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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들’인생이 ‘초원’인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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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2,414회 작성일 16-08-21 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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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들’인생이 ‘초원’인생으로

막6:30~44

2016. 8/21. 11:00

양의 생존방법

양은 풀을 뜯어먹고 사는 초식동물이다. 양은 여러 면에서 인간과 닮은 점이 많다. 그래서 성경은 인간을 양에 비유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 세상의 모든 동물은 자기보호를 위한 공격방어수단을 가지고 있다. 때문에 오랜 세월 동안 종족을 보전시켜 온 것이다. 이 자기보존의 방어수단이란 힘으로, 날쌘 동작으로, 은폐의 기술로, 치명적인 독으로 자기 생명을 지키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아무리 약한 동물도 섬세한 시력이나 청력, 빠른 발 등으로 자신을 보호할 줄 안다. 그런데 양은 자기 생명을 유지하고, 종족을 보존키 위한 방어수단이 전혀 없다. 적과 대항해 싸울 날카로운 이빨도, 발톱도, 뿔도 없고, 적의 공격으로부터 도망치는 순발력이나 날렵한 동작 역시 찾아볼 수 없다. 넘어지면 스스로 일어나지도 못하는 참으로 무능한 동물이다. 더 한심한 것은 지독한 근시여서 전방 1~2미터 내의 사물만 구별할 뿐 그 이상의 거리에 있는 것은 보지 못한다. 늑대와 같은 맹수가 눈앞에 와서 입을 벌리고 있어도 한가로이 풀을 뜯어먹고 있는 짐승이 양이다. 또한 스스로 풀밭이나 물가를 찾을 능력도 없다. 게다가 하얀 털을 입고 푸른 초장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으니 항상 적에게 노출된 상태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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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이 번식하고 평화로이 떼를 지어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다른 동물에게서 볼 수 없는 딱 한 가지를 장점 때문이다. 목자의 음성을 알고 믿고 따르는 것이다. 물론 개나 고양이도 주인을 알아보고 잘 따른다. 하지만 이들은 어디까지나 주인이 귀여워해 줄 때 뿐이고, 학대를 받으면 어디론가 떠나고 만다. 양은 그렇지 않다. 어떤 상황에서도 목자를 믿고 따른다. 이것이 양의 유일한 장점이고, 또한 생존의 비결이다. 양은 목자에게 절대 의존된 동물이다. 목자가 없이는 절대로 살 수가 없는 존재이다. 이런 점에서 양은 인간과 가장 닮았다. 인간 역시 하나님께 절대 의존된 존재이고, 하나님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다. 물론 인간은 양과는 달리 항상 하나님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기회만 있으면 도망을 치려고 한다는 점이다. 사실은 그래서 인간의 불행, 인간 세상의 불행이 생겨나고 있는 것이다. 양의 안전과 풍성함, 평화로움은 목자와 함께 있을 때 보장된다. 우리 인생 역시 목자이신 우리 예수님과 함께 할 때 평안이 있고, 형통이 있고, 기쁨이 있고, 삶의 만족이 있다. 오늘 본문이 이 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목자 없는 양과 같은 사람들

본문은 네 복음서가 모두 취급하고 있는 그 유명한 ‘오병이어의 기적’ 사건이다(내용설명 생략). 마가는 다른 사건들과 다르게 이 사건의 배경을 상당히 길고 자세하게 다루고 있다. 바로 여기에 이 기적의 사건을 푸는 열쇠가 있다. 제자들이 갈릴리 선교에서 돌아오자(30) 예수님께서 한적한 곳에 가서 잠시 쉬라고 하셨다(31). 음식 먹을 겨를도 없었던 제자들에 대한 주님의 배려였다. 그래서 배를 타고 한적한 곳으로 갔는데, 많은 무리(헬, 오클로스‘οχλοϛ’ 당시 유대사회의 모든 제도적 장치로부터 소외되고 배제된 사람들을 뜻함)가 벌써 눈치를 채고 걸어서 먼저 도착하여 기다리고 있었다(32,33). 그 수가 남자 장점만 오천이 넘었다(44). 이렇게 많은 무리가 모일 수 있었던 것은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각지에서 몰려든 사람들이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않고 예수님께로 나아왔기 때문이다(요6:4). 그래서 결국은 쉬지도 못하고 그들에게 천국복음을 가르치게 되었다.

