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새롭게, ‘부르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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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agathos 댓글 0건 조회 8,125회 작성일 23-02-19 13:04본문
다시 새롭게, ‘부르심’
출6:14~27
2023. 2/19. 11:00
부르심의 중요성
온갖 재난이 끊이지 않는, 우리 찬송가 가사처럼 죽을 일만 쌓여가는 세상이다. 여전히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끝이 보이지 않는 전쟁을 계속하고 있고, 안타깝게도 최근 튀르키예에서는 지진으로 엄청난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이런 사건과 사고소식을 접할 때마다 사람이 얼마나 허망하고 덧없는 존재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더불어 단 한번만 주어진 선물인생을 정말 생각 없이, 의식 없이, 영혼 없이 살아서는 안 되겠다, 길을 잃고, 자신을 잃고 살아서는 정말 안 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하루하루 날마다 ‘나는 누구인가?’, ‘왜 사는가?’,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묻는 사람이 수도자라고 한다. 어찌 수도자뿐이겠는가? 사람이라면 누구나 마땅히 물어야 할 질문이다. 특히 성도라면 자주 질문하면서 삶의 목표, 삶의 방향, 삶의 중심, 삶의 의미가 주 예수 그리스도임을 늘 새롭게 확인해야 할 것이다.
이런 삶을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부르심’의 은혜를 아는 것이다. 성도로서 삶의 목표, 삶의 방향, 삶의 중심, 삶의 의미를 주님께 두는 삶을 살기 위하여 알아야 할 지식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자신에 대한 지식이다. 그리고 이 지식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것이 부르심이다. 사람만이 유일하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르심은 사람됨이 무엇인지 말해 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형상에 따라 지음 받은 존재로서 삶의 목표, 삶의 방향, 삶의 중심, 삶의 의미를 주님께 두는 길이라고 말할 수 있다. 특히 성도로서 영적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고 역동인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비결이 바로 여기에 있다. 부르심을 아는 것, 기억하는 것이다. 여기에 삶의 목표, 삶의 방향, 삶의 중심, 삶의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본문을 통해 우리의 부르심을 새롭게 하는 은혜를 깨닫고자 한다.
부르심의 은혜
우리가 자주 드리는〈선한 능력으로〉라는 찬양의 작사자인 독일 신학자 본 훼퍼는 부르심을 이렇게 정의했다. ‘부르심은 우리 마음의 소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임하는 것입니다. 부르심은 주님이 원하시는 사람에게 주님이 원하시는 때에, 낯설고 어색하며, 전혀 예기치 못한 주님의 말씀으로 강력하게 임하여 꼼짝없이 사로잡아 주님을 섬기게 합니다. 그 누구도 주님의 부르심을 거역할 수 없으며, 오직 주님이 주시는 말씀이 있을 뿐입니다.’ 한 마디로 부르심은 선택사항 아니라 일방적으로 주어진 것이고, 그래서 거역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이라는 것이다. 때문에 은혜다. 그것도 특별한 은혜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본문이다. 본장에서 저자는 출애굽 역사를 잠시 중지하고 뒤돌아보는 시간을 가진다. 그것이 바로 본문이다. 즉, 이스라엘의 족보다. 그런데 일반적인 족보가 아닌 레위자손의 선별적인 족보, 곧 모세와 아론을 중심으로 한 족보다. 이 족보에는 두 가지 특징이 있다. 우선, 야곱의 다른 아들들에게는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물론 첫째(르우벤)와 둘째(시므온)을 소개하고 있지만, 이는 레위(셋째)의 출생순서를 보여주기 위해서다. 다음은, 모세의 후손이 아니라 아론의 후손이 언급되고 있는 점이다. 이는 성경의 관심이 제사장 나라에 있다는 것으로, 제사장 나라를 위해 제사장 역할을 할 사람들이 그들이기 때문이다. 믿는 자에게 예배만큼 중요한 것이 없음을 암시한 것이다. 그런데 이 일을 위해 레위지파가, 그 중에서도 아론의 자손이 부름을 받은 것이다.
