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리의 원리로서, ‘절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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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agathos 댓글 0건 조회 7,599회 작성일 23-04-02 13:16본문
승리의 원리로서, ‘절제’
고전9:23~27
2023. 4/2. 11:00(종려주일)
척한다고 이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미국의 농구코치 가운데 ‘커튼 피시먼스’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조금 유명하게 된 이유는 그가 지도한 농구팀이 항상 꼴등을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구단이 그를 해고하지 않고 그대로 기용했다는 사실이다. 한 번은 이 코치가 팀 분위기 전환을 위해 심리전술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심리적 설득을 위해 선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 사실 우리는 게임에서 항상 지는 팀이었다. 이제 그 생각은 다 지워버리고, 이번만은 우리는 항상 이겨왔던 것처럼 이긴 척하고 나가자!’ 이렇게 하면 선수들의 자신감(self confidence)이 올라가 경기에서 승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경기에서 또 지고 말았다. 그러자 코치는 화가 나서 선수들에게 호통을 쳤다. ‘여러분은 내 말을 뭐로 들은 거냐! 이긴 척하고 경기에 임하라고 내가 그렇게 호소하지 않았느냐?’ 이런 코치를 한 선수가 가만히 쳐다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코치님, 그냥 우리가 이 게임에서 이긴 척하세요.’
물론 운동경기에서 심리전술이 중요하다. 그래서 탁월한 지도자는 심리전술을 적절하게 잘 활용한다. 그러나 승리는 심리적 전술 이상의 것을 필요로 한다. 다시 말하면 실력이 있어야 한다. 아무리 심리전술을 사용해도 실력이 없으면 이길 수 없다. 그리고 실력이라는 것은 훈련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이 훈련에 대해 성경에서는 독특한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곧 ‘절제’라는 단어다. 그러니 절제가 승패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는 뜻이다. 잔이 넘치는 것을 경계하는 뜻의 ‘계영배’(戒盈杯)라는 술잔이 있다고 한다. 도공(陶工) 우명옥이란 사람이 만들었다고 하는데, 그는 스승도 이루지 못한 설백자기(雪白磁器)를 만들어 명성을 얻었다. 하지만 유명세에 들떠 술로 허랑방탕하다가 재물을 모두 탕진했다. 그제야 그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술을 적당히 먹게 만드는 ‘계영배’를 만들었다고 한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란 말처럼 성공적인 인생을 위해 반드시 절제가 필요함을 교훈한 것이다.
이기려면 절제해야
본문에서 바울은, 지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고린도 지역에서 2년마다 개최하는 이스무스(Isthmus) 경기에 출전하는 운동선수에 비교하여 경기에서 우승의 조건으로 절제를 강조하고 있다.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24,25). 인생은 경주이고, 경주에는 승패(勝敗)가 있는데, 경주에서 승리한 사람만이 상을 받는다. 그리고 승리하여 상을 받으려면 모든 일에 절제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언젠가 바르셀로나 올림픽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딴 황영조 선수가 이런 고백을 한 것을 들었다. ‘버스 뒤를 쫓아가는 훈련을 하던 중에 너무 힘들어 버스 바퀴에 들어가고 싶었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런 생각을 했을까 마음이 짠했다. 먹고 싶고, 자고 싶고, 즐기고 싶은 모든 것을 절제하며 훈련하여 금메달의 영광을 차지한 것이다. 바울 역시 자신도 한 사람의 경주자로 실격을 당하거나 자격을 박탈당하지 않고 경주에서 승리하여 상을 얻도록 노심초사한다고 고백하였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27).
절제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죽고 싶을 만큼 고단하고 오랜 훈련을 필요로 한다. 또한 우리의 삶은 제한적이다. 우리의 생명을 비롯해서 건강도 시간도 물질도 모두가 제한적이다. 이렇게 제한적인 삶을 살면서 절제하지 못한 것은 낭비다. 낭비와 방종의 끝은 파국이다. 그러니 파국을 막으려면 절제해야 한다. 절제는 과도한 힘의 방출을 막는 것이다. 제한적인 삶의 자원을 가장 요긴한 것을 위해 집중하는 것이다. 바로 이와 같은 절제의 삶에 승리가 문을 두드리게 되는 것이다.
