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을 옮겨 놓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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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3,033회 작성일 16-08-28 13:24본문
돌을 옮겨 놓으라.
요11:32~44
2016. 8/28. 11:00
‘섭섭’마귀를 조심하라!
사단이 성도를 무력하게 하여 무너뜨릴 때 자주 사용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마음에 ‘섭섭함’을 집어넣는 것이다. 소위 ‘섭섭마귀’에게 사로잡혀 ‘섭섭병’에 걸리게 만든다. 목사에게 섭섭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목사가 설교를 아무리 잘해도 은혜를 못 받는다. 오히려 ‘말만 잘해!’ 혹은 ‘아는 것만 많아!’ 하고 빈정거린다. 섭섭함이 쌓이면 목사가 설교를 통해 자기를 친다고 생각하게 되고, 미움이 생겨 나중에는 교회 일에 불평꾼이 된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사사건건 딴지를 거는 ‘태클 맨’(troublemaker)이 되고 만다. 사실 아무 것도 아닌 것에서 비롯된 섭섭함이 이런 심각한 문제로 번지게 되는 것이다. 대표적인 ‘섭섭이’는 누가복음에 나온 탕자의 형이다(15:25~31). 평소 그는 아버지에게 매우 성실하고, 충성스러운 아들이었다. 그런 그가 한 순간에 돌변했다. 그것은 동생이 집으로 돌아온 순간이다. 그는 아버지가 아버지의 재산 가지고 나가 창기와 함께 다 탕진하고 돌아온 동생을 위해서는 살진 소를 잡아 잔치를 베풀어주면서 뼈가 닳도록 일하고 있는 자신을 위해선 염소새끼 한 마디도 잡아주지 않았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한 마디로 ‘섭섭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마음이 몹시 상하여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 아버지가 그를 데리러 나오자 그는 아버지에게 원망과 불평을 쏟아내면서 동생에 대한 비난도 감추지 않았다. 섭섭함이 그를 아버지와 동생에게서 돌아서게 만들고, 집에 들어가기 싫도록 만들었다. 그를 집안의 탕자, 마음의 탕자로 전락시켜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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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마음에 섭섭병이 생기지 않도록 마음관리 잘해야 한다. 복음의 씨앗이 열매를 맺는데 마음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주님은 씨뿌리는 비유를 통하여 말씀하셨다(마13:1~8). 사단은 이것을 잘 알기에 마음을 공략해서 무너뜨리고, 뺏으려고 혈안이다. 그래서 마음을 가장 치열한 영적 전쟁터라고 하는 것이다. 혹시 사람의 마음을 망치는 사단의 졸개 삼총사에 대해 들어보았는가? 첫째가 ‘섭섭이’, 둘째는 그의 동생 ‘서운이’, 그리고 셋째는 사촌 ‘삐짐이’다. 별 것도 아닌 이 삼총사가 우리 안에 들어오면 탕자의 형처럼 마음에 상처와 상함이 생기고, 그 자리에 원망의 돌, 불평의 돌, 비난의 돌, 불신의 돌이 자리를 잡게 된다. 본문에서도 이런 ‘섭섭병’에 걸린 ‘마르다’를 발견할 수가 있다.
돌로 막았거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죽은 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이다. 이는 생명의 주인이신 주님께서 계신 곳은 생명의 축제 현장이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이 사건은 요한복음에만 나오는, 주님께서 고난주간 직전에 행하신 최고의 기적이다. 요한복음은 전반부(1:~11:)와 후반부(12:~21)로 나뉘는데, 전반부는 일곱 개의 표적 이야기를 중심으로 되어 있고, 후반부는 예수님의 고난 이야기를 중심으로 되어 있다. 이 사건은 표적 이야기와 고난 이야기를 서로 이어주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요한복음 전체의 주제인 ‘생명’과 잘 어울리면서 주님의 부활사건과 긴밀한 대칭을 이루고 있는 사건이다. 다시 말하면 주님의 부활을 예표(sign)하는 사건이다.