사실 레위자손이 이런 복을 받은 것은 놀라운 일이다. 레위는 시므온과 함께 세겜 사람을 살육하고 약탈한 잔인한 성품의 소유자다(창34장). 그래서 야곱이 임종을 앞두고 자녀들에게 예언적 유언을 했는데(창49장), 이 일로 시므온과 레위에게는 축복대신 저주를 했다(창49:5~7). 부모가 죽음을 앞두고 자식에게 한 마지막 말인데, 축복은 없고 저주뿐이었다. 이런 레위지파를 하나님은 제사장 나라의 제사장으로 세우신 것이다. 이런 레위혈통에서 모세와 아론이 나왔다. 부모로부터 저주받은 혈통에서 자기 민족을 구원할 영웅이 나온 것이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은혜로밖에 설명할 수가 없다. 이런 그들을 제사장 나라의 제사장으로 부르신 하나님의 은혜다. 그들의 혈통에서 민족의 구원자로 모세와 아론을 부르신 하나님의 은혜다. 모세 개인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부르신 은혜가 없었다면 모세 역시 다른 아이들처럼 나일 강에 던져져 악어 먹이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부르심만큼 특별한 은혜도 없다. 우리 또한 잔인한 살인자 레위 후손이고, 저주의 혈통에서 태어난 사람들이다. 그런데 모세처럼 아론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것이다. 그래서 택하신 족속,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소유된 백성이 되었다(벧전2:9). 이 뿐만이 아니다. 주변에 우리보다 똑똑하고 유력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 유독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모두가 부르심이다. 서열과 지위와 가진 것과 상관없이, 우리의 됨됨이에 상관없이 우리가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특별한 은혜다. 부르심이 없었다면 우리는 그저 흔적도 없이 사라질 존재였다. 그러니 부르신 은혜가 크고, 이 은혜를 생각하니 감사와 감격이 넘치게 된 것이다.
감사다툼
고등학생 때다. 돌아가신 한경직 목사님의 설교에서 잊혀 지지 않는 감동적인 이야기를 읽었다. 어떤 사람이 천국을 관광하게 되었다. 천국 여기저기, 이곳저곳을 다니다가 어느 곳에서 사람들의 다투는 소리를 들었다. 천국에서도 사람들이 싸운다는 사실이 너무 신기해서 그곳을 찾아가 보았다. 분명히 사람들이 싸우고 있는 것은 분명한데 싸우는 내용이 세상과는 전혀 달랐다. 들어보니 자신이 가장 감사해야 할 사람이라고 우기는 ‘감사다툼’이었다. 생김새만 보고도 그가 세상에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 금방 알 수 있는 상처투성이에다 험상궂게 생긴 남자가 말했다. 자신의 모습이 말해주듯 자신은 세상에서 악한 짓만 일삼다가 사형수로 감옥에 갇혔고, 그곳에서 신실한 성도의 전도를 받아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받아 이렇게 천국에 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지옥도 아까운 자신이 천국에 왔으니 자신이 가장 감사해야 할 사람이라고 주장했다. 그러자 백발의 노인이 나섰다. 자신은 평생 예수님을 모르고 살다가 죽을 병이 들어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고, 임종환자를 돌보는 목사님을 만나 임종직전에 예수님을 영접하여 이미 지옥티켓을 받아놓은 자신이 극적으로 천국을 오게 되었다고 했다. 그러니 누구보다 감사해야 할 사람은 자신이라고 우겼다. 이번엔 옷을 단정하게 차려입은 점잖은 노신사가 나섰다. 자신은 예수님을 신실하게 잘 믿는 교회에서 장로로 권사로 섬기는 부모에게서 태중신자(모태신자)로 태어난 사람인데, 평생 주님을 떠난 적이 없이 충성스럽게 주님만 섬기다 천국에 왔다는 것이다. 좋은 믿음의 부모를 만나, 평생 믿음의 가정에서 세상에 눈 돌리지 않고 주님만 보고 주님만 섬기며 살았으니 얼마나 감사하냐는 것이다. 그러니 가장 크게 많이 감사해야 할 사람은 자신이라고 그 역시 주장했다.
