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부모가 되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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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agathos 댓글 0건 조회 7,174회 작성일 23-05-07 14:00본문
좋은 부모가 되려면
잠22:6
2023, 5/7. 11:00
좋은 부모의 조건
육아정책 연구소에서 20~50대 성인남녀 1,000명, 이혼한 한 부모 100명, 무자녀 가정 1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다(2017.3.17). 좋은 부모의 첫째 조건과 좋은 부모가 되는 데 걸림돌에 대하여 물었다. 둘 다 가장 많이 나온 답이 ‘경제력’이었다. 돈이 있어야 좋은 부모가 되고, 돈이 없으면 좋은 부모가 되는 데 걸림돌이 된다는 것이다. 왜 우리 사회가 이렇게 돈 중심의 사회가 되었는지, 부모의 조건까지도 돈으로 평가를 하다니 탄식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 역시 같은 생각이다. 하지만 어떤 사회관계망 서비스(SNS)에 올라온 글을 보고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내용이 이렇다.
‘예전에도 가난한 집 아이와는 어울리지 말라고 했어요. 다만 지금처럼 인터넷이 발달되지 않다보니 공론화된 적이 없었을 뿐이죠. 그리고 가난한 집 아이들도 자신이 가난한지 아닌지, 그리고 내가 이런 대접을 받는 것이 맞는지 아닌지 잘 몰랐죠. 남의 집 사정을 들여다 볼 기회가 없으니까요. 그런데 크면 알게 되잖아요. 친구는 어학연수에 뭐에 다니는데 나는 바로 취업해야 하고, 친구는 돈 모아서 명품도 장만할 때 나는 생활비를 집에 내놔야 하고, 친구는 젊음을 즐기면서 차 뽑고 연애할 때 나는 택시는 언감생심 버스비도 아껴야 합니다. 부모가 어느 정도 뒷받침해 줄 여력이 없으면 낳으면 안 되죠. 적어도 자신 이상으로 살게는 해줘야 하잖아요. 아닌가요? 생명에는 책임이 따라요. 낳고 키우기로 했으면 경제적 뒷받침 외에도 정서, 인지적인 뒷받침도 최대한 지원해야죠. 그런데 웃긴 것은 돈이 부족해도 사랑을 주면 된다고 생각해요. 맞아요. 그러면 되는데 돈이 없으면 돈을 벌기 위해 부모는 나가야해요. 그럼 아이들이 보호자 없이 있는 경우가 생지죠. 그냥 적게 벌어 적게 쓰면 된다고요? 그럼 먹고 입는 것 외에 아이에게 경험 쌓아주는 활동이나 여행은 꿈도 못 꾸게 됩니다. 돈이 부족하면 삶이 곤궁해지니 짜증이 나서 부모가 사랑을 베풀 여유가 사라지고, 일을 하러나가면 체력과 시간이 부족해지니 그 또한 여력이 안 되서 사랑 같은 것 챙기지 못해요....돈이 없으면 아이가 뭔가를 심도있게 공부하고 싶어도 뒷받침할 수 없죠. 이것이 사랑만 있어서 될 일인가요? 돈 있는 사람이 사랑 없다고 누가 그래요? 부자는 돈도 있고 사랑도 있어서 아이에게 더 많은 기회를 열어줍니다.....세상 돌아가는 것 보면 돈 없으면 애 못 낳는 것이 맞아 보입니다. 이런 것 다 눈 감고 낳기엔 감당해야 할 리스크가 너무 커요.’
