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는 마음이다. ‘보답하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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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agathos 댓글 0건 조회 10,600회 작성일 18-02-11 13:05본문
전도는 마음이다. ‘보답하는 마음’
시116:1~19
2018. 2/11. 11:00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다.
두 천사가 어느 부잣집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부자는 좋은 객실 대신 차갑고 비좁은 지하방을 두 천사에게 내주었다. 그들이 차갑고 비좁은 지하방에 누워 잠들 무렵, 늙은 천사가 벽에 구멍이 난 것을 발견했다. 그는 그 구멍을 막아주었다. 젊은 천사가 말했다. ‘아니, 이렇게 우리를 박대한 부자에게 그런 선의까지 베풀 필요가 있습니까?’ 그러자 늙은 천사는 웃으며 대답했다.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야.’ 아무튼 젊은 천사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두 천사는 그 다음날엔 가난한 농부 집에서 묵게 되었다. 농부는 그들을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부족한 음식이지만 정성껏 대접을 하고, 안방까지 내주며 편히 쉬도록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이 밝았는데 농부 부부가 슬피 울고 있었다. 생계수단이었던 하나밖에 없는 암소가 그만 죽었기 때문이다. 이를 본 젊은 천사가 늙은 천사에게 따졌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도록 내버려둘 수 있습니까? 부자는 모든 걸 가졌는데도 도와주더니 가난한 농부의 암소는 죽도록 놔둘 수 있단 말입니까?’ 늙은 천사가 말했다. ‘부잣집 지하실에서 잘 때 나는 벽 속에 금덩이가 있는 것을 발견했지. 나는 부자가 그 금을 찾지 못하도록 구멍을 막은 거야. 사실 어젯밤에 죽음의 천사가 농부의 아내를 데려가려고 왔었네. 그래서 내가 암소를 대신 데려가라고 했지. 그러니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닐세.’
겉으로 드러난 것은 늙은 천사가 부자를 도운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가난한 농부였다. 이 이야기처럼 살다보면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많이 만난다. 그래서 억울하고 답답한 마음이 날선 칼이 되어 자신과 주변에 상처를 주기도 한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다. 관계를 잘한 사람은 보이는 것으로만 상대방을 평가하지 않는다. 문학작품을 비롯한 예술품을 감상할 때도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이면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성경을 읽을 때도 보이는 문자에만 집착해서는 안된다. 문자 너머에 감춰진 주님의 뜻(마음, 손길)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우리에게 이런 마음, 이런 눈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오해가 이해가 되고, 위기가 기회가 될 것이다. 절망을 소망으로 바꿀 수가 있을 것이다. 더 이상 자신과 주변에 상처를 주는 날선 칼이 아니라 따뜻하게 해주는 손난로가 될 것이다. 신앙생활에서 영적 훈련이란 사건이나 현상의 배후에서 역사하시는 주님의 손길을 찾고 알아가는 과정이다. 이를 볼 수 있는 눈이 열리고, 깨닫는 마음을 가진 사람을 영적인 사람이라고 한다. 이런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를 잃지 않게 되고, 그의 삶은 보은의식(報恩意識)으로 충만하게 된다.
삶의 자세가 중요하다.
사실보다 중요한 것이 태도라고 한다(Karl Menninger). 삶의 태도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뜻이다. 그런데 삶의 태도는 사람마다 다르다. 하지만 우리 성도가 가져야할 삶의 태도가 있다. 그것은 감사와 보은의식이다. 모든 일에 감사하면서 보답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성숙하고 건강한 성도의 태도다. 성경에 나온 경건한 인물들은 모두 이렇게 살았다. 신약성경에서 대표적인 인물이 사도바울이라면, 구약에서는 아마 다윗일 것이다. 다윗은 베풀어주신 모든 은혜에 감사하면서 어떻게 이 은혜에 보답하며 살 것인가를 숙제처럼 생각하며 살았다. 오늘 본문에도 이와 같은 다윗의 마음이 잘 드러나고 있다
본문의 정확한 저자는 모른다. 하지만 칼빈을 비롯한 많은 학자가 다윗이라고 말하고 있다. 다윗이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궁에서 쫓겨나 죽을 위기까지 몰렸으나 하나님의 은혜로 압살롬의 세력을 꺾고 환궁하여 지은 시라고 한다. 이러한 배경을 가지고 본문을 읽으면 다윗이 참으로 전천후감사의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아들이 반역을 일으켜 자신을 권좌에서 쫓아낸 것도 모자라 죽이겠다고 쫓아다닐 때 이리저리 쫓겨 다녀야 하는 그의 심정, 반역세력을 물리치고 다시 왕궁으로 돌아왔지만 그것은 아들을 죽이고 되찾은 것이다. 그러니 아들의 비참한 죽음을 받아들여야 하는 그의 심정이 얼마나 참담했을까? 이런 상황에서도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만 생각하고, 하나님의 은혜에 집중했다. 그래서 이런 감동적인 감사의 시를 남기게 된 것이다.
