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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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1,467회 작성일 16-07-31 10:30본문
당신입니까?
마11:2~5
2016. 7/31. 11:00
코페르니쿠스적 전환
발상의 전환을 의미하는 대표적 용어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Copernikanische Wendung)이란 말이 있다. 이는 지금까지의 주장과 정반대 주장을 할 때 쓰이는 말이다. 지금은 상식이 되었지만 16세기 코페르니쿠스가 태양을 중심으로 지구가 돌고 있다는 지동설(地動說)을 주장하기까지 모든 사람들은 지구를 중심으로 태양(하늘)이 돌고 있다는 천동설(天動說)을 믿었다. 눈으로 보기에 태양, 달, 별들이 지구 주위를 돌고 있는 것처럼 보이니까 자연스럽게 천동설을 사실로 여겼다. 그런데 코페르니쿠스는 보이는 대로 믿지 않고, 천동설로는 행성의 궤도와 운동이 수학적으로 설명될 수 없었던 것에 착안해 지동설을 주창했다. 이는 지금까지 사람들이 믿었던 사실을 완전히 뒤집어놓은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혁명적 발상의 전환을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고 부르게 되었는데, 철학자 칸트가 자신의 철학적 입장을 표현하는데 처음 사용하였다. 이후 이 말은 철학적 용어뿐만이 아니라 사회전반에 걸쳐 어떤 견해나 사고방식이 종래와는 달리 크게 변한 것을 비유하는데 쓰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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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으로 획기적인 사건은 이런 혁명적인 사고 전환의 결과다. 예를 들면 인간이 달에 착륙한 사건, 제3의 불 원자력의 발견, 전기의 발명, 페니실린 개발, 산업혁명, 신대륙의 발견 등은 모두가 혁명적인 발상의 전환에서 비롯된 것이다. 달은 토끼가 방아를 찧는다는 동화속의 세계였다. 그런데 그곳을 인간이 거닐 수 있게 된 것은 사고의 전환 없이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콜럼버스의 달걀’도 사고전환과 관련된 좋은 예다.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었기에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일에 도전을 하게 된 것이고, 그것을 현실이 되도록 만들었다(고르디우스의 매듭, 혹은 알렉산더의 매듭). 이렇게 생각의 변화가 행동의 변화를 가져오고, 나아가서 획기적인 사건을 만든다. 그렇다면 인류 역사상 가장 획기적인 사건은 무엇일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
예수님의 탄생을 전후로 역사를 ‘기원전’(BC/ before Christ)과 ‘기원후’(AD/ Anno Domini)로 나누고 있다. 이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구별이 없다. 이것이 무엇을 뜻할까? 예수님 탄생이후 인류 역사가 그만큼 획기적으로 바뀌었다는 뜻이다. 믿는 사람들이 자신의 인생을 믿기 전과 믿은 후를 BC와 AD로 표현한 것도 같은 의미다. 그러면 무엇이 이렇게 바꿔놓은 것일까? 요3:16에 그것이 잘 나타나 있다. 이 말씀을 복음의 요약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복음이다. 복음이란 온 인류를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는 것이다. 마귀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진노의 자녀가 축복의 자녀가 되고, 멸망을 받아야 할 존재가 영생을 얻게 된 것이다. 이것보다 더 획기적인 사건이 어디 있을까! 예수님 자신이 바로 이 복음이시고, 우리에게 이 복음을 주시려고 이 땅에 인간의 몸으로 오신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의 탄생을 전후로 역사를 기원전과 기원후로 구분하고, 예수님을 믿기 전후로 자기 인생을 기원전과 기원후로 구분한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과 그의 복음이야말로 가장 획기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이 복음은 계속해서 획기적인 사건을 만들어내고 있다(Epoch-making Gospel).
오실 이가 당신입니까?