 

주님께서 이렇게 휴식의 장소까지 쫓아온 무리를 외면하지 않으신 이유가 있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34)과 같았기 때문이다. 이는 마가복음에만 나온 표현이다. 사실 목자가 없는 양이란 존재할 수 없다. 스스로 방어할 능력도, 먹이를 구할 능력도 없기 때문에 양은 목자가 없으면 살아남을 수가 없다. 그런데 주님은 자신을 찾아온 무리를 ‘목자 없는 양’이라고 하셨다. 여기서 ‘무리’(οχλοϛ)라는 단어 자체가 목자가 없음을 함의하고 있다. 무리는 모든 제도적 장치로부터 소외되고 배제된 사람들이니까 누구도 그들을 돌보는 사람이 없다는 뜻이다. 그러니 그들에게는 목자가 없는 것이다. 이것은 그들이 처한 ‘비참하고 불행한 상황’에 대한 비유다. 동시에 목자 없는 인생, 곧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실존적 현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떠난 인생이 얼마나 비참하고 불행한가를 잘 보여준다(아담과 하와). 그래서 주님은 그들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다.’(σπλαγχνα). 이 말은 단순히 안쓰러운 마음을 넘어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을 의미한다. 엄밀하게 따지면 그들에게 목자가 없는 것은 아니다. 탐욕스럽고 불의하긴 해도 헤롯이 그들의 왕이었고, 대제사장을 비롯한 많은 종교지도자들과 산헤드린 공회를 움직이는 정치지도자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에게 이들은 목자가 아니었다. 이들은 양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사욕을 위해 양의 피를 빨아먹는 자들이었다. 늑대와 같고, 이리와 같고, 도적과 같은 악한 목자였다. 그래서 본문은 그들에게 목자가 없는 양이라고 한 것이고, 주님께서 참 목자이신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선한 목자

목자의 주된 임무는 두 가지다. 양을 보살피는 것과 배불리 먹이는 것이다. 본문에는 이와 같은 목자의 이미지가 주님의 태도사역을 통하여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주님은 목자 없는 양과 같은 그들을 보시고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을 느끼셨다. 이것은 목자의 심정(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모든 의미 있는 일, 특히 주님의 일은 이런 마음에서 시작이 되고, 이런 마음으로 해야 한다. 그리고 주님은 그들을 여러 가지로 가르치셨고’(34, 마태와 누가에서는 병을 고쳐주신 것을 첨가), 굶주린 그들을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다 배불리 먹이셨다’(42). 이렇게 주님의 태도와 사역은 목자의 마음과 주된 임무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특히 본문에 구약에서 말한 선한 목자로서의 메시야 이미지를 떠오르게 하는 단어가 있다. ‘한적한’(31,32), 혹은 ‘빈들’(35)이란 단어들이 그것이다. 이는 헬라어로 ‘광야’(ἒρημος)를 의미하는데, 주님께서 기적을 일으켰던 장소다. 누가는 그곳을 ‘벳새다’(눅9:10)라고 구체적으로 지명을 말하고 있으나 그곳이 정확히 어딘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곳이 광야가 아니라는 것이다. ‘푸른 잔디’(39)라는 단어가 이를 확인해 준다. 실제로 갈릴리 주변에는 사람이 걸어서 갈만 곳에 광야가 없다. 그래서 우리 성경은 ‘한적한 곳’이라고 번역을 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 단어를 사용한 것이 마가의 단순한 실수였을까? 아니면 의도적인 것이었을까? 의도적으로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같은 단어를 ‘세 번’(31,32,35)이나 반복한 것이 그 증거다. 구약성경을 잘 아는 사람은 마가의 이 의도를 금방 알아 챌 수 있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모세시대에 이집트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이 풀 한 포기, 쌀 한 톨, 마실 물조차 없는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신 만나와 메추라기와 반석의 물을 통해 40년 동안 살았던 것을 생각나게 한다. 지금 주님은 하나님께서 하셨던 그 일을 재현하고 계신 것이다. 또한 ‘푸른 잔디’(39)에 무리를 앉게 하여 먹이시는 모습은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눕게 하시며’(시23:2)라는 말씀을 연상시켜 주기도 한다. 그래서 본문은 광야에서 오병이어 기적을 일으키고, 푸른 잔디 위에서 그것을 배불리 먹게 하신 사건을 통해 너희가 믿고 따라야 할 목자는 예수님이시라는 것을 묵시적으로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목자를 만나면

