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즉 너는 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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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2,104회 작성일 16-09-04 12:50본문
그런즉 너는 알라!
신7:6~11
2016. 9/4. 11:00
정체성(identity)은 인생의 엔진이다.
1950년대, 미국 인디언 보호구역에서 유난히 마약과 알코올 중독, 폭력문제가 심각했다. 그 원인을 밝히기 위해 심리학자 에릭슨(E. H. Erikson)을 중심으로 한 연구팀이 인디언 보호구역으로 들어갔다. 에릭슨은 그곳에서 묘한 상황에 처한 인디언 아이들을 발견했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백인교사의 가르침을 받았는데, 교사는 그들에게 ‘인디언 짓’을 한다며 꾸짖었다. 반면 그들이 집에 가면 부모가 ‘백인같이 군다.’며 야단을 쳤다. 그 사이에서 그들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허둥댔다. 학교에서든 집에서든 야단을 맞지 않으려면 끊임없이 자신을 부정해야만 했다. 인디언이든 백인이든 어떤 색깔도 드러내지 말아야 했다. 그러는 중에 아이들은 서서히 자신감을 잃어갔고, 자기 존재를 지워버리고 말았다.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것이다. 정체성을 잃어버린 아이들에게 남은 것은 무력감과 좌절감뿐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마약과 알코올에 물들어갔고, 폭력에 의존하게 되었던 것이다. 정체성은 배의 엔진과도 같다. 아무리 큰 배도 엔진이 멈추면 작은 파도에도 떠밀리게 되고, 결국은 좌초되고 만다. 그렇지만 엔진을 갖춘 배는 사나운 비바람과 파도에도 가라앉지 않고 자기가 나아갈 방향으로 나아간다. 정체성이 확고한 사람도 마찬가지다.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의 ‘정체성’에 대한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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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들지 않으려면
지금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조상에게 약속하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지 직전이다. 그런데 가나안은 광야와 전혀 다른 곳이다. 광야는 비록 거칠고 힘든 곳이긴 하지만 하나님께서 직접 그들을 먹이시고, 마시게 하시고,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보호하시고, 인도하신 곳, 그리고 지도자 모세가 함께 하고 있는 곳이다. 그들은 그저 따르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나 가나안에서는 만나도 그치고, 구름기둥과 불기둥도 사라지고, 모세도 없다. 모든 것을 스스로 해결해야만 한다. 살게 될 장소도, 집도, 음식도,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것도, 모두 그들 스스로 해결해야만 한다. 게다가 가나안은 그들이 경험해 보지 못했던 선진문명과 문화, 특히 종교문화가 발달한 곳이다. 오늘날 말로 말하면 다원주의가 판을 치는 다원주의 세상이다. 신명기는 이런 상황에 직면한 백성을 정신적/신앙적으로 무장시키기 위한 책이다. 신명기는 모세의 설교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통해 주신 말씀을 정리해서 다시 한 번 백성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핵심은 ‘유일하신 한 분 하나님만 사랑하라!’(9)는 것이다. 하나님 유일(唯一)신앙을 지키라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다원주의 세상에서 하나님만 사랑하고, 하나님만 섬기는 유일 신앙을 가질 수 있을까? 소극적으로는, 가나안 문화에 물들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본문 앞부분에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해야 할 세 가지를 명령하고 있다. ①원주민을 모두 진멸하라(1,2). ②그들과 어떤 조약이나 교류(특히 혼인)도 하지 말라(3,4), ③그들이 섬기는 신들과 그것을 섬기는 장소를 모두 파괴하라(5)는 것이다. 그래야만 유일하신 한 분 하나님만 사랑하고 섬길 수가 있다. 적극적으로는, 정신적/신앙적으로 무장하는 것이다. 그것이 오늘 본문이고, 6절에 잘 나타나고 있다.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너는 하나님의 성민이라!