본문은 옥에 갇힌 세례요한의 질문에 대한 주님의 대답이다. 그는 주님보다 6개월 먼저 태어나서 주님의 길을 예비한 선구자였다. 제사장 사가랴의 늦둥이 아들로, 요즈음 말로 금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난 것이다(반면 주님은 흙수저). 하지만 그는 이런 기득권을 모두 내려놓고 광야로 나가 그곳에서 생활하며 사람들에게 회개의 말씀을 선포하고,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다. 주님도 그에게 세례를 받을 만큼 당시 그의 인기는 주님을 능가했다. 그런 그가 유대지역을 다스리고 있는 헤롯왕의 죄를 지적했다가 옥에 갇히게 되었고(마14:4), 결국 이 일로 처형을 당하게 된다. 그는 감옥에 갇히기 전까지만 해도 주님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요1:29)이라고 선명하게 선포했다. 이는 주님이 누구시며,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본문은 그가 주님을 의심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3). 특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6)고 하신 주님의 말씀이 이를 강력하게 뒷받침한다. 본문이 갑작스럽게 요한의 실족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것은 그 역시 우리와 같은 연약한 존재인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아무튼 옥에 갇힌 요한은 자신의 제자를 주님께 보내서 ‘오실 이가 당신입니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합니까?’(3) 라고 묻고, 그 답을 가져오도록 했다. 이것은 주님의 사역에 대한 그의 이해를 보여주고 있다. 지금까지 주님의 사역을 지켜보면서, 그는 자신이 기대했던 메시야의 사역과 주님께서 행하신 사역 사이에 거리감을 느낀 것이다. 그가 기대했던 메시야와 그의 사역은 마3:12에서 밝힌 대로, ‘손에 키가 들고 자신의 타작마당을 깨끗하게 하여 알곡은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로 태우는 것’이었다. 한 마디로 심판하시는 메시야다. 또한 당시 모든 유대인이 가지고 있었던 정치적인 메시야다. 악의 상징인 헤롯과 로마를 물리치고 왕위에 올라 이스라엘과 주변 세계를 지배하는 것이다. 주님을 따르던 제자들 역시 이런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주님께서 행하신 일은 주로 기적이었고(마8:~9:), 심판의 대상이 될 것으로 기대한 죄인들을 심판하시기보다 오히려 용서하시고 그들과 식탁교제를 나누시었다(마9:9~13). 게다가 군중이 왕으로 삼으려하자 피하여 홀로 기도하셨다. 이와 같은 메시야로서 주님의 사역을 요한은 납득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상당히 도전적인 질문을 자신의 제자를 통해 주님께 던지고 있는 것이다. ‘오실 이가 당신입니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합니까?’ 이와 같은 그의 질문에 주님은 돌려서 대답하셨다. 너희가 듣고 본 것을 요한에게 전하라고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5).
Epoch-making Gospel
주님은 ‘예’ ‘아니오’ 라고 분명하게 대답하시지 않고, 메시야와 관련된 구약성경을 인용하여 대답하셨다. 왜 이렇게 하신 것일까?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조작된 메시야가 아니라 성경에 예언된 메시야가 어떤 분인지, 그리고 주님이 누구신지 말씀을 통해 스스로 확증하라는 뜻이다. 사실 당시 세례요한을 비롯하여, 주님의 제자들과 모든 유대인들이 생각한 메시야는 말씀에 예언된 메시야가 아니라 그들의 삶의 자리에서 만들어진 조작된 메시야였다. 이런 잘못 왜곡된 메시야 사상 때문에 결국은 진짜 메시야로 오신 주님을 거절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우리가 성경적인 올바른 믿음 안에 있는 자신을 시험하고 확증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가짜로 드러날 수가 있다. 여기에 소개된 여섯 가지의 기적은 모두 메시야의 표적으로 구약성경에 예언된 것(사35:5,6, 42:7, 61:1)을 주님께서 자유롭게 인용한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지금까지 주님께서 하셨던 일이다. 주님은 보지 못한 사람을 보게 하고, 걷지 못한 사람을 걷게 하고, 당시 사람들이 천형이라고 여겼던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고, 듣지 못한 사람을 듣게 하고, 죽은 사람을 살리고, 소외 받은 가난한 이웃들에게 친구가 되어 그들과 어울리며 그들에게 천국복음을 가르쳐주셨다. 그러므로 주님은 이 대답에서 성경에 예언된 메시야의 사역이 주님을 통해서 모두 성취되었다고 선언하신 것이다. 주님은 이를 통해 요한의 잘못된 메시야 사상을 바로잡아 주시면서 동시에 자신이 메시야이신 것을 삶으로 분명하게 보여주신 것이다. 자신이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말로는 누구나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행동으로, 삶으로 보여주기는 어렵다. 그런데 주님은 행하신 일과 삶을 통해서 자신이 누구신지 증명해 보이셨다. 성도 또한 말이 아니라 삶으로 보증이 되어야 한다.
특히 이 말씀은 주님과 주님께서 선포하셨던 복음의 특징과 복음의 능력을 잘 보여주고 있다. 복음이 얼마나 획기적인 사건인가를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복음은 맹인을 보게 하고, 앉은뱅이를 일어나 걷게 하고,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고, 듣지 못한 사람을 듣게 하고, 죽은 사람을 살리는 능력이다. 복음은 삶의 질을 약간 개선하는 정도가 아니다. 삶의 질, 아니 그 인생을 획기적으로 바꿔놓는다.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킨 것처럼 말이다. 물(H2O)이 포도주(C2H5OH)가 된 것은 단순한 개선이 아니라 존재자체가 바뀐 것이다. 메시야의 사역으로 제시된 사건에서 강조점은 ‘온전함’(שׁלום)이다. 즉 보지 못한 사람을 일시적으로, 혹은 희미하게 보게 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보고, 온전하게 보게 하셨다. 걷지 못한 사람을 잠시 일어나서 몇 걸음 걷다가 다시 주저앉게 하신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걷을 수 있도록 하셨다. 그래서 복음을 획기적인 사건이라고 한 것이다. 그런데 이런 획기적인 사건이 복음 안에서 오늘도 계속되고 있기 때문에 획기적인 사건을 만드는 복음(Epoch-making Gospel)이라고 한다. 성도는 이 능력의 복음 안에서 사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이 복음을 삶으로 나타내며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다. 연일 계속되는 폭염처럼 주님의 복음에 대한 뜨거운 열정으로 매일이 획기적인 나날이기를 바라며, 또한 이것을 삶으로 보여줄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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