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신의 삶Ⅸ, ‘부흥’
페이지 정보
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0,587회 작성일 18-01-07 13:15본문
확신의 삶Ⅸ, ‘부흥’
행2:42~47
2018. 1/7. 11:00
역사는 반복된다. 부흥의 역사도 마찬가지다.
영적 부흥은 성령의 사역이다. 그것도 성령의 주권적인 사역이다. 성령께서 부흥을 위하여 주도적으로 사역을 한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나 어떤 방법에 좌우되지 않고 철저한 성령께서 주도적으로 이끄신 사역이라는 뜻이다. 그러니 부흥에는 왕도가 있을 수가 없다. 그렇지만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처럼 성경을 보면 구속의 역사 역시 비슷한 맥락이 반복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영적 부흥도 마찬가지다.
마틴 로이드 존스(M. L. Jones)의 「부흥 」이라는 책에 보면, 이삭의 부흥을 묘사하는 대목이 나온다. 이삭은 블레셋 사람이 파묻어버린 아버지 아브라함이 팠던 우물을 다시 파는 데서부터 새 인생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삭이 거주하던 땅에 흉년이 들어 잠시 블레셋 지역에서 더부살이 하게 되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복을 주셔서 농사를 지었는데 블레셋 사람들보다 백배의 소출을 얻었다. 이에 시기가 난 블레셋 사람들이 이삭을 자기들 지역에 쫓아냈다. 그래서 이삭은 그랄 지방으로 옮겨 거기에 거하며 우물을 팠는데, 아버지 아브라함이 팠던 우물을 다시 팠다. 로이드 존스가 주목한 것이 바로 이 대목이다. 아브라함이 팠던 우물을 블레셋 사람들이 파묻어버려 사용하지 않고 있었으나 우물 속에는 물이 있었다. 지혜로운 이삭은 우물을 파기 위해 새로운 장소를 찾아다니지 않고, 블레셋 사람이 메워서 현재는 물이 나오지 않지만 아버지 시대에 파놨던 우물을 찾아서 다시 팠다. 그랬더니 그가 판 곳마다 물이 쏟아져 나왔다. 기독교 역사상 수많은 부흥운동이 있었고, 성경에도 많은 부흥운동이 있다. 이삭처럼 우리도 그곳을 찾아가보면 부흥의 물길을 찾을 수가 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초대 예루살렘교회의 부흥현장을 찾아가 보려고 한다. 그곳에서 오늘 우리가 꿈꾸는 부흥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따뜻한 교회
나는 해바라기와 같은 특정 식물만 해를 좋아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거의 모든 식물이 해를 좋아하고 바라본다는 것을 알았다. 물론 여기에 있는 테이블 야자처럼 음지식물이 있지만 이들 역시 빛이 완전히 차단된 곳에서는 못 산다. 동물도 햇빛만 나면 나와서 해를 바라보면서 햇볕을 쬔다. 우리보다 일조량이 적인 북쪽 지방에 가면 이색적인 광경을 볼 수 있다. 햇빛이 좋은 날이면 남녀노소(男女老少)할 것 없이 비키니 차림의 사람들이 공원이든 아파트 입구든 햇볕이 잘 드는 곳이면 어디서든지 일광욕하는 모습을 볼 수가 있다. 사실 모든 식물과 동물에게는 ‘향일성’(向日性, heliotropism), 즉 ‘양지성’(陽地性)이라는 것이 있다. 따뜻한 곳으로 가고 싶은 마음, 따뜻한 곳을 바라보고 싶은 마음, 따뜻한 곳에 있고 싶은 마음, 따뜻한 곳에 살고 싶은 마음, 이것이 식물에게도 동물에게도 다 있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살아있는 사람과 죽은 사람의 차이가 무엇인가? 열(따뜻함)이다. 살아있는 사람은 36.5°의 열이 있고, 죽은 사람은 열이 없다. 살아있는 사람은 따뜻하지만 죽은 사람은 돌처럼 차갑다. 그래서 따뜻하게 살아있는 사람은 남이라도 가까이 하고 싶어 하지만 차갑게 죽은 사람은 가족이라도 두려워서 멀리 한다. 혹시라도 살아 돌아올까 봐 튼튼한 관에 넣어 못질까지 해서 땅 속 깊이 묻고 꼭꼭 밟거나 불에 태워서 먼지처럼 갈아서 바다나 강에다 뿌려버린다. 그러므로 열이 있는 사람, 따뜻함이 있는 사람이 살아있는 사람이다. 살아있는 따뜻한 사람에게는 사람이 모이고, 사람이 따른다. 교회도 살아있는 교회와 죽은 교회가 있다. 살아있는 교회는 기도가 살아있고, 찬양이 살아있고, 말씀이 살아있다. 예배가 살아있고, 성도의 교제가 살아있고, 섬김과 봉사와 헌신이 살아있다. 그래서 따뜻하다. 요즈음처럼 추운 날이면 따뜻한 곳으로, 따뜻한 것을 찾아 사람이 모여든 것처럼 사람도 교회도 따뜻해야 사람이 모인다. 거친 세파에 시달린 사람은 마음의 추위를 녹여줄 마음 따뜻한 사람을 찾고, 추위를 한방에 날려줄 따뜻한 교회를 찾고 있기 때문이다. 본문은 초대 예루살렘교회(이후 ‘초대교회’)의 부흥을 간략하게 소개하고 있는 말씀이다. 초대교회 부흥의 비결을 한 단어로 요약한다면 ‘따뜻함’이다. 이것이 초대교회의 모습이자 부흥의 비결이다. 이와 같은 초대교회의 따뜻함은 다음 세 가지 관계에서 비롯되었다.