여기에 그들이 알아야 할 것,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나온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성민’이라는 것, 곧 ‘하나님께서 만민 중에서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성민’(聖民)이란 히브리어로 ‘암 카도쉬’(עם קדוש)이다. ‘구별된 백성’(separated people)이란 뜻이다. 세상, 특히 가나안 사람들로부터 구별된 백성, 그리고 그들이 섬기는 신들과 구별된 유일하신 한 분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의 ‘정체성’(identity)이다. 이것을 분명히 가지라는 것이다. 그래야 앞에서 말한 세 가지 명령을 수행하여 가난안의 문화와 그들이 섬기는 종교에 물들지 않을 수 있고, 하나님만을 유일하신 한 분으로 사랑하고 섬길 수가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임종을 목전에 둔 모세가 40일 동안 자기 백성에게 설교로 가르치고, 노래로 만들어 외우도록 했던 것이다. 그리고 광야 40년도 알고 보면 이집트 생활에서 몸에 밴 ‘노예의식’, 곧 ‘메뚜기 의식’을 뽑아내고, ‘성민의식’(정체성)을 훈련하는 기간이었다. 넉넉잡아 한 달이면 들어갈 수 있는 길을 40년 동안이나 우회하며 방황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복음주의신학회에 따르면, 오늘날 우리나라 기독교의 위기상황을 ①양적 성장의 쇠퇴, ②도덕성 상실로 인한 사회적 불신, ③사회와 타종교로부터의 반기독교적 압력, ④이단에 무방비상태 등을 지적하였다. 그리고 이런 문제의 배후에는 신자의 신자다움, 교회의 교회다움을 상실한 ‘신자와 교회의 정체성 상실’에 있다고 했다. 나 역시 오늘날 우리나라 기독교의 최대 위기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많은 신자들이 인디언 아이들처럼 정체성의 혼란 속에 살고 있다. 정체성이 매우 모호한 신자가 많다. 세상과 교회를 오가면서 적당히 발만 담그고 있는 ‘무늬만 신자’가 많다. 개중에는 신자라는 것이 알려지면 불편한 일도 많고 귀찮은 일도 많다고 생각하여 애써 신자인 것을 감추고 있는 사람도 많다. 이런 사람들을 보면 성소수자만도 못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들은 온갖 불이익을 감수하면서 ‘커밍아웃’(coming-out)을 당당하게 선언한다. 최소한 우리 사회에선 이를 선언한 순간 사회적 관계가 끊어지고, 부모형제와의 관계도 끊어진다. 그(녀)가 속한 공동체에서 완전히 소외되거나 배제된다. 이런 모든 것을 감수하면서도 그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생명의 주님, 생명의 복음을 믿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당당하게 밝히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의 비극이고, 또한 위기인 것이다. 오늘 우리가 본문을 통하여 분명히 알아야 할 것,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성민이라는 사실이다. 이 세상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고르고 골라 뽑힌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이다.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야!
정체성과 함께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자신의 ‘근본’(originality, 본래성)에 대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성민’으로 삼으신 것은 그들에게 자격이 있어서 아니다.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7). 역사를 보면, 유대인은 가는 곳마다 눈에 연기처럼 미움을 받았다. 그것은 하나님의 성민이라는 정체성이 왜곡된 선민의식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사람이란 분명한 정체성을 가진 것은 좋지만 성민이라는 우월감에 사로잡혀 다른 사람(민족)을 우습게 여긴 것은 심각한 문제인 것이다. 7절의 말씀은 이 점을 경계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택하신 것은 그들에게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성실하심 때문’(8)이라는 것이다. 오히려 ‘별 볼 일 없는 존재’(7b)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바로 이런 본래성을 잊지 말라는 것이다.
