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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 있다. 그를 기다리는 자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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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1,945회 작성일 16-10-02 1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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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 있다. 그를 기다리는 자여!

사30:18~22

2016. 10/2. 11:00

울지 않는 소쩍새

중국에 「삼국지」라는 역사소설이 있다면 일본에는 「대망」이 있다. 군웅할거(群雄割據)의 전국시대(戰國時代)를 끝장내고 일본을 통일시킨 세 인물의 이야기다. 일본 전국시대의 대표적인 인물로 통일의 초석을 다진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노부나가에 이어 일본 전체를 하나로 묶어 통일시켰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그리고 250년 동안 일본의 통일과 평화시대를 여는데 주역이 되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그 주인공들이다. 여기에 이 세 사람과 관련하여 ‘울지 않는 소쩍새’에 대한 재미있는 일화가 나온다. 노부나가가 휘하의 두 장수 히데요시와 이에야스에게 울지 않는 소쩍새를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탁월한 지략가답게 ‘달래서라도 울게 한다.’고 했다. 반면 은근하고 참을성 있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울 때까지 기다린다.’고 했다. 두 사람의 대답을 들은 노부나가는 ‘울지 않는 소쩍새는 죽인다.’고 했다. 전쟁이 일상이었던 무사(武士)다운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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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일화는 세 영웅의 성격과 리더십을 잘 보여주는 이야기다. 지금도 일본인에게 이 세 사람의 리더십이 이어지고 있다. 노부나가의 리더십(‘결단력’)은 무사정신으로, 히데요시의 리더십(‘친화력’)은 정치원리로, 이에야스의 리더십(‘기다림’)은 기업정신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 중에서 우리는 칭찬하고 격려하면서 새가 울 때까지 기다려준다는 이에야스의 리더십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이것은 그가 일본을 평정했기 때문이 아니다. 참고 기다리는 것은 리더십의 차원을 넘어 성품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사실 참고 기다리는 것만큼 자신과 다른 사람에게 소중한 선물은 없다. 마음의 크기, 인격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가 이것으로 판가름이 난다. 그래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를 사람이 지녀야 할 중요한 덕목으로 꼽고 있는 것이고, 성경도 예외는 아니다. 특히 예수님의 재림을 중요한 믿음의 내용이자 신학의 중심으로 삼고 있는 우리 기독교 입장에서는 더욱 그렇다. 본문에도 하나님의 기다림과 인간의 기다림이 나오고 있는데, 기다리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다.

 

애굽은 터진 담이다.

본문의 배경이 되는 당시의 국제정세를 잠시 살펴보면, 앗수르가 근동지역에서 패권을 장악하고 있던 시기다. 정복사업을 신에게 드리는 최고의 예배라는 깃발을 들고 앗수르 제국이 주변국을 정복해 나갔다. 이와 같이 무섭게 팽창하는 앗수르를 막기 위해 반(反)앗수르 동맹이 결성되었고, 북왕국 이스라엘이 여기에 가입지만 결국 앗수르에게 망하고 말았다(BC721년). 이 때 살길을 스스로 도모하던 남왕국 유다가 찾아낸 것이 애굽이다. 유다는 이미 앗수르의 산헤립과 그 군대를 태워버릴 장소(33)까지 준비해 놓으신 하나님을 무시하고 애굽과 동맹을 맺은 것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그러니 유다는 영적 안목을 잃은 눈 뜬 장님이었던 것이다. 유다가 망한다면 그것은 앗수르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이다. 신자가 망한다면 그것은 사단의 치열한 공격 때문이 아니라 구원의 반석이신 예수님을 버렸기 때문이다. 우리가 힘들어지고, 일이 자꾸 꼬이고, 좋지 않은 일들이 연이어 일어나는 것은 그 원인이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의 관계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30장과 31장은 애굽을 의지하여 도움을 청한 유다의 죄를 지적하고 있다. 그런데 두 장 다 곡(哭)하는 소리를 뜻하는 히브리어 ‘호이’(הוי)라는 단어로 시작을 하고 있다. 유다의 잘못된 결정과 태도에 대한 강한 안타까움을 드러내는 표현이다. 특히 1절에서 ‘맹약을 맺으나’는 문자적으로 ‘제삿술을 붓다’는 뜻이다. 조약체결 때 조약을 깨뜨리는 편을 양국의 신들이 심판해주길 기원하며 제사를 지냈던 관습을 나타낸 것이다. 이것은 유다가 애굽의 신들을 공인(公認)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 일로 유다는 애굽에게 엄청난 보물을 바쳤지만(6) 애굽은 든든한 요새가 아니라 ‘가만히 앉은 라합’(7), ‘터진 담’(13)에 불과했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의지하는 것이 얼마나 허망하고 무익한 일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런 유다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기 위해 그들을 기다리신다.’(18a)고 하셨다. 이것이 본문의 내용이다.

 

기다리시는 하나님

성경에는 하나님에 대한 이미지가 여러 가지로 표현되고 있다. 아버지로, 목자로, 농부로, 신랑으로, 높은 산성으로, 커다란 바위로, 병사의 방패 등등. 이 중에서 가장 친근하고 감동적인 이미지는 ‘아버지’라고 생각한다. 그것도 ‘기다리시는 아버지’다(눅15:). 본문도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시기 위해 기다리시는 아버지의 이미지로 하나님이 묘사되어 있다(18a). 그런데 여기서 ‘기다리다’는 단어를 ‘갈망하다.’ ‘바라다.’는 뜻으로 번역한 성경(NIV)이 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yet longs to be gracious to you).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시고 싶어 안달하는 모습을 강조하고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번역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잘 표현해 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부모가 그렇듯이, 은혜를 베풀어주고 싶고, 복을 주고 싶고, 사랑을 쏟고 싶은 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이다. 본문이 이와 같은 하나님의 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유다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은혜는 무엇인가? 무슨 은혜를 주시려고 그들을 그토록 기다리시는가?

