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는 주님을 춤추시게 하는 일이다.
페이지 정보
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0,556회 작성일 18-03-18 12:34본문
전도는 주님을 춤추시게 하는 일이다.
눅15:8~10
2018. 3/18. 11:00
또 다른 모래위에 발자국 이야기
아마 ‘모래위에 발자국’이란 이야기를 잘 알 것이다. 이 시간에는 이와 비슷한 또 하나의 모래위에 발자국 이야기를 소개하려고 한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모래 위를 거닐고 있었다. 그런데 주님의 발자국은 일정한 데 자기 발자국은 지그재그 모양으로 어지럽기 짝이 없었다. 출발했다가 이내 멈추고, 이쪽으로 가는가 싶더니 어느 새 다시 저쪽으로 방향을 바꾸고, 그리고는 다시 원래자리로 돌아오고, 말 그대로 엉망진창이었다. 그런데 한참을 어지럽게 가던 자기 발자국이 어느 순간부터 주님 발자국을 닮아가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얼마 후에는 주님 발자국 옆에서 나란히 가기 시작했다. 드디어 주님과 동행을 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주님 옆에서 나란히 걸을 수 있게 된 것도 감격스러운데, 얼마 안가서는 더 흥미로운 일이 일어났다. 자기 발자국이 아예 주님 발자국 안으로 들어가 그 안에다 자국을 남긴 것이다. 상상해 보라! 주님의 큰 발자국 안에 자기 발자국이 앙증맞게 찍히는 모습을. 이것은 주님과 하나가 된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렇게 얼마를 가다가 또 다른 변화가 일어났다. 주님 발자국 안에 조그맣게 찍히던 자기 발자국이 점점 커지더니 나중에는 주님 발자국과 똑같아지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하나의 발자국만이 모래 위에 찍히게 되었다. 주님과 온전하게 하나가 된 것이다. 이렇게 주님과 하나가 된 기쁨을 만끽하고 있는데, 갑자기 자기 발자국이 뒤로 쳐지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상태가 처음보다 훨씬 더 심각해졌다. 온통 지그재그에다 출발했다가는 멈추고, 발뒤꿈치로 모래를 꽉꽉 찍는 등 어지럽기 짝이 없었다. 행복했던 꿈이 너무나 어처구니없게 끝나버린 것 같았다. 그래서 그는 슬픈 표정으로 주님께 물었다. ‘주님, 처음 제 발자국이 엉망인 것은 이해하겠습니다. 그때 주님을 갓 영접하고 막 주님을 배우기 시작한 때였으니까요. 이런 저에게 주님께서 주님과 함께 걷는 법을 가르쳐주셨는데, 이렇게 제 발자국이 주님 발자국에서 떨어져 나와 처음보다 더 어지러운 자국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다시 퇴보하기라도 한 것일까요?’ 그러자 주님은 잠시 아무 말씀도 않으시더니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씀하셨다. “몰랐니? 그것은 우리가 함께 춤춘 거란다!”
전도는 최고의 효도다.
놀라운 반전이다. 처음엔 주님을 따르는데 서툴러서 발자국이 어지러웠고, 나중에는 주님과 함께 춤을 추다보니 발자국이 어지럽게 찍히게 된 것이다. 이 발자국 이야기에 비추어 여러분은 주님을 따르는데 어느 단계인 것 같은가? 우리 모두 주님과 덩실덩실 춤을 추는 단계였으면 좋겠다. 아니 주님과 춤은 못 추더라도 주님을 춤추게 하는 삶이었으면 좋겠다.
흔히 주님 섬기는 것을 효도(孝道)에 비유한다. 소학(小學)에서 효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다. ‘신체발부 수지부모 불감훼손 효지시야, 입신행도 양명어후세 이현부모 효지종야.’(身體髮膚는 受之父母니 不敢毁傷이 孝之始也요, 立身行道 揚名於後世하여 以顯父母면 孝之終也라).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이 몸을 잘 관리하고 가꾸는 것이 효의 시작이고, 올곧게 잘 살아서 부모의 이름을 빛나게 하는 것이 효의 마침이라는 뜻이다. 부모의 이름을 빛나게 한다는 것은 곧 부모를 기쁘게 하고, 즐겁게 하고, 춤추게 하는 일이다. 그러니 최고의 효는 부모를 기뻐서 웃게 하고, 기뻐서 노래하게 하고, 기뻐서 춤추게 하는 것이다. 주님께 효를 다하는 성도 또한 이와 같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주님을 기뻐서 춤추시게(웃으시게, 노래하시게) 할 수 있을까? 그것은 바로 전도다. ‘예수님 기뻐 노래하시리 잃어버린 영혼 돌아올 때, 예수님 기뻐 춤추시리 잃어버린 영혼 돌아올 때’ 언제 주님께서 기뻐 노래하시는가? 언제 주님께서 기뻐 춤추시는가? 그렇다. ‘잃어버린 영혼 돌아올 때!’ 우리가 나가서 잃어버린 영혼을 찾아 돌아올 때, 잃어버린 영혼에게 생명의 복음을 전하여 주님께로 인도할 때, 주님께서 기뻐 노래하시고, 주님께서 기뻐 춤추시게 된다. 그러므로 전도야말로 주님께 대한 최고의 효도다.