사울과 다윗의 차이가 여기에 있다. 사울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이었다. 그런데 하나님께 그를 버리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셨다. 사울은 블레셋과의 전투를 앞두고 사무엘이 늦게 온다는 핑계로 자신이 직접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고(삼상13:9), 아말렉과의 전투에서는 자신의 승리를 기념하는 기념비를 세웠다(삼상15:12). 모두가 자신의 본래성을 잊어버린 망령된 행동이다. 반면 다윗은 평생 자신의 이름 앞에 ‘이새의 아들’이란 수식어를 달고 살았다. 이새란 그렇게 자랑스러운 이름이 아니다. 그의 아버지 이새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천하게 여기는 목동이었고, 그는 그런 아버지의 막내였다(삼상16:11, 개역성경은 ‘말째’로 번역). 여기서 ‘막내’를 히브리어로 ‘하카톤’(הקטן)이라고 한다. 이는 ‘나이의 개념’(막내)도 있지만 ‘등급의 개념’(꼴찌)도 있다. 다윗의 경우는 나이보다 등급의 개념으로 쓰이고 있다. 즉 ‘제일 별 볼 일 없는 못난 자식’이란 뜻이다. 그러므로 ‘이새의 아들’이란 ‘별 볼 일 없는 부모의 못난 자식’이란 뜻이다. 그런데 그는 이 부끄러운 꼬리표를 평생 훈장처럼 달고 살았다. 자신의 본래성을 잊지 않기 위해서다. 바로 이 점이 다윗이 흠이 많은 사람임에도 하나님께 사랑받은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민이다. 이것이 우리의 정체성이다. 이 사실을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에게 무슨 자격이 있어 이런 영광스러운 일이 주어진 것이 아니다. 우리는 바울의 표현처럼 만물의 찌꺼기와 같은 사람들이다. 그저 하나님의 은혜로 사랑으로 이렇게 된 것이다.
자기미화의 천재
어느 나라에나 건국신화가 있다. 우리나라는 고조선의 단군신화(檀君神話)가 건국신화다. 단군신화는 하늘에서 내려온 환웅(桓雄)이 여자로 변한 곰과 결혼하여 단군(檀君)을 낳았다는 것을 골자로 한다. 이것은 우리민족이 하늘에서 내려온 인내의 민족인 것을 상징하는 신화다. 건국신화의 핵심은 그 민족의 ‘위상’과 ‘정체성’을 밝히는데 있다. 문제는 그것이 지나치게 미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미화작업은 민족뿐만 아니라 사람에게서도 자주 나타나고 있다. 한 사회의 지도자가 후세 사람들에 의하여 미화되는 경우가 많다(박혁거세, 김알지 이야기, 최초 한글문헌 「용비어천가」-시조의 ‘위상’을 미화하기 위한 신화적 작업의 산물). 심한 경우는 스스로 자기를 미화하기 위해서 자신의 과거를 지워버리거나 치장함으로써 왜곡하기도 한다. 사실 이런 현상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우리 모두에게도 있다. 사람에게는 자기를 미화하고 싶어 하는 신화적 의지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을 자기미화, 혹은 자기위장의 천재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런데 성경은 다르다. 성경은 있는 그대로 기록하고 있다. 우선 선민 이스라엘의 탄생 이야기가 그렇다. 신26:5~10을 ‘이스라엘 민족의 신앙고백’이라고 한다. 이 고백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내 조상은 방랑하는 아람 사람으로서 애굽으로 내려가 거기에서 소수로 거류하였더니 거기서 크고 강하고 번성한 민족이 되었는데”(신26:5). 자기 조상은 ‘떠돌이 아람 사람’이었는데, 이집트에서 더부살이를 하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큰 민족을 이루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엔 어떤 신화적 요소도 없고, 또한 미화도 없이 초라한 과거를 그저 솔직하게 말하고 있다. 사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부터 시작해서 이삭, 야곱, 요셉, 모세, 다윗, 베드로나 바울 등 누구도 신화적인 존재처럼 미화되어 있지 않고, 오히려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보잘 것 없는 과거와 실수까지도 기록해 놓고 있다. 세상은 초점이 자기 위상, 자기 민족의 위상에 있지만 성경은 그 초점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에 있고, 하나님의 사랑에 있고, 하나님의 신실함에 있고, 하나님의 영광에 있다. 그러니 자신도, 지도자, 민족도 미화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성민이라는 ‘정체성’과 함께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본래성’을 잊지 않고 기억해야 한다. 정체성을 갖는 것이 자신을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는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을 살아내는 비결이고, 본래성을 기억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더욱 풍성하게 누리며 사는 비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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