주님과의 따뜻한 관계
초대교회는 잘 ‘모이는’ 교회였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44),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46a). 믿는 사람이 날마다 성전과 집에서 모여 함께 있기를 힘썼다는 것이다. 교회가 지난 2천년 동안 숱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든든하게 설 수 있었던 비결이 바로 여기에 있다. 어떤 경우에도 모이기에 힘쓴 것이다. 아무튼 모이면 역사가 일어난다. 모이면 사건이 되고, 역사가 만들어진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이렇게 힘써 모인 목적이다. 무엇을 위해 모이느냐는 것이다. 초대교회는 모여서 세 가지를 했다. 첫째가 친교(교제), 둘째는 기도, 그리고 셋째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이 모두를 한 단어로 표현하여 ‘예배’라고 한다. 예배하기 위해 모이기를 힘썼다는 것이다. 성전에서 모이는 공적 예배든, 집에서 모이는 가정예배든 모이기에 힘썼다. 예배는 주님과의 건강한 관계, 뜨거운 관계를 보여주는 척도다. 예배생활을 보면 영적 상태, 곧 주님과의 관계를 가늠할 수가 있다. 교회의 건강도 예배에 있다. 예배는 교회의 심장이기 때문이다. 신학자 칼 바르트(K. Barth)는 예배를 이렇게 정의했다. ‘예배는 가장 중요하고, 가장 긴급하고, 가장 영광스러운 행위다.’ 주님과의 관계가 뜨거우니까 자연히 성도도 교회도 뜨겁게 된 것이다. 심장이 뜨거우니까 온 몸도 뜨거운 것이다. 그러니까 영적 부흥이 뜨겁게 일어나게 된 것이다.
목회자와의 따뜻한 관계
칼 바르트의 일화다. 어느 주일에 바르트가 제자가 목회하고 있는 교회의 주일예배에 참석했다. 이 사실을 모르고 있던 제자 목사는 설교 중에 당대 최고의 신학자 바르트를 발견하고는 주눅이 들어 설교를 할 수가 없었다. 말 그대로 횡설수설하다가 설교를 마쳤다. 예배 후에 바르트를 찾아가 인사를 했다. 그러자 바르트가 웃으며 말했다. ‘목사님, 은혜 많이 받았습니다.’ 이 말이 제자 목사를 더욱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제자 목사가 말했다. ‘제가 횡설수설하는 것 아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까?’ 바르트가 말했다. ‘목사님은 나를 훌륭한 신학자로 알고 있습니까? 나는 목사님을 하나님의 사자로 알고 말씀을 들었습니다.’ 목회자가 가져야 할 자세, 목회자를 바라보는 성도의 태도에 대한 좋은 가르침이라 생각한다. 적어도 강단에서 예배를 인도하고 말씀을 선포하는 동안 목회자는 자신이 하나님의 사자라는 생각을 가지고 누구 앞에서도 당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도 역시 목회자가 강단에서 예배를 인도하고 말씀을 선포하는 순간만큼은 하나님의 사자로 알고 존중하고 순종하라는 것이다.
이 한 가지만 잘 지켜져도 목회자와의 좋은 관계, 따뜻한 관계를 보장받을 수 있다. 적어도 목회자가 강단에서 예배를 인도하고 말씀을 선포하는 동안은 하나님의 사자로 알고 존중하고 순종하는 것이다. 이것은 목회자를 위해서가 아니다. 듣는 자신을 위해서이고, 또한 신앙공동체인 교회를 위해서다. 많은 사람이 오늘날 교회부흥의 가장 큰 걸림돌로 목회자와의 갈등을 꼽는다. 화목이 형통의 원리다. 가장 화목해야할 목회자와의 관계가 불편해서야 되는 일이 있겠는가? 초대교회가 부흥하는 따뜻한 교회가 될 수 있었던 두 번째 비결은 사도들과의 좋은 관계였다.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42). 앞에서 소개한 그들의 따뜻한 예배행위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이뤄졌다는 뜻이다. 사도와 초대교회 성도 사이의 아름다운 관계를 보여주는 말씀이다. 이런 아름다운 관계가 초대교회를 살아있는 따뜻한 교회로 만든 것이다.
성도 간의 따뜻한 관계
예나 지금이나 사람의 마음을 날카롭게 하는 것이 물질이다. 다른 것은 다 참아도 물질적인 손실에는 못 참는다(利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