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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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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1,824회 작성일 16-10-09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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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가 좋다

시133:1~3

2016. 10/9. 11:00(상사종합체육관: 야외예배)

더불어 함께

작은 연못에 큰 물고기와 작은 물고기 두 마리가 살고 있었다. 그런데 먹이가 생기면 큰 물고기가 독차지를 했다. 작은 물고기는 몸도 약하고 힘도 없어서 도무지 큰 물고기를 당할 수가 없다. 하는 수 없이 작은 물고기는 큰 물고기에게 사정사정하면서 자기에게도 먹을 것을 나눠달라고 부탁했지만 큰 물고기는 막무가내였다. 욕심 많은 큰 물고기는 자기만 잘 먹고 잘 살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굶주림에 시달리던 작은 물고기가 독초를 먹고 죽었다. 귀찮게 굴던 물고기가 없어지자 큰 물고기는 신이 났다. 이제 연못을 혼자서 차지하게 되었으니 행복하리라 생각했다. 과연 그랬을까? 시간이 지나자 죽은 작은 물고기의 시체가 물 위로 떠올랐다. 그리고 썩기 시작했다. 시체가 썩자 연못의 물도 흐려지고, 연못 전체가 썩기 시작했다. 물이 썩으니까 결국 큰 물고기도 더 이상 살지 못하고 죽고 말았다. 더불어 사는 지혜를 몰랐던 큰 물고기는 그렇게 종말을 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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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 역시 더불어 함께의 가치가 심각하게 도전을 받고 있는 시대를 살고 있다. 하나의 증거로 우리 사회에 1인 가구가 급속도로 증가하고 있는 것을 그 이유로 꼽을 수 있다. 작년(2015년도) 기준, 우리나라 1인 가구는 약 510만 가구로 전체 가구의 27.5%에 달한다고 한다. 10명 당 3명이 혼자 산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에 따라 ‘혼밥’, ‘혼술’, ‘혼영’, ‘혼창’, ‘혼행’, ‘혼놀’, ‘혼캠’ 등 여러 신조어가 생겨나고 있다. 또한 여러 가지 사회적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이런 흐름은 ‘함께’의 가치와 중요성에 심각한 도전이 아닐 수 없다. 그렇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인간은 고독한 ‘’이 아니라 함께 어우러져 사는 ‘광장’이라는 사실이다. 사람 ‘’(人)이라는 한자를 풀이해 보면, 두 사람이 기대어 있는 모습이다. 사람이기 때문에 서로 기대어 살고, 기대어 살 수밖에 없는 존재가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 말은 사람은 서로에게 의존되어 있다는 뜻이다. 남편은 아내에게 아내는 남편에게, 부모는 자식에게 자식은 부모에게, 서로가 서로에게 의존되어 있다. 이것은 사람만이 아니다. 사실 모든 생명은 서로 의존되어 있다. 산 정상에 우뚝 서 있는 나무가 얼핏 홀로 서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온갖 생명과 연결이 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서로 돕는 배필로서의 인간

또한 이 더불어 함께는 창조의 원리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으로 창조하셨다. 창조의 구조도 그렇고, 내용도 그렇다(창1:).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창조하신 모든 것에 대하여 ‘좋다’(טוב)고 하셨다. 그런데 딱 한 가지 ‘좋지 않다’(לו טוב)고 하신 것이 있다. 그것은 아담이 홀로 있는 것이다. 그래서 여자, 곧 하와를 아담에게 ‘돕는 배필’로 창조해 주셨다(창2:18). 이것이 하나님께서 여자를 창조하신 이유, 다시 말하면 나 아닌 다른 사람이 존재하게 된 이유다. 나 홀로 있는 것이 좋지 않아 다른 사람을 돕는 자로 붙여주신 것이다. 우린 여기서 하나님께서도 ‘혼자가 아니라 더불어 함께’를 좋아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돕는 배필은 여자만 아니다. 사람은 서로 돕는 배필이다. 남자는 여자에게 여자는 남자에게, 남편은 아내에게 아내는 남편에게, 자녀는 부모에게 부모는 자녀에게, 서로가 서로에게 돕는 배필이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보혜사’(Helper)라고 하셨고, 성령님 역시 ‘보혜사’라고 하셨다. 예수님도 성령님도 우리를 ‘돕는 배필’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또한 돕는 배필이 되어야 한다. 돕는 배필이 되려면 서로 함께해야 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함께, 그래서 서로 마주하는 것으로서의 도움이 되는 것이다(‘돕는 배필’의 문자적인 의미는 ‘그와 마주한 것으로서의 도움’이란 뜻). 여기에 아름다운이 있고, 감동과 감격이 있는 것이다.

 

함께 한다는 것

본문은 함께의 가치와 중요성을 잘 보여주고 있는 말씀이다. 본문은 백성이 함께 어우러진 모습에 감동하여 다윗이 쓴 시다. 표제(‘성전에 올라가는 노래’)처럼 본문은 절기를 지키기 위해 각지에서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모였다. 같은 목적과 비전으로 하나되어(‘연합하여’) 같은 장소에서 함께 머무르게 된(‘동거하다’) 것이다. 그것은 절기축제를 통해서 베풀어주신 은혜에 감사하며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강력한 민족의식을 갖도록 교제를 나누기 위해서다. 이렇게 함께 드리는 거국적인 연합예배, 강력한 선민의식을 갖게 하는 민족적인 교제의 모습에 다윗은 크게 감동을 했다. 1절에 두 번의 감탄사가 나오고 있는데, 이러한 다윗의 감정을 잘 나타내고 있다.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1).

