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의 첫 증인, 막달라 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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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agathos 댓글 0건 조회 7,226회 작성일 23-04-09 13:22본문
부활의 첫 증인, 막달라 마리아
막16:9~11
2023. 4/9. 11:00(부활주일, 성례식)
상처가 깊은 여인, 막달라 마리아
본문에 따르면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 귀신에 걸렸던 여인이다. ‘막달라’는 갈릴리 호수의 서쪽에 있는 작은 마을이다. 주민은 주로 직물업과 염색업에 종사했고, 갈릴리에서 잡은 물고기를 염장(鹽藏) 처리하는 공장도 그곳에 있었다. 그런데 그곳은 비극의 땅이기도 했다. 로마군의 주둔지였기 때문이다. 로마군은 종종 정복민에게 치욕감을 안겨주었다. 그 때문에 분노한 사람들이 집단행동을 하면 질서유지 명목으로 잔인하게 진압했다. 갈릴리 여러 마을이 로마군에 의해 참혹하게 유린당했는데, 막달라도 그런 곳 중 하나다. 마리아는 그런 곳에서 나고 자랐다. 그래서 어쩌면 가까운 사람들이 로마군에 의해 무참히 학살당하는 광경을 보았는지도 모른다. 이런 맥락에서 이화대학의 백소영 교수는 로마군의 학살로 인한 정신적 충격과 상처를 그녀를 괴롭힌 ‘일곱 귀신’으로 해석하였다. 즉, 그 끔찍한 사건으로 인한 마음속에 일고 있는 분노와 두려움으로 해석하였다.
아무튼 그 내용이 무엇이든 ‘일곱 귀신’에 들렸다는 것은 그녀의 상태가 끔찍하고 비참했다는 뜻이다. 귀신이 하나만 들어가도 심각한데, 일곱이니 두 말이 필요 없다. 그리고 이 7은 완전수다. 이는 그녀의 정신과 육체가 철저하게 망가진 상태를 보여준다. 이런 그녀가 주님을 만나 완전히 치유되었다. 주님은 세상의 모든 고통을 안아주신 분이시다. 고통에 몸부림치며 땅바닥을 기듯 살아가는 이들과 함께 땅 바닥을 기어 마침내 하늘로 비상하도록 해주신 분이시다. 이런 주님과의 만남이 그녀의 삶을 바꿔놓았다. 그래서 일곱 귀신에 붙잡혀 땅바닥을 기듯 살아가던 그녀는 주님과 더불어 ‘일어선 사람’ 즉, 부활의 사람이 되었다. 벌레 같은 인생이 나방처럼 빛나는 인생이 된 것이다. 이런 그녀가 부활의 첫 목격자, 첫 증인이 된 것은 당연하다. 이런 사람에게 가장 절실한 것이 부활이기 때문이다.
마리아의 고백
차동엽 신부의 글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의아심으로, 의구심으로, 약간은 질투심으로 ‘예수님께서 왜 그러셨을까?’ ‘왜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녀에게 가장 먼저 나타나셨고, 그녀에게 부활의 증인이 되게 하셨을까?’고 묻는 사람들에게 그녀는 이렇게 대답한다.
‘이유를 알고 싶은가요? 내가 그곳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언제나 그곳에 있었답니다. 주님이 머리 둘 곳조차 없이 고생하며 돌아다니실 때 나는 그곳에 함께 있었지요(눅8:3).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에도 그곳에 있었고(막15:40), 요셉이 주님의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릴 때에도(막15:47), 주님을 무덤에 안치할 때에도 그곳에 있었답니다(마27:61). 안식일 다음날 이른 새벽에도 다른 여인들과 함께 빈 무덤, 그곳에 가 있었습니다(막16:1,2). 베드로와 요한이 다시 숙소로 돌아간 후에도 나는 무덤 밖, 그곳에서 여전히 울면서 서 있었답니다(요20:11). 이유를 알고 싶은가요? 나에게는 그분이 전부였기 때문입니다. 내 사랑이 향할 데도 그분이었고, 내 관심이 쏠릴 데도 그분이었고, 내 시간이 바쳐질 데도 그분이었습니다. 마른 하늘에 날벼락처럼 그분이 체포되었던 그 순간에도, 끝내는 모든 꿈이 날아간 듯이 보였던 그 절망의 순간에도, 여전히 그분은 나의 하늘이었답니다. 까닭을 알고 싶은가요? 그분은 내 일생의 유일한 의미였기 때문입니다.’
이 고백에서 두 가지 중요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하나는, 항상 주님 ‘가까이’, 주님과 ‘함께’ 있는 삶의 중요성이다. 가까이 있는 사람, 함께 있는 사람이 가장 먼저 보게 되고 알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물리적인 거리와 정신적인 거리는 비례한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는 법이다. 신앙생활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이렇게 주님을 가까이 하는 비결은 주님을 나의 전부, 나의 유일한 의미로 여기며 사랑하는 것이다. 막달라 마리아가 유명한 남자 제자들, 베드로나 요한보다 먼저 부활의 목격자가 되고, 첫 증인이 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녀는 일곱 귀신에 붙잡혀 고통의 심연에서 몸부림치며 땅 바닥을 기듯 살고 있었다. 살아있었지만 사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 자신을 주님이 구원해 주신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결심했다. 주님을 자신의 전부로, 유일한 의미로 삼고 사랑하기로! 그 사랑이 주님과의 간격을 좁혀준 것이다. 사랑은 자력과 같다.
이 영광스러운 부활의 날에 마리아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기를 바란다. 그래서 항상 주님 가까이, 주님과 함께, 주님을 나의 전부 나의 유일한 의미로 삼고 살기를 바란다. 이런 사람이 부활의 주님을 날마다 새롭게 만날 수 있고, 부활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고, 부활의 능력과 생명을 경험할 수 있다.
관련링크
- https://youtu.be/trhoQEECXlw 4845회 연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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