본문에는 당시 유대인의 장례문화를 보여주는 무덤의 문을 막는 ‘돌’에 대한 언급이 세 번 나온다. ‘돌로 막았거늘’(38), ‘돌을 옮겨놓으라’(39), ‘돌을 옮겨놓으니’(41). 여기서 돌 저 너머에는 죽은 자의 시신이 놓여있다. 그래서 무덤의 문을 막은 돌은 죽은 자와 산 자 사이의 경계를 뜻한다. 나는 이 시간 마르다와 관련하여 이 ‘돌’에 대해서 생각해 보려고 한다. 사실 이 사건에서 가장 비중이 있는 사람은 마르다다. 돌은 주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아 그 너머에서 썩어가고 있는 나사로의 시신처럼 우리를 썩게 만들고, 병들게 만들고, 무너지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있는 것들을 다시 회복하고 고치고 살리기 위해선 ‘돌을 옮겨놓으니 죽은 나사로가 무덤에서 걸어 나왔던 것’처럼 이 돌을 제거해야만 한다. 본문은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이지만 그의 죽음으로 죽어가고 있는 마르다를 다시 살리는 것이기도 하다. 나사로의 무덤 문을 가로막은 돌은 마르다와 주님 사이를 가로막은 돌이 되고 말았다.
왜 이제 오십니까?
주님께서 오신다는 소식에 마르다가 가장 먼저 동네 어귀까지 뛰어나가 주님을 맞이했다. 주님에 대한 그녀의 사랑을 가늠할 수 있는 모습이다. 상주로서 경황이 없었을 텐데 주님이란 말에 이렇게 반응을 보인 것이다. 우리 역시 주님이라는 말에 피가 끓고, 가슴이 뛰고, 온 몸에 전율을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렇지만 그녀의 말은 실망 그 자체였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21).
그녀의 동생 마리아도 같은 말을 했다(32). 이는 주님께서 늦게 오신 것에 대한 섭섭함과 서운함을 우회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 말의 속뜻은 왜 이제 오셨느냐, 주님이 너무 늦게 오셔서 오라비가 죽었다는 원망이고, 불평이다. 주님께 한 마디의 사례도 없이 원망의 말, 불평의 말부터 한 것을 보면 주님께 대한 그녀의 섭섭함과 서운함이 얼마나 컸는지를 알 수가 있다. 아무튼 그녀의 이러한 태도는 로마 어느 백부장과 좋은 대조가 된다(마8:5~13). 백부장이 자신의 하인이 병이 들었다며 주님께 찾아와 고쳐달라고 했다. 주님께서 친히 가셔서 고쳐주시겠다고 하자 백부장이 이렇게 말했다. ‘가실 것까지 없습니다. 다만 말씀으로만 하셔도 제 하인이 나을 것입니다.’(:8). 반면에 마르다는 주님이 직접 찾아가셨는데도 늦게 오셨다며, 늦게 오셔서 오빠가 죽었다며 섭섭한 마음을 가졌다. 이는 그대로 마르다의 영적 수준, 신앙의 수준을 보여주는 것이다.
섭섭함은 믿음의 수준과 관련이 깊다.
섭섭함의 사전적 의미는 ‘기대에 어긋났을 때 생기는 감정’이라고 한다. 내가 한 것에 비해 상대방이 소홀히 한 것 같을 때 주로 이런 감정이 생긴다. 교회에서도 가장 흔한 병이 이 섭섭병이다. 그리고 이 병은 오래 신앙생활을 하고, 활동을 많이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서 주로 많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내가 이렇게 예배도 열심히 나오고, 기도도 많이 하고, 봉사도, 헌신도, 섬김도 많은데, 그래도 내가 이 교회 핵심멤버이고, 항존직이고, 구역장이고, 교사이고, 성가대원인데 이에 걸맞게 대우를 해주지 않는다고 알아주지 않는다고 섭섭해 하는 사람들이 많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느냐? 이유는 간단하다. 믿음으로 하지 않고 기대(보상)심리를 가지고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기대가 클수록 섭섭함도 커진다. 그래서 주님은 ‘아무 것도 기대하지 말고 꾸어주라.’(눅6:35)고 하셨고, 구제를 할 때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마6:3)고 하셨다. 인간적인 기대를 버리고, 오직 믿음으로 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섭섭마귀’가 틈을 탈 수가 없다.
