이집트도 마찬가지다. 그들 역시 그 힘과 기술로 피라미드를 만드는데 사용했다. 이집트는 한 개인의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 국력을 쏟아 피라미드를 만들었고, 로마는 사회간접자본을 위해 힘을 쏟아 도로를 만들었다. 당시 로마는 그들이 만든 도로 곳곳에 ‘몰레스 네케싸리에’(Moles necessarie), 곧 ‘사람이 사람다운 생활을 위해 필요한 대사업’이라는 글자를 새겨놓았다. 길을 만든 목적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고(故) 이어령 교수도 이 두 생각의 차이가 서로 다른 역사와 문명을 낳게 되었다고 하면서, ‘성’보다 ‘길’이 중요하다고 했다. 사실 벽은 사람의 왕래를 차단하지만 길은 사람의 왕래를 촉진시킨다. 국가방위를 위해 이민족과의 왕래를 차단할 것이냐? 아니면 자국 내의 왕래를 촉진할 것이냐? 이는 중요한 선택의 문제지만 또한 중요한 차이를 만들어낸다. 아무튼 두 민족의 이런 생각의 차이는, 결국 중국과 로마라는 고대 두 강국의 운명까지 결정짓게 만들었다.
길을 만드는 자가 흥한다.
인류역사는 성보다는 길을 통해서 발전해왔다. 소금장수의 길에서부터 이른바 비단길이라 일컬어지는 실크로드, 황금길과 석유길, 그리고 지금은 인터넷과 방송이라는 무한한 길을 통하여 발전하고 있다. 독점, 소유의 시대에서 공유의 시대로, 닫힌 세계에서 열린 세계로, 수직사회에서 수평사회로, 승패(勝敗)의 시대에서 같이 이기는 윈윈(win-win)의 시대로 이동하고 있다. 그 중심에 길이 있다. 길은 곧 개방과 소통의 상징이다. 아무튼 인생을 비유하는 것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바다, 배, 안개, 이슬 등등. ‘길’도 그 중에 하나다. 길을 따라가면서 일어나는 일들을 인생에서 부딪치는 여러 상황에 비유하여 말하기도 한다. 길의 종류에 따라서, 길의 방향에 따라서, 혹은 길의 목적에 따라서 길과 인생의 의미가 드러난다.
몽고 울란바토르 근교에 돌궐제국을 부흥시킨 ‘돈유쿠크’의 비석이 있는데, 거기에 유명한 글귀가 새겨져있다고 한다. ‘성을 쌓고 사는 자는 반드시 망할 것이며, 끊임없이 이동하는 자만이 살아남을 것이다.’ 길을 만드는 자가 흥한다는 뜻이다. 유목민족의 특성을 보여주는 명문이다. 특히 영원한 본향을 향해 길을 가는 우리 성도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여기가 좋사오니’ 하고 편안한 곳에 안주하기보다 날마다 천국을 향해 전진하라는 경고와도 같다. 하나님의 나라는 성을 쌓지 않다. 누구든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오라며 길을 넓힌다. 이것이 우리 기독교의 특징이다. 항상 구원의 길 생명의 길 하나님께로 가는 영원한 길을 보여주고, 그 길로 초청하고, 그래서 함께 그 길을 걷는 것이 기독교다. 그리고 이것을 삶으로 보여주신 분이 우리 예수님이시다. 주님은 공생애 3년 동안 항상 길 위에만 계셨다.
예수님, 기존의 질서에 도전했던 분
막2:1~3:6에는 예수님과 유대 종교지도자들 간에 5개의 논쟁(죄 용서의 권한–중풍병자를 고침/ 죄인과 의인의 구별–세리와 죄인들과의 교제/ 새로운 시대의 전적 단절성–금식에 대한 논쟁/ 죽임과 살림-손이 마른 사람을 고침)이 기록되어 있다. 분문은 5개의 논쟁 중에 네 번째다. 이 부분에서 주님은 새로운 시대를 행동으로 보여주고 계신다. 유대 종교지도자들과의 논쟁을 통하여 기존의 여러 이념에 도전하고, 새로운 시대의 지향을 확실하게 보여준다. 본문도 그 중에 하나다. 특히 본문은 안식일 논쟁을 통해 안식일이라고 하는 전통적인 가치 혹은 제도에 대한 올바른 해석, 곧 안식일의 정신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튼 이와 같은 논쟁을 통해서 주님이 새로운 ‘길을 만드시는’ 분임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논쟁은 주님께서 1장에서 선포하신 하나님의 나라 즉, 하나님의 통치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그것은 당시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중심이 된 낡은 세계와의 완전한 단절, 모든 차별을 없애고, 사람됨과 생명권을 회복하는 것이다. 이것은 기존의 질서나 이념, 가치관에 대한 도전이고, 전혀 새로운 길이다. 다시 말하면 주님은 기존의 질서, 이념, 가치관에 도전하셨던 분이시면서, 또한 새로운 질서, 곧 길을 만드신 분이시라는 뜻이다.
사실 성경의 사람들은 성을 쌓는 사람보다는 길을 찾고, 길을 만드는 사람이다. 그 대표적인 분이 ‘예수님’이시다. 물론 예수님 자신이 길이셨다. 예수님이 구원의 길, 생명의 길, 진리의 길, 영생의 길 자체셨다. 하나님 아버지께로 가는 길이셨다. 그러면서 사람들에게 길을 만들어 주시고, 또한 생명과 구원의 길로 인도하시는 분이시기도 하다. 주님께서 열 두 제자를 부르시고 그들을 훈련하신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리고 어느 한 곳에 거처를 정하여 계시지 않고, 사람들이 그토록 몰려왔지만 그 흔한 회당하나 짓지 않으셨다. 친히 사람들을 찾아 항상 길 위에만 계셨다. 또한 따르는 사람들에게 길을 만드는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시기도 했다. 그것이 곧 복음이신 주님을 전하는 전도요, 선교다. 그러므로 성을 쌓는 자는 쇠하고, 길을 닦는 자, 그리고 그 길로 복음을 전하는 자는 흥한다.