나와 함께 즐기자!
왜 전도가 주님을 기뻐서 웃으시게 하고, 기뻐서 노래하시게 하고, 기뻐서 춤추시게 하는지 본문을 통해 확인할 수가 있다. 계속 전도설교를 하다 보니 눅15장을 몇 번 언급하였는데, 여기에는 세 개의 ‘잃어버린 것을 찾는’ 비유가 나온다. 그런데 이 세 비유가 공통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이 있다. 하나는 ①잃어버린 것을 열심히 찾는 모습이다(4,8,20). 다른 하나는 ②잃어버린 것을 찾았을 때 보인 반응이다. 세 비유 모두 과도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6,9,22~24). 양과 사람은 그렇다 손치더라도 본문은 너무 지나치다는 생각이 든다. 생각해 보라! 동전 한 닢이 얼마나 대단하다고 잃어버린 동전을 찾았다고 친구와 이웃까지 초청하여 잔치까지 벌인단 말인가! “또 찾아낸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아내었노라 하리라.”(9). 아들에 대한 비유도 마찬가지다. 부모에게 그렇게 욕을 보이고 나간 자식인데 마치 큰 공을 세우고 돌아온 개선장군처럼 맞이하여 잔치를 벌였다. 밭에서 돌아온 큰 아들이 화를 내며 집에 들어가지 않은 이유가 이 때문이다(28~30). 나라도 그랬을 것이다. 아니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을 것이다. 사실 여기에 이 비유들의 중요한 메시지가 있다.
주님께서 찾은 기쁨을 이렇게 과장하여 표현하신 이유가 있다. 당시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사회적/종교적 약자(세리와 죄인, 창기 등)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아주면서 주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주님께서 이 비유들을 말씀하신 배경이 1,2절이다(같이 읽음). 특히 2절에서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수군거림에 대한 주님의 대답이 이 세 비유다. 사실 세리와 죄인은 양의 무리를 이탈한 어긋난 양과 같고, 부모에게 모욕을 안겨주고 집을 나가 부모의 재산을 모두 탕진해버린 둘째 아들과 같다. 그러니 그들은 동전 한 닢의 가치도 없는 존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그들을 귀하게 여기신다는 것이다. 주님은 그 동전 한 닢의 가치도 없는 존재를 찾기 위해 온 집안에 불을 밝히고 샅샅이 쓰면서 찾아내기까지 부지런히 찾으셨다. 찾았을 때 너무 기뻐서 친구와 이웃을 초청하여 큰 잔치를 베풀어 함께 기뻐하였다. 나는 설교를 준비하면서 이 동전 한 닢이 바로 나라는 사실에 너무 감사했고, 또한 감격스러웠다(@#$%). 왜 그랬을까? 그들 역시 반드시 찾아내야 할 존재이고, 회복되어야 할 존재이기 때문이다. 또한 주님은 그가 어떤 존재이든 다시 찾고, 회복하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신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다. 그래서 이런 과장법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우린 여기서 주님이 정말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주님을 웃으시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주님을 춤추시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알 수 있다. 그것은 잃어버린 것을 다시 찾아내는 것이고, 잃어버린 것을 다시 회복하는 것이다. 이것이 전도다. 이 전도가 주님을 기뻐서 춤추시게 한다.
모두를 춤추게 하는 복음
윌리엄 틴데일(w. Tyndale)은 복음을 이렇게 정의했다. ‘복음은 상처 입은 자를 기쁘게 하고, 찬송하게 하고, 춤추게 하고, 기쁨으로 뛰놀게 한다.’ 복음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정의다. 복음은 상처 입은 영혼을 기쁨으로 뛰놀게 한다. 기쁨으로 춤추게 하는 것이 복음이다. 복음은 모두에게 좋은 소식이고, 기쁜 소식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소식을 듣는 사람마다 기뻐서 노래하고, 기뻐서 춤추고, 기뻐서 뛰놀게 되는 것이다. 지난 주일에도 말했지만 지금 우리는 기쁨을 잃어버린 회색인간(灰色人間)이 넘치고 있는 기쁨을 잃어버린 시대를 살고 있다. 그래서 주님은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