그러므로 오병이어 기적은 우리에게 어떤 나눔의 윤리를 가르치거나, 더 나은 세계를 만들기 위한 노력과 헌신을 촉구하는 말씀이 아니다. 사람들은 이 기적을 통해 이 땅에 권능으로 임한 하나님의 나라를 체험하고, 이 놀라운 체험 속에서 목자 없는 양과 같은 무리들을 보살피시고 먹이시는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 보내신 선한 목자로서 메시야이신 것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마가가 오병이어의 기적을 기록한 목적이다. 주님은 우리 인생의 선한 목자시다. 우리의 형편을 너무 잘 아시고, 그것을 마음 아파하시는 사랑의 목자시다. 우리의 아픔도, 눈물도, 소원도, 필요도 다 아시는 참된 목자시다. 우리를 낮의 해와 밤의 달로부터 지켜주시고, 맹수의 잇 빨에서 빼내주시고, 깊은 수렁에서 건져주시는 목자시다. 우리를 푸른 풀밭과 맑은 시내로 인도하시고, 풍성하게 하시고, 채워주시는 목자시다. 누구든지 목자이신 주님을 만나면 이런 복을 누리게 된다. ‘광야’(빈들)가 목자 없는 인생의 상징이라면 ‘푸른 잔디’는 목자를 만난 인생의 상징이다. 본문은 빈들(광야)과 같은 인생을 푸른 잔디밭과 같은 인생으로 변화시켜주신 참된 목자 우리 주님의 모습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주님은 광야처럼 삭막한 인생을 초원의 향연처럼 풍성하고 즐거운 인생이 되게 하셨다.

 

기억해야 할 다섯 글자

한 사업가 목사님을 찾아가 상담을 했다. ‘목사님, 저는 하는 일마다 안돼요. 무엇이든 제가 손을 대면 실패하고 말아요. 너무 힘들고 괴로워서 그냥 삶을 포기하고 싶어요. 저를 좀 도와주세요.’ 그의 하소연을 들은 목사님이 작은 쪽지에 처방전을 써주었다. 그리고 그것을 성실하게 잘 실천해 보라고 했다. 그 처방전의 내용은 이랬다. ‘매일 시편23편을 아침에 10번, 점심에 10번, 저녁에도 10번씩 읽을 것!’ 그는 목사님이 써 준 처방전을 가지고 가서 성실하게 실천했다. 그리고 3년 후, 그는 성공한 사업가가 되어 목사님을 다시 찾아갔다. 물론 목사님은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는 목사님에게 작은 쪽지를 내밀었다. 그것은 3년 전에 목사님이 그에게 써 준 처방전 쪽지였다.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목사님의 처방대로 주님을 제 인생의, 제 가정의, 제 사업의 목자로 삼고 살았더니 이렇게 성공적인 인생, 성공적인 사업가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주님을 목자로 삼았을 때 경험한 변화를 잘 보여준 이야기다.

 

주님은 나의 목자시다.’ 이를 영어로 ‘The Lord is my shepherd’라고 한다. 모두 다섯 글자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다섯 손가락을 주신 것처럼 이 다섯 글자를 선물로 주셨다. 다섯 손가락을 볼 때마다 이 다섯 글자를 생각하자! 특히 네 번째 글자 ‘my’, 곧 ‘나의’가 중요하다. 주님은 ‘누구의’ 목자가 아니라 ‘나의’ 목자이시다. 나의 목자로 고백하고, 나의 목자로 믿고 따르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면 빈들(광야)과 같은 인생이 푸른 잔디밭과 같은 인생이 될 것이다. 이런 복이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과 여러분의 일터에 임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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