 

1. 긍휼

하나님께서 기다리시는 이유는 ‘긍휼’의 은혜를 베풀어주시기 위함이다.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18b). 긍휼은 히브리어로 ‘라함’(רהם)인데, ‘여성의 태’, 곧 ‘자궁’이라는 뜻이다. 생명을 안전하게 보호하고 양육하는 어머니의 희생적인 모습을 대변하는 말이다. 이는 모태적인 사랑으로, 무조건적이고 끊을 수 없는 운명적인 사랑이다. 그러므로 긍휼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하시는 속성을 잘 나타내주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앗수르가 두려워서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애굽을 의지하는 유다를 기다리신 이유, 그들에게 베풀어주고 싶어 하시는 은혜가 바로 이것이다. 여기서 긍휼을 베풀고 싶어 안달하는 모습을 잘 보여주는 단어가 ‘일어나시리니’(רום)다. 이는 누군가를 사랑하기에 자발적으로 하는 행동을 뜻한다. 하나님의 이 마음 때문에 늘 넘어지고, 배반하고, 배신해도 다시 받아들여지고, 그래서 용서와 회복의 은혜를 누리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모든 행위는 우리를 향한 긍휼에서 시작된다. 바울이 ‘나의 나 됨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고전15:10)라고 고백했는데, 이는 긍휼을 두고 한 말이다.

 

2. 응답(19b)

성도의 가장 중요한 특권과 복은 ‘기도’다. 우리는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고,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할 수 있다. 이런 중요성 때문에 기도를 ‘영적 호흡’이라고 한 것이다. 육신의 생명이 호흡에 달린 것처럼 영적 생명이 기도에 달렸다는 뜻이다. 여기서 더 놀랍고 중요한 것은 우리의 기도에 하나님께서 ‘반응’(응답)을 해준다는 사실이다. 사실 이보다 놀라운 기적이 없다. 우리는 걸핏하면 부모의 말도, 자녀의 말도, 남편이나 아내의 말도 무시하고 산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와 같은 하찮은 존재의 부르짖음과 기도에 귀를 기울이실 뿐만 친절하게 응답해 주신다는 것이다. “시온에 거주하는 예루살렘 백성아 너는 다시 통곡하지 아니할 것이라 그가 네 부르짖는 소리로 말미암아 네게 은혜를 베푸시되 그가 들으실 때에 네게 응답하시리라.”(19).

 

3. 인도(20)

많은 사람들이 믿고 회개하면 처벌이 면제된다고 생각한다. 물론 어느 정도 탕감은 되어도 면제는 안된다. 그래서 본문은 유다의 회복이 즉각적이지 않고 얼마간 고생과 환난이 지속된다고 말씀하신다. 중요한 것은 그 고생과 환난 가운데 그들만 두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친히 스승 되셔서 그들의 눈을 열어주시고(20),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바른 길을 걷도록 인도해 주신다는 것이다(21). 무엇보다 고생과 환난을 통해 더러운 우상과 단호히 결별하게 해주신다는 것이다(22). 구원은 물질의 회복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이다. 번영의 길이 아니라 바른 길, 정의의 길을 걷는 삶의 시작이 구원이다. 바른 길, 정의의 길을 걷다보면 번영의 길, 형통의 길도 따라오게 된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이 되면 물질의 회복도 따라오게 된다. 영혼이 잘되면 범사가 잘되기 때문이다(3요:2).

 

기다리는 자마다 복이 있다.

극장 지배인에게 어떤 부인으로부터 다급한 전화가 왔다. 지난밤에 그 극장에서 다이몬드 목걸이를 잃어버린 것 같은데, 혹시 보지 못했느냐는 내용이었다. 지배인은 보지 못했다면서 찾아볼 테니 전화를 끊지 말고 기다려달라고 하고 극장 안으로 가서 목걸이 찾았다. 다행이 목걸이가 어느 좌석 밑에 있었다. 지배인은 전화 앞으로 가서 목걸이를 찾았다는 소식을 알려주려고 했는데, 이미 전화가 끊겨 있었다. 이 부인이 그 사이를 기다리지 못하고 전화를 끊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지배인은 그 목걸이 돌려줄 수가 없었다. 조급하여 기다리지 못한 이 부인의 모습이 지금 나의 모습, 우리의 모습이 아닌지 모르겠다.

 

본문은 ‘하나님을 기다리는 자마다 복이 있다.’(18b)고 했다. 여기서 ‘기다리다’는 히브리어로 ‘하카’(חכה)다. 기대했던 사건이 발생할 때까지, 소망한 일이 이루어질 때까지 지속적으로 인내하는 상태를 뜻한다. 하나님께서 긍휼의 은혜를 베풀어주실 때까지, 하나님께서 기도에 응답해주실 때까지, 하나님께서 인도하실 때까지 참고 기다리는 것이 ‘하카’다. 하나님은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참고 기다리는 사람에게 반드시 긍휼의 은혜, 기도응답의 은혜, 인도의 은혜를 베풀어주신다. 그래서 하나님을 기다리는 자마다 복이 있다고 하신 것이다. 긍휼기도응답, 그리고 인도의 은혜는 연약한 우리가 광야와 같은 인생길을 가는데 가장 절실한 것들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하나님께서 이 은혜를 우리에게 주시려고 기다리고 계신다는 것이다. 이 은혜를 베푸시기를 간절히 바라고 계신다는 것이다. 우리 모두 참고 기다려서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실 은혜의 주인공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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