부모의 책임
돈이 전부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경제력이 있어야 아이도 마음 놓고 낳을 수가 있고, 또한 잘 가르칠 수 있다는 것이다. 설득력이 있는 이야기다. 그렇지만 답답하고 마음이 아프다. 심각한 것은 이런 현실에 우리의 자녀가 노출되어 있고, 또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중요한 한 가지가 빠졌다. 그것은 ‘신앙’이다. 우리 인생에서 변하지 않는 상수는 ‘하나님’, 곧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신앙’이다. 진정한 상수인 신앙이 빠지면 세상의 온갖 변수가 상수로 변하여 우리의 삶을 무너지게 만든다. 상수인 신앙이 빠지니까 변수인 돈이 상수가 되어 이런 어려움이 생기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신앙교육의 중요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로 불리는 ‘청교도’라는 기독교 분파가 있다. 개혁주의 신학에 근거한 신앙운동으로 우리 기독교 역사에서 신앙을 위해 모든 것을 걸었던 사람들로 불리고 있다. 이들이 강조했던 것 중에 하나가 ‘신앙교육’이다. 그들이 한 중요한 일이 교회를 세우는 일과 더불어 학교를 세우는 일이었다. 미국에 그 유명한 하바드와 예일대학이 이들에 의해 설립이 되었다. 흔히 본문을 이들의 교육철학이라고 한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이는 신앙인 부모의 책임이자 사명에 대한 말씀이다. 특히 무엇을, 언제부터 누가 누구에게 가르쳐야 할 것을 강조한고 있다.
1. 마땅히 행할 길을 가르치라!
마땅히 행할 길이란 변하지 않는 인생의 상수인데,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리고 이를 요약하면 ‘십계명’이다. 십계명의 정신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22:37~40). 주님은 이를 가리켜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핵심)이라고 하셨다. 여기서 율법과 선지자란 구약성경에 대한 별칭이다. 사실 주님 당시에는 신약성경이 없었으니 성경 전체를 의미한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 인생의 도리, 곧 마땅히 행할 길이다. 이것이 신앙교육의 핵심으로, 부모가 자녀에게 어릴 때부터 가르쳐야 할 중요한 교육내용이다.
이를 잘 실천한 사람들이 유대인이다. 그들이 자녀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는 대개 구약성경이다. 그것을 풀이해 쉬운 이야기로 만들어 들려준다. 성경 이야기 중에 아이들이 좋아하는 것은 신앙영웅에 관한 것이다. 아브라함을 비롯하여 꿈 때문에 형들에 의해 이집트에 노예로 팔려갔지만 그곳에서 총리가 되어 흉년으로부터 가족은 물론 세상을 구한 요셉, 이스라엘을 이끌고 이집트를 탈출한 모세, 다윗 왕과 거인 골리앗의 이야기 등등. 가정뿐만 아니라 유치원에서도 성경 이야기를 곧잘 해준다. 이와 같은 성경을 통한 교육은 아이에게 저절로 신앙교육이 된다. 또 하나, 유대인의 어느 집에 가던지 쉽게 ‘자선’함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 구제를 목적으로 만든 이 자선함을 ‘푸슈케’라고 한다. 유대인은 어릴 때부터 자기의 용돈을 아껴 푸슈케에 넣도록 가르침을 받는다. 그들은 푸슈케에 떨어지는 동전소리를 들으며 누군가가 이 돈으로 도움을 받으리라 확신한다. 아이는 이런 과정을 통하여 자연스럽게 구제의 중요성을 배우며, 구제가 생활이 된다. 푸슈케는 가정뿐 아니라 회당, 학교에서도 쉽게 발견된다. 히브리어에는 ‘구제’나 ‘자선’이란 말이 없다. 대신 ‘의’, ‘정의’, ‘공의’란 뜻으로 번역이 되고 있는 ‘체데카’란 말을 사용한다. 그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구제가 공의의 차원에서 행해져야 할 의무라는 것을 강조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섬기는 것이 공의(정의)를 실천하는 것이란 뜻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아이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되는 것이다.
2. 본을 보이며 반복해서 가르치라.
