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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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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2,312회 작성일 16-07-10 1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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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감사!

빌1:12~18

2016. 7/10. 11:00(맥추감사주일)

감사는 더하기(+)와 같다.

감사의 사전적인 의미는 ‘도움을 받거나 은혜를 입어 마음에 차오르는 흐뭇하고 벅찬 감정’이다. 도움을 받거나 은혜를 입으면 저절로 그냥 느껴지는 마음의 감정이 감사라는 것이다. 그래서 감사하는 마음은 얼굴에 어쩔 수 없이 드러난다. 입이 귀에 걸린다는 표현이 그것이다. 정상적인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이 감정이 자연스럽다. 그렇지만 마음이 무뎌진 사람, 강퍅한 사람은 은혜를 입고 도움을 받아도 흐뭇하고 벅찬 감동이 일어나지 않는다. 우린 이런 사람을 양심 없는 사람, 혹은 양심이 죽은 사람이라고 말한다. 결국 살아있는 양심과 죽은 양심의 차이는 감사에 있다.

 

감사는 ‘더하기’(+)와 같다(매튜 헨리). 감사하면 마음의 기쁨과 평안이 더하고, 좋은 생각, 밝은 생각, 긍정적인 생각, 경건하고 거룩한 믿음의 생각들이 더해진다. 감사하면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화평이 더하고, 사랑과 신뢰가 더하고, 행복이 더해진다. 무엇보다도 감사하면 하나님의 은혜와 복이 자꾸자꾸 더해진다. 그래서 감사하는 사람은 플러스 인생을 살게 된다. 반면 불평과 원망은 ‘빼기’(-)와 같다. 불평하고 원망하면 좋은 것들이 자꾸 빠져나게 된다. 대신 그 자리에 부정적 것, 나쁜 것, 악한 것들로 채워지게 된다. 그러니 그는 마이너스 인생을 살 수밖에 없다. 누구나 행복한 마음, 행복한 가정, 행복한 관계를 원할 것이다. 비결은 작은 일이나 큰일이나 고맙다고, 감사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 순간 우리 마음에 기쁨이 찾아오고, 우리 가정에 행복이 찾아온다. 모든 관계가 행복하게 된다. 이것이 없으면 어떤 여건에서도 그는 불행한 사람이 되고, 그곳은 불행한 장소가 된다.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은 불행하게 된다. 감사는 우리 성도가 훈련해야 할 중요한 습관이다. 그래서 이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은 안 좋은 일도 그만하니 감사하고, 잘 된 일은 또 잘 되었으니 감사한다. ‘이래도’ 감사, ‘저래도’ 감사, ‘하여튼’ 감사한다. ‘일단’ 감사하고, ‘무조건’ 감사한다. 한 번 따라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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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감사!

그러면서 감사!

그럴수록 감사!

그럼에도 감사!

 

감사 챔피언

이 시간, 나는 여러분에게 감사 챔피언을 한 사람 소개하려고 한다. 사도 바울이 바로 그 사람이다. 사도이기 전에 예수님을 믿는 성도로서 바울은 모든 면에서 금메달감이다. 주님에 대한 사랑, 헌신, 희생, 복음에 대한 열정 모두가 금메달감이다. 감사생활에서도 마찬가지다. 본문은 바울의 감사생활을 아주 단적으로 보여주는 말씀이다. 지금 그는 로마감옥에 수감되어 답답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런데 감옥 밖에는 그를 가는 곳곳에서 조직적으로 반대했던 유대인 말고, 신자들 중에서도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상황이 이런데 감옥에 수감되어 있으니 그를 따르는 사람들의 마음은 초조하고 답답했다. 이와 같은 마음이 본문의 배경이다. 그들은 그에게 반대하는 사람들의 근황을 매우 우려스러운 목소리로 그에게 보고했다. 반대자들이 그가 없는 틈을 이용해서 선교에서 우위를 차지하여 그에게 심리적 고통을 주고자 전도에 분발하고 있다는 것과, 자신들 역시 어떻게든 뒤지지 않으려고 애쓰고는 있지만 역부족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보고에 대한 바울의 반응은 아주 뜻밖이었다.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18b). 한 마디로 오히려 기쁘고 감사하다는 것이다. 반대자들이 날뛰고 있고,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이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 상황인데, 어떻게 이 상황을 감사하다고 할 수 있을까? 이는 그가 감사 챔피언이라는 사실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모두가 우려하고 염려하는 상황을 그는 이렇게 이해하고 해석했다.

 

형제들아 내가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12).

 