모든 일에 절제해야
히브리서 저자도 비슷한 말을 하고 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12:1,2). 신앙생활은 경주와 같고, 성도는 경주자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경주의 조건으로 두 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하나는, 이미 십자가의 고통과 부끄러움을 참고 견디어 승리자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신 예수님을 ‘바라보라는’ 것이다. 여기서 ‘바라본다.’는 것은 하나의 목표에 시선을 ‘고정하는’ 것(fix)을 의미한다. 즉, 주님께 시선을 집중하고 고정하여 달리는 것이다. 아무리 열심히, 그리고 잘 달려도 방향이나 목표가 잘 못되면 그 수고는 헛되고 말기 때문이다. 선택에는 이미 포기가 전제되어 있다. 지금 드리는 이 예배를 선택하려고 우리는 많은 것을 포기했다. 친구와의 약속을 포기하고, 가족과의 나들이를 포기하고, 꽃구경을 포기하고, 피곤해서 쉬고 싶었지만 그 쉼을 포기하고 예배의 자리로 나온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의 목표에 시선을 고정하려면 다른 모든 것에서 시선을 끊어야 한다. 절제해야 집중하여 고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라는’ 것이다. 달리기 선수든 격투기 선수든, 혹은 축구 선수든 모든 운동선수는 가장 가벼운 복장으로 경기에 임한다. 1세기의 운동선수는 시합에 나설 때 거의 벌거벗은 상태였다고 한다. 요즘 스포츠계에서도 선수의 몸을 가볍게 하기 위해 가장 과학적이고 신체공학적인 의상이나 신발을 만들려고 애쓰고 있다. 옷이나 신발뿐만 아니다. 일상생활과 마음까지도 잘 조절하고 훈련해야 한다. 불필요한 가지를 쳐내는 것처럼 모든 일에 절제해야 한다. 여기서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가 바로 그것이다. 예를 들어, ‘상처 난 감정’, ‘교만과 불신앙’, ‘실패의 좌절감’, ‘성실치 못한 자책감’, ‘이기심’, ‘정욕’, ‘잘못된 습관’, ‘무가치한 생활’ 등과 같은 것들이다. 이런 것들이 믿음의 경기에서 실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게 만드는 장애물이다. 아무튼 믿음의 경기에서 이기려면 발걸음을 무겁게 하고 얽매이게 하는 모든 것을 다 벗어버리고, 목표이신 주님만을 바라보며 달려야 한다. 이를 위한 중요한 조건이 절제다.
이는 성경의 일관된 주장이다.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잠16:23). 진정한 승리자는 무엇보다 자신을 다스리는 자라는 것이다. 승리의 경주를 위해 가장 어려운 적이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을 잘 다스려 이기지 못하면 실패다. 자기를 다스린다는 것은 곧, 자기 마음과 감정, 생각, 습관, 삶의 태도 등을 다스리는 모든 일에 절제하는 것을 뜻한다. 이런 사람은 성을 빼앗는 어떤 용사보다 났다는 것이다. 반면에, ‘자기의 마음을 제어하지 아니하는 자는 성읍이 무너지고 성벽이 없는 것과 같으니라.’(잠25:28)고 했다. 절제하지 못한 사람에 대한 경고의 말씀이다. 절제하지 못한 사람은 황폐한 성읍, 혹은 성벽이 허물어진 성과 같다는 것이다. 절제하지 못하면 작은 공격에도 쉽게 무너지고, 마음 가는대로 놔두면 위험하다. 그러므로 절제는 성공적인 삶을 사는데 있어서 미덕이 아니라 필수다.
고3정신으로
어떤 분의 말이다. 그는 나태한 마음이 들 때마다 ‘나는 고3이다.’고 외친다고 한다. 적어도 우리 사회에서 고3은 절제하며 살아가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여행을 가고 싶어도, 이성 친구를 사귀고 싶어도, 취미활동을 하고 싶어도, 놀고 싶어도 절제하면서 참고 뒤로 미룬다. ‘대학 들어가서 하자!’ 그러고 보면 우리 성도 역시 그래야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고3정신으로 쉬고 싶고, 놀고 싶어, 즐기고 싶고, 이것저것 해보고 싶고, 가져보고 싶고, 누려보고 싶어도 ‘천국 가서 하자!’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가져야 하는 태도다. 이를 신학적으로 표현하면 ‘종말론적 긴장’이다. 고3 학생이 다른 모든 것을 뒤로 미루고 오직 공부에만 몰두하듯, 종말론적인 긴장을 가지고 우리도 세상사는 동안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일에 우선 몰두해야 한다. 해야 한다니까 할 수 없이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마음을 기울여 열심히 해야 한다. 그래서 성도가 하는 일은 어디서나 틀림없다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고3의 정신이 필요하다. 신경이 다른 일들로 분산되는 것을 막아야 보다 중요한 일을 성심껏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25절 말씀을 읽어보자.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신앙의 본질은 승리에 있다. 썩을 면류관을 위해서도 승리하려고 하는데, 썩지 아니할 면류관을 위해 우리는 반드시 승리해야 한다. 이겨야 한다. 우리가 진정 승리하기를 원한다면 절제해야 한다. 우리는 절제가 요구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절제하지 못해서 낭패를 보는 인생이 너무 많다. 고난의 계절을 통해서 절제의 모범되시는 예수님을 묵상하며, 닮기를 바란다. 절제는 나를 이기고, 환경을 이기고, 마귀를 이겨 주님께서 기대하시는 승리를 얻게 하는 힘이다. 이를 위해 비판을 절제하여 칭찬의 만찬을 즐기고, 혈기를 절제하여 온유함의 만찬을 즐기고, 질투를 절제하여 사랑의 만찬을 즐기고, 거짓을 절제하여 진실의 만찬을 즐기고, 자기 핑계를 절제하여 책임의 만찬을 즐기고, 불만을 절제하여 감사의 만찬을 즐기고, 이기심을 절제하여 섬김의 만찬을 즐기고, 의심을 절제하여 믿음의 만찬을 즐겨야 한다. 그러면모든 일에 주님의 뜻을 이루고,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약속하신 그 승리를 경험하며 살 수 있게 된다. 절제의 집을 잘 지어서 승리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관련링크
- https://youtu.be/KZNnRIYk0tM 4934회 연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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