길을 내는 제자들
본문의 내용은 이렇다. 주님과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 때 길을 만들기 위해 제자들이 길을 막고 있는 밀 이삭을 자랐다. 이 모습을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보고 주님께 항의를 한 것이다.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일을 해도 두고 보기만 하느냐는 것이다. 비슷한 사건이 마태와 누가복음에도 나온다. 하지만 내용이 약간 다르다. 마태와 누가복음에 의하면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주님께 항의한 이유가 안식일에 제자들이 추수와 타작을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즉, 마태복음에서는 제자들이 배가 고파 이삭을 잘라서 먹었고, 누가복음에서는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벼서 먹었다. 분명히 안식일에 허락되지 않은 일들이다. 안식일 법에는 39개의 금지조항이 세부적으로 규정되어 있다. 불을 피우는 것, 그릇을 옮기는 것, 물을 깃는 것, 800m 정도의 길을 걷는 것, 글자 두 개를 지우는 것, 씨를 뿌리는 것, 밭을 가는 것, 추수하는 것, 곡식 단을 묶는 것, 타작하는 것, 키질하는 것 등. 이삭을 자르고 비비는 행위는 추수하고, 타작하는 것에 해당된다.
그런데 본문에는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이삭을 잘라서 비벼먹었다.’는 말이 없고, ‘길을 열며 이삭을 자르니’ 라고만 되어있다. 안식일에 주님과 제자들이 밀밭을 통과하여 지나가게 되었고, 길을 막고 자란 밀들을 제자들이 자르면서 길을 만들었다는 뜻이다. 따라서 본문은 추수나 타작과는 무관하다. 이 사건을 주님께서 가신 길과 연관 지어 생각해 보면, 이제 제자들도 주님의 길에 함께 하기 시작한 것이다. ‘길을 열며 이삭을 자르는’ 행위는 하나의 은유다. 마가복음의 전체 주제가 ‘길’과 ‘따름’에 있는데, 그 길을 이제 제자들도 함께 만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마가복음에서 길은 주님의 삶의 방법이고, 제자가 따라야 할 제자도의 모범, 곧 복음이다. 바로 이 길로 하나님이 오실 것이며, 이 길로써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것이다. 주님께서 오신 이유, 그리고 제자를 부르시고 훈련하여 파송하신 이유가 이 길을 만들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제자들도 이제 주님의 길에 함께 하기 시작한 것이다. 본문의 안식일 논쟁은 이 새로운 길을 만드는 과정에서 제도화된 신앙 혹은 신념과 서로 충돌한 것이다. 기존의 질서를 유지하고 지키려는 사람과 그것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길을 만들려고 하는 사람간의 갈등은 어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교사는 길을 내는 사람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150년 전에 미국과 영국에서 활동한 훌륭한 하나님의 사람이 있었다. 영국에는 설교의 황태자로 불리는 스펄젼 목사가 있었고, 미국에는 대부흥운동을 이끌었던 무디 목사가 있었다. 두 분은 비슷한 시기에 태어난 복음주의자였고, 그 시대에 영적 부흥을 이끈 영성이 깊은 목사들이었다. 그런데 두 사람의 사역방향에는 차이가 있었다. 스펄젼은 개교회 중심사역을 하면서 메트로폴리탄 터버너클이라는 큰 교회를 지었다. 반면에 무디는 시카고 빈민가에 신학교를 세워 인재를 양성했다. 150여년이 지난 지금, 스펄젼의 영향력은 책으로만 남아있지만 무디의 영향력은 그의 제자들, 그가 세운 신학교의 출신을 통해서 계속 전 세계적으로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이것이 곧 건물에 투자한 사람과 사람에게 투자한 사람의 차이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교회도 사람도 성을 쌓는 것보다 길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흔히 성도를 가리켜 영적 ‘노마드’(Nomad)라고 한다. 노마드란 정착하지 않고 떠돌아다니는 유목민이라는 뜻인데, 특정한 가치와 삶의 방식에 얽매이지 않고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바꿔나가며 창조적으로 사는 인간형을 뜻한다. 앞에서 말한 대로 길을 만드는 사람이다. 성도를 영적 노마드라고 표현한 것도 같은 의미다. 천국의 순례자로서 이 세상이나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도전하며 영적인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선봉에 선 사람이 교회학교 ‘교사’다. 교회학교는 하나님이 주신 꿈을 키우는 꿈 동산이고, 또한 교회의 비전산실이다. 이러한 곳의 핵심요원이 교사다. 아이들과 함께 하나님이 주신 꿈을 꾸며, 그 꿈을 가꾸는 사람, 그 꿈을 이루도록 돕는 사람이다. 아이들에게 마땅히 가야할 길을 보여주고, 걸어 가야할 길의 방향을 제시하고, 함께 그 길을 걷는 사람이다. 신앙 공동체에서 더 없이 소중한 사람이 교사다. 어린이가 교회의 미래라면 그 미래세대를 준비하고 세워가는 사람이 교사다. 우리 교회의 소중한 미래를 준비하고, 그 길을 만들고 있는 사람이 교사다. 이런 교회학교 교사를 축복하며 기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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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youtu.be/xdRaR3g5wJg 5285회 연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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