여러분은 이들 중 누가 가장 감사해야 할 사람이라고 생각하는가? 그거야 부르심의 은혜를 가장 크게, 가장 많이 깨달은 사람일 것이다. 여러분, 세상이 교회와 성도에게서 등을 돌린 가장 큰 이유가 무엇인지 아는가? 예수님 당시부터 누가 크냐는 등 자리다툼을 비롯하여 시기와 질투, 교만, 자기 영광, 자기세력 확장을 위해 성도가 교회에서 수준 낮은 싸움을 하기 때문이다. 수준 떨어지는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과 같은 세속적으로 자랑질이나 하고, 이런 허망한 것들을 무기삼아 교만하기 때문이다. 감사다툼이야말로 성도가 매일 해야 할 싸움이고, 교회가 항상 해야 할 다툼이다. 자랑을 해도 자신의 자격 없음을 자랑하고, 절망적인 죄인인 것을 자랑하고, 이런 자신을 택하여 부르신 하나님의 은혜를 자랑해야 한다. 이런 사람은 그저 감사하고, 또 감사하고, 감사하게 된다. 이를 가능하게 해준 것이 부르심의 은혜를 아는 것이고, 기억하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도 천국에 있는 성도들처럼 모이면 감사다툼이나 하는 수준 높은 삶을 누리게 될 것이다. 이런 교회, 이런 성도가 내가 꿈꾸는 교회이고 성도의 모습이다.
부르심의 확신으로 사는 삶
시인 릴케에게 문학 지망생이 찾아와서 물었다. ‘선생님, 제가 선생님처럼 시인이 되려고 하는데, 하나님이 저에게 시인이 될 풍성한 재능을 주셨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그때 릴케는 주저 없이 말했다. 그것을 알기 위해 이곳저곳, 이 사람 저 사람 찾아다니거나 기웃거리지 말라고, 특히 여기저기에 작품을 응모해서 재능을 증명해 보이려고 애쓰지도 말라고 했다. 다만 이렇게 자신에게 물어보라고 했다. ‘내가 시인이 되지 않는다면 과연 나에게 살 의미가 있는가? 정말 나는 죽어도 꼭 시인이 되어야만 하는가?’ 만약 이 질문에 그렇다고 생각이 들면 누가 뭐라고 하든지 꼭 시인이 되고, 그렇지 않다면 온 세상 사람이 일어나 꼭 시인이 되어야 할 사람이라고 칭찬하고 격려해도 절대 시인이 되지 말라고 했다. 시인으로서의 재능보다 소명의 확신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는 시인뿐만 아니다. 성도도 주님과의 관계에서 내적인 확신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 주님께서 이 세상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고르고 골라 나를 선택하여 부르셨다는 확신이다.
이러한 삶을 가장 성공적으로 산 사람이 있다. 예수님을 만난 사도 ‘바울’이다. 그는 주님을 만난 이후 부르심의 확신을 가지고 일생을 살았다. 이 확신이 그로 하여금 어떤 환경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도리어 위대한 고백을 하도록 만들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8,39). 이런 고백은 부르심에 대한 확신에서 온 것이다. 바울의 삶이 이런 확신에 기초하였기에 자기 목숨이 다하는 순간까지 주님을 위해, 주님의 복음을 위해 살 수 있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4). 성도는 부모로부터 저주받은 레위처럼, 저주받은 혈통에서 태어난 모세와 아론처럼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다. 교회는 그 부르심을 받은 사람의 공동체다. 성도는 바울처럼 이런 부르심에 대한 확신으로 사는 사람이다. 우리 모두 부르심에 대한 확신을 날로 새롭게 확인하는 나날이 되기를 바란다.
관련링크
- https://youtu.be/kvqzQi_oKp8 3863회 연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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