 

얼마나 선한가!

하나님만 바라보며 하나님께 예배하고, 하나님 안에서 교제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모인 백성의 모습에 대한 다윗의 첫 번째 감정은 ‘얼마나 선한가!’(מה טוב) 라는 감탄이다. 여기서 선하다는 뜻의 히브리어 ‘토브’(טוב)는 하나님께 천지를 창조하신 다음 당신이 지으신 창조물을 보시고 외치셨던 말씀이다. ‘좋다.’(창1:4,10,12,18,21,25), 혹은 ‘심히 좋다.’(창1:31)가 토브다. 이것이 성경에 나온 최초 하나님의 반응이다. 토브는 기분이 너무 좋아서 어쩔 줄 모를 정도로 행복할 때, 감동하여 감탄할 때 표현하는 단어다. 이는 결핍이나 모자람이 없는 충만한 상태, 무엇을 보충하거나 첨가할 필요가 전혀 없는 완전(벽)한 상태를 의미한다. 그래서 토브를 도덕적으로 ‘완전하다’(perfect), 신앙(종교)적으로 하나님의 마음에 쏙 들어서 ‘만족하다’(satisfy), 미적으로 ‘아름답다’(beautiful)는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본문에서 토브는 미적, 혹은 도덕적 의미보다는 신앙적 의미가 더 강하다. 다윗은 본문에서 예배를 위한, 교제를 위한 성도의 연합이 얼마나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하게 해드리고, 만족스럽게 해드리는 일인가고 외치고 있는 것이다.

 

얼마나 아름다운가!

하나님만 바라보며 하나님께 예배하고, 하나님 안에서 교제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모인 백성의 모습에 대한 다윗의 두 번째 감정이다. ‘얼마나 아름다운가!’(מה נעים) 라는 감탄이다. 여기서 아름답다는 히브리어로 ‘나임’(נעים)이라고 한다. 그런데 우리 성경과 달리, 영어성경은 이 단어를 ‘즐겁다’, ‘상쾌하다’는 뜻을 가진 ‘pleasant’로 번역하고 있다. 이것이 우리 성경보다 원문에 충실한 번역이다. 연합은 선할 뿐만 아니라, 즐겁고 상쾌한(pleasant) 일이다. 물론 홀로 있는 것도 그 나름의 즐거움이 있고, 기쁨도 있지만 실제로 더불어 함께하는 곳에는 즐겁고 유쾌한 일이 더 많다. 그리고 보는 사람에게도 더 많은 즐거움을 준다. 그것도 한 방향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모인 곳은 더욱 그렇다. 축구 경기장이나 야구 경기장에서 자신의 편을 응원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을 상상하면 금방 이해할 수가 있다. 말 그대로 그곳은 기쁨의 도가니, 즐거움의 도가니, 열광의 도가니다. 모인 그들도 즐겁지만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사람도 즐겁고 상쾌하다. 본문에서 다윗은 하나님을 참으로 즐겁게 하는 일, 나아가서 사람을 유쾌하게 하는 일이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성도가 예배하기 위해 함께 모이고, 교제하기 위해 함께 모이는 것이다.

 

힘써 모이자!

다윗이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서로 교제하기 위해 모인 백성들에게 보여준 이 모습에서 우린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예배와 교제에 대한 다윗의 태도다. 무엇을 보고 좋아하고, 무엇에 감동하는가를 보면 그가 어떤 사람인가를 알 수가 있다. 다윗은 함께 예배드리는 모습, 서로 교제하는 모습을 좋아하고, 그 모습에 감동을 했다. 이것은 다윗이 예배와 교제를 소중히 여기는 믿음의 사람이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그러니까 이런 감동과 감탄을 하게 된 것이다.

 

다른 하나는 예배와 교제의 중요성이다. 예배를 위한 성도의 모임, 교제를 위한 성도의 모임을 창조의 사건에서 사용했던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은 예배와 교제가 창조의 사건만큼 소중하다는 뜻이다. 또한 이미 말씀을 드린 대로 예배와 교제를 위한 우리의 모임이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하게 해드리고, 만족스럽게 해드리는 일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참으로 즐겁게 해드리는 일이라는 것이다. 지금 바로, 우리의 이 모임이 그렇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의 이 모임을 보시고 ‘얼마나 선하고, 얼마나 아름다운가!’고 감탄하고 계신다. 철이든 자녀는 부모의 마음을 잘 안다. 부모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기뻐하는지, 무엇을 싫어하고, 무엇을 안타까워하는지를 안다. 그래서 그것을 가리게 된다. 철이든 성도, 성숙한 성도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하나님께서 좋아하시고, 하나님께서 흡족해 하시는 것, 하나님께서 즐거워하시는 것을 찾아서 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 모이고, 서로 교제하기 위해 모여서 더불어 함께하는 것이다. 오늘 이 소중한 자리에 함께 하신 여러분을 축복하며, 앞으로도 이 좋은 일에 더욱 힘쓸 수 있기를 바란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10:2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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