무엇으로 보답할까?
본문은 유대인이 즐겨 부르는 감사의 시다. 그들은 축제 때마다, 특히 유월절에 이 시를 한 목소리로 노래했다. 본문은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앞부분(1~11)은 과거의 경험 속에서 자신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노래하고 있다. 그러면서 세 가지를 결심한다. 하나는 ①하나님을 사랑하겠다(1)는 결심이고, 다른 하나는 ②평생에 기도하겠다(2)는 결심, 마지막은 ③사는 동안 하나님 앞에서 행하겠다(9)는 결심이다. 그리고 뒷부분(12~19)은 하나님께 은혜를 받은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노래하고 있다. 그것은 베풀어주신 은혜에 보답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12)는 것이다. 특히 13절 이후에 보답의 의미를 연상하게 하는 단어가 반복해서 나오고 있다. ‘구원의 잔을 들고, 이름을 부르며’(13), ‘서원을 갚으리로다.’(14). ‘감사제를 드리고, 이름을 부르리이다.’(17). ‘서원한 것을 모든 백성이 보는 앞에서 지키리로다.’(18,19). 표현만 달리했을 뿐 받은 은혜에 보답하며 살겠다는 뜻이다. 이것이 은혜 받은 성도의 올바른 태도이고, 반응이다.
다윗의 생애를 보면 다윗도 못나고 못된 짓을 많이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다윗을 마음에 들어 하셨다(행13:22). 그 이유는 받은 은혜에 대하여 어떻게든지 보답하고자 하는 기특한 마음 때문이다. 12절 말씀이 이러한 다윗의 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여호와께 무엇으로 보답할까!” 한량이 없으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시적인 표현으로 베풀어주신 은혜가 너무 커서 인간적인 그 어떤 것으로도 갚을 수 없다는 탄식이다. 그렇다. 베풀어주신 은혜에 우리는 그 무엇으로도 갚을 길이 없다. 동시에 베풀어주신 은혜에 무엇으로든지 어떻게든지 보답하겠다는 의지적인 결단이다. 13절 이하의 내용이 그것이다(이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줄임). 하나님께서 다윗을 소중히 보시는 것이 바로 이 점이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도 이것이다. 사실 우리는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주님의 은혜를 그 무엇으로도 보답할 수가 없다. 하지만 다윗처럼 보답하고자 하는 마음가짐을 가지고 일상생활을 하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다. 찬양을 드릴 때도, 기도를 드릴 때도, 헌금을 드릴 때도, 예배를 드리고 몸된 교회와 지체를 섬길 때도 이런 마음가짐을 갖는 것이다. 차량운행을 하고, 청소를 하고, 부엌에서 밥을 하고 설거지를 할 때도, 교사로 아이들을 가르치고, 구역장과 권찰로 구역을 돌볼 때도 마찬가지다. 이렇게라도 주님의 빚을 갚겠다는 마음, 주님의 은혜에 보답하겠다는 심정을 갖는 것이다. 부모가 그렇듯이 주님도 마찬가지다. 큰 것, 대단한 것 바라지 않는다. 그저 이런 마음가짐을 바라신다.
지금까지 전도에 대한 설교를 하고 있는데, 전도 역시 이와 같은 맥락에서 생각할 수 있다. 주님은 전도를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고, 당신의 양식이라고 하셨다.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4:34). 그리고 마가복음에서는 주님께서 전도를 위하여 오셨고(1:38), 누가복음에서는 전도를 위하여 보내심을 받았다(4:48)고 하셨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보내심을 받으신) 이유가 전도라는 것이다. 또한 주님께서 제자를 부르시고(마4:19), 훈련하여 파송하시고(마10:5~), 마지막으로 위대한 사명으로 주신 것(28:18~20)도 전도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의 빚을 갚기를 원한다면, 베풀어주신 주님의 은혜에 보답하기를 원한다면 주님께서 그토록 소중히 여기셨던 전도의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다. 잃어버린 영혼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것이 주님의 사랑과 은혜에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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