마르다의 영적 수준
마르다도 마찬가지였다. 그동안 내가 주님께 어떻게 해드렸는데, 주님께서 그러실 수 있느냐는 것이다. 요한복음을 보면 주님께서 공생애 기간에 3번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는데, 그 때마다 마르다의 집에서 머무셨고, 마르다는 주님과 주님의 제자들까지 정성껏 잘 섬겼다. 자신은 주님을 위해서 이렇게까지 했는데, 주님께서는 자신의 오빠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전해 들으시고도 바로 오시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것도 죽은 지 나흘이 되어서야 겨우 오셨다는 것이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마르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 그렇지만 신앙적인 차원에서 보면, 마르다의 신앙이 한 참 멀었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된다. 사실 본문은 이런 마르다의 신앙을 세워가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나사로를 살리신 이 사건에서 ‘주님과 마르다의 대화’(20~28)가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여기를 잘 살펴보면 당시 마르다의 신앙수준을 알 수가 있다.
첫째는 예수님에 대한 유치한 수준을 가지고 있었다(22). 22절에서 ‘구하시는 것’(αἰτέω)이란 단어가 이를 보여준다. 이 단어는 ‘낮은 사람이 높은 사람에게’, ‘사람이 하나님께’ 구할 때 사용되었고, 주님은 기도하실 때 동등의 위치를 나타내는 ‘에로타오’(ἐρωτάω)란 단어를 사용하셨다. 이는 그녀가 주님을 하나님이 아니라 선지자 정도로 보았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주님의 능력에 대해서도 제한적인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이다. 둘째는 통속적인 부활신앙이다(24). 주님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나리라.’(23)고 하셨다. 그러자 그녀는 자신도 안다며 신통찮게 반응했다(24). 물론 그녀가 아는 것이란 통속적인 부활신앙이다. 이 정도는 유대인이라면 사두개인만 빼고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다보니 주님은 ‘지금’, ‘곧’ 살려주시겠다는 뜻인데, 그녀는 ‘먼 미래’의 일로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아는 것’과 ‘믿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다. 그런데 그녀는 ‘안다’(οιδα/22,24)는 말을 반복하고 있다. 이 또한 그녀의 신앙수준을 잘 보여준다. 셋째는 형식적이고 교리적인 신앙고백이다(27). 그러자 이번에는 주님께서 자신의 존재(신적 선언)를 뜻하는 ‘나는~이다.’(εγω ειμι)의 표현까지 동원하며 강한 어조로 그녀의 믿음을 요구하셨다(25,26). 그녀 또한 감동적인 신앙고백을 했다(27). 그래서 ‘내가 아나이다.’에서 ‘내가 믿나이다.’로 바뀌었다. 실로 놀라운 변화다. 그러나 그녀의 고백은 형식적이고 추상적이고 교리적이었다. 주님께서 나사로의 무덤 문을 가로막고 있는 ‘돌을 옮겨놓으라.’고 하셨을 때 그 실체가 드러났다. 주님의 이 명령에 그녀가 화들짝 놀랬다(39). 이는 27절의 고백을 완전히 부정하는 태도다. 그녀의 신앙이 이런 수준이었기에 ‘주님의 뜻’(4,15)을 헤아리지 못한 것이고, 자기중심적으로만 생각하여 주님에 대한 섭섭한 마음을 품게 된 것이다.
돌을 옮겨놓으니
이 때 주님께서 결정적인 한 마디를 하셨다.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40). 결국 마르다의 문제가 믿음에 있음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신 것이고, 그녀의 믿음 없음을 꾸짖으신 것이다. 이후 마르다는 침묵하게 된다. 그리고 무덤 문을 막고 있던 돌이 옮겨지고(41), 죽었던 나사로가 무덤에서 걸어 나왔다(44). 마르다가 침묵을 했다는 것은 그녀의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뜻이다. 믿음이 회복이 되었다는 뜻이다. 돌이 옮겨지고 죽었던 나사로가 살아서 걸어 나왔던 것처럼 주님에 대한 믿음이 회복되니 섭섭한 마음이 사라지고, 그로 인하여 생겨났던 수많은 돌들도 사라졌다. 이렇게 돌들이 옮겨지니 그녀 안에서 깨어진 것들이 회복되고, 무너진 것들이 다시 세워지고, 죽어가는 모든 것들이 다시 살아났다. 주님에 대한 올바른 믿음을 가지게 되니까 문제가 순식간에 해결이 되었다. 주님과의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모든 돌들이 사라졌다. 문제는 믿음이다. 주님에 대한 올바른 믿음을 갖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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