자신의 수감이 도리어 복음전파에 진전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첫째는 복음전파에 대한 강한 동기부여가 되었다는 것이다. 자신의 수감이 자신을 반대하는 쪽의 사람들이나 자신을 따르는 쪽의 사람들 모두에게 복음전파에 대한 강한 동기부여가 되었다는 것이다. 반대하는 사람들에겐 그가 없는 이 기회야말로 그를 넘어설 수 있고, 그래서 그를 괴롭게 할 수 있는 호기(好氣)라 생각하고 복음전파에 매진했다. 그를 따르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수감이 되었으니 우리라도 분발하자 하여 담대하게 복음을 전파하게 된 것이다(14). 그래서 양쪽 진영이 다 같이 복음전파에 헌신하게 되었다. 의도야 어찌 되었든 그 동안 복음전파에 미온적이던 사람들이 자신의 수감으로 인해 적극적으로 헌신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결과적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이 널리 확장되었으니 감사하다는 것이다(18a). 물론 근시안적으로, 즉 자기 파의 이익으로만 보면 분명 우려스러운 상황이지만 주님의 복음전파라는 넓고 큰 궁극적인 안목으로 보면 기뻐할 일이고 감사한 일이다. 바울은 이 상황을 이런 안목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둘째는 복음전파의 새로운 문이 열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자신의 수감이 복음전파의 지평을 확장시킨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즉 로마 고위층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는 것이다(13). 그가 일반 죄수와 다르다는 것은 가이샤라에서 로마까지 호송을 맡았던 로마 백부장과 그의 부하들이 이미 확인한 사실이다(행27:1~28:10/ 내용은 생략). 이런 사실이 그가 수감되어 있는 시위대 안에 소문이 났을 것이다(사람은 자신이 경험한 특별하고 감동적인 사건에 대해서는 소문을 내게 되어 있고, 또한 소문처럼 효과적인 광고도 없다. 그래서 입소문 마케팅이라는 것도 있지 않는가?). 또한 수감은 되어 있었지만 미결수였기 때문에 사람들을 자유롭게 만날 수가 있었다. 죄수의 몸이 아니고서 그가 어떻게 장기간 로마 시위대 안에 머물 수가 있었겠는가? 그는 이것을 로마 고위층에게 복음을 전파할 수 있는 기회로 생각하고 감사한 것이다. 그리고 본문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그가 로마 감옥에 있는 동안 빌립보서를 비롯해서 에베소서, 골로새서, 빌레몬서를 기록했다. 문서선교 활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다는 것이다. 그래서 감사하다는 것이다.

 

관점과 믿음의 차이

어떻게 똑 같은 상황을 이렇게 다르게 이해하고 해석할 수가 있을까? 모두가 위기라며 걱정하고 있는데, 도리어 기회라고 외치며 감사하게 되었을까? 이것이 관점의 차이, 믿음의 차이인 것이다.

 

 

광양-전주구간 고속도로를 이용해본 사람은 알 것이다. 이 고속도로는 짜증이 날만큼 터널이 많다(광양-목포구간도 마찬가지다). 터널이 몇 개인지 아는가? 몇 번을 헤아려보다가 실패했는데 인터넷 검색을 통해 알아냈다. 37개다(광양-목포는 33개). 왜 이렇게 터널이 많은 것일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경제성이고, 다른 하나는 빠르기 때문이다. 산을 관통하기 때문에 거리도 공사기간도 단축할 수가 있고, 산이기 때문에 토지 보상비를 포함해서 공사비도 줄일 수가 있다. 그래서 요즈음 건설된 도로들에 터널이 많은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인생의 여러 어려움을 주신 것도 같은 이유다. 물론 터널을 통과할 땐 답답하고 힘들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볼 수도 없고, 죽을 지경이다. 하지만 뒤돌아보면 그것이 지름길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터널이 있어서 똑바로 걸을 수 있었고, 더 빨리 도달할 수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는 것’(빌4:7)이다. 인생의 터널을 만났을 때 걱정(염려)하지 말고 감사함으로 기도해야 한다. 바울은 자신의 수감을 이렇게 해석했고, 그래서 감사하게 된 것이다. 바울은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일이나 사건의 배후에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고, 그 하나님께서 그 일이나 사건에 개입하셔서 그것을 선으로 바꾸시는 것을 확신했다. 그래서 그는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고 고백한 것이다. 바울은 지금 자신의 수감도 이런 믿음과 믿음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또한 바울처럼 감사의 매달리스트가 되려면 이런 믿음과 믿음의 관점이 필요하다.

 

감사는 행동이다.

어느 교회에서는 ‘20,000원 감사헌금 하세요.’ 라는 말이 일상용어가 되었다고 한다. 쌍꺼풀 수술비용이 200만원이 넘을 때, 쌍꺼풀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에게 십일조의 십일조인 20,000원이라도 감사헌금을 해야 하지 않겠냐는 우스갯소리에서 시작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 속눈썹이 길어서 20,000원, 듬직한 남편과 사니 20,000원, 좋은 아내와 함께 사니 20,000원, 사랑스런 아이들이 있으니 20,000원, 좋은 교회, 좋은 지체, 좋은 목회자와 함께 신앙생활을 하고 있으니 20,000원, 건강한 몸이어서 20,000원, 찬양할 수 있어 20,000원 등등 수많은 내용으로 확장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교회에서 ‘20,000원 감사헌금 하세요.’ 라는 말은 단순한 구호가 아니라 감사의 제목을 찾아가는 경건한 문화가 된 것이다. 삶을 윤택하게 하고, 감동의 사람으로 변화시키는 좋은 운동이라 생각한다.

 

감사할 것도 없고, 감사하고 싶은 마음도 없는데, 감사하라고 하는 것이 마음의 짐이라는 것 잘 안다. 하지만 감사할 것이 없다고, 감사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지 말고, 감사의 제목을 찾아보기 바란다. 그리고 그것을 입으로 고백하고 행동으로 표현하기 바란다. 그러면 바울처럼 감옥에 수감이 되어서도 감사하게 되고, 모두가 위기라며 염려해도 도리어 기회라며 기뻐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믿는 성도의 올바른 태도다. 어떤 상황에서든 감사하면 감사할 일들이 생기고, 불평하고 원망하면 아무리 좋은 상황에서도 불평하고 원망할 일이 생긴다. 누구보다 우리 형편을 잘 아시는 주님께서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신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주님을 믿고, 주님의 말씀을 믿고,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란다. 이번 맥추감사절이 우리의 감사생활에 중요한 전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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