그렇다면 이를 어떻게 우리 자녀에게 가르칠까? 유명한 쉐마 본문(신6:4~9)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사실 본문은 신6:4~9의 요약이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지니라.’ 마땅히 가르쳐야 할 내용과 함께 가르치는 방법을 상세하게 말씀하고 있다. 가르치는 방법은 두 가지다. 먼저,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는’ 것이다.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말씀을 마음에 새기라는 것은 부모가 먼저 말씀으로 ‘본을 보이라는 것’이다. 슈바이처에 따르면 자녀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본보기’라고 했다. 부모가 모델이 되어 본을 보여주며 자녀로 따라오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부모가 어디를 보느냐는 자녀에게 큰 영향을 미친다. 실개천을 보는 부모, 강을 보는 부모, 바다를 보는 부모, 하늘을 보는 부모, 우주를 보는 부모가 있다. 이들의 자녀는 전혀 다른 인생을 살아갈 것이다. 결국 자녀는 부모가 보는 것을 보고, 부모를 통해 보기 때문이다. 부모는 자녀가 세상을 보는 창이고, 자녀의 거울이다. 그러니 자녀는 부모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부모가 1%만 바뀌어도 자녀는 99% 바뀐다는 말이 있다.
이렇게 본을 보이면서 또한, 부지런히 ‘가르치는’ 것이다.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원문에는 ‘부지런히’라는 부사가 없다. 가르치다는 동사가 강조형이어서 그 의미를 살리기 위해 우리 성경에서 ‘부지런히’라는 말을 삽입한 것이다. 여기서 ‘가르치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동사는 ‘샤난’(שנן)인데, 이 단어의 어원적 의미는 ‘갈아서 날카롭게 하다’는 뜻이다. 여기에는 반복의 의미가 들어있다. 쇠붙이를 가지고 칼을 만들거나 송곳을 만들려면 반복해서 다듬고 갈아야 한다. 그래야 날카로운 칼이 되고, 예리한 송곳이 된다.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일수록 반복적으로 가르칠 필요가 있다. 이것이 고대 이스라엘로부터 내려온 오늘날 유대인의 교육방법이다. 여기에 또 하나의 가르치다는 의미의 동사가 나온다.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강론하다’가 그것이다. 이는 히브리어로 ‘딥베르’(דּבֵּר)라고 하는데, 일상적인 생활에서 나누는 대화를 의미한다. 따라서 일상적인 생활에서 나누는 대화까지도 가르침의 기회로 삼으라는 것이다. 즉, 장소, 시간, 방법 등 모든 기회를 총동원하여 가르치라는 것이다. 부모의 삶 자체가 자녀에게 강력한 교육의 도구가 되도록 하라는 뜻이다. 결국 이 말은 본을 보이면서 반복적으로 가르치라는 것이다.
자녀교육하면 유대인 못지않게 우리나라 사람도 관심이 많고, 열정적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들만큼 효과적이지 못하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변하지 않는 상수보다 늘 변하는 변수에 중점을 두고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부모가 본을 보이며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유치원에, 학교에, 학원에, 교회에 전적으로 위탁하는 것이다. 반면에 유대인은 변하지 않는 상수에 집중을 한다. 그래서 무엇보다 신앙교육, 곧 말씀교육에 집중한다. 그들은 힘들수록, 나라가 위기에 처할수록 신앙교육에 집중했다. 그리고 부모가 주체가 되어 가정에서 본을 보이며 반복적으로 가르친다. 자녀교육의 주체는 국가도 아니고, 심지어 교회도 아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자녀교육의 주체는 바로 가정이고, 부모다. 특히 자녀의 신앙교육은 나중에 할 수없는 일이다. 시간은 되돌릴 수 없다. 나중에 후회하는 가정이 되지 않으려면 어릴 때부터 아이를 신앙으로 교육하는 길밖에 없다. 늘 변하는 변수가 아닌 변하지 않는 상수인 신앙교육에 집중해야 한다. 이것이 좋은 부모가 되는 조건이다. 자녀는 하나님께서 각 가정에 주신 보석의 원석과 같다. 부모는 그 원석을 빛나고 아름다운 보석으로 만들어야 할 책임이 있다.
관련링크
- https://youtu.be/IMWqlQecYVI 4867회 연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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