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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보배를 버리라.(07-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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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1건 조회 17,128회 작성일 07-02-12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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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보배를 버리라.
욥22:21~30

어떤 사람이 한적한 밤길을 걷다가 실족(失足)하여 언덕 밑으로 굴러 떨어졌습니다. 다행이 떨어지면서 밖으로 뻗어있는 나무뿌리를 움켜잡아 땅바닥으로 떨어지지는 안했습니다. 잠시 안도의 숨을 몰아쉬고 있다가 위로 올라가려고 했으나 올라갈 수가 없었습니다. 게다가 주변이 너무 캄캄하여 아래쪽 상황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밑으로 내려갈 수도 없습니다. 도와달라고 소리쳤으나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저 필사적으로 매달려서 날이 밝기만을 기다리는 것밖에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날이 밝아오자 주변이 점점 밝아지기 시작했고, 이 사람은 한심한 자신의 모습에 쓴 웃음을 지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매달려 있는 곳은 땅에서 불과 1미터도 못되는 높이였습니다. 붙잡은 것을 놓기만 했다면 안전하게 땅에 닿을 수 있었을 텐데, 붙잡고 있다가 밤새 죽을 고생을 한 것입니다.

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리나라 초대교회 시절입니다. 어느 선교사가 본국에서 보내준 차를 타고 선교지를 방문한 중에 일어난 일입니다. 무더운 여름날, 시골길을 가고 있는데, 한 할머니가 큰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가고 있었습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선교사가 차를 세우고 이 할머니를 차에 태웠습니다. 한 참 가고 있는데 자꾸 뒤쪽에서 무슨 소리가 났습니다. 그래서 돌아보니 이 할머니가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서 앉아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힘이 드니까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낸 것입니다. 선교사가 짐을 내려놓으라고 권하자, ‘이 몸 하나 태워준 것도 감사한대 염치도 없이 어떻게 짐까지 내려놓을 수 있느냐!’며 완강히 거절했다고 합니다.
      
사실 우리 인생이 이와 같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첫 번째 이야기가 불신자들의 모습이라면, 두 번째 이야기는 우리 신자들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엇이든 놓아버리면 평안하고 행복할 텐데 그것을 놓지 못한 것입니다. 자기가 붙들고 가려하니 인생이 곤고하고 힘들고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런 우리 인생을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라고 정의하고 있고, 이런 우리를 향해 우리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고 말씀하십니다. 주님 앞에 나와 모든 것을 내려놓으면 쉼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 모든 짐들을 내려놓는다는 것은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긴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든 할 수 없는 일이든 무엇이든지 주님 앞에 내려놓고 다 맡기는 것. 내 가정도, 내 자녀도, 내 사업도, 내 장래도, 내 생명도 모두 내려놓고 맡기는 것입니다. 염려와 걱정, 근심을 영어로 Care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단어에는 안심, 평안, 돌봄의 의미도 있습니다. 무슨 일이든 내가 붙잡고 있으면 그것은 염려와 걱정, 근심거리가 되지만 내려놓고 주님께 맡기면 평안과 안심, 돌봄의 대상이 된다는 뜻입니다.  

‘믿는다’는 말을 라틴어로 ‘크레도스’(credos)라고 합니다. 이 단어는 ‘크레’(영, core: 알갱이, 핵심, 마음이란 뜻)+‘도스’(영, give: 주다라는 뜻)가 결합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나의 가장 소중한 것, 곧 내 마음, 내 생명을 주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이고, 이런 자세가 신자의 모습입니다. 주님을 믿는다 하면서 온전히 내려놓지 못한 것은 차안에 있으면서 보따리를 이고 있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 오늘날 많은 신자들의 모습이 이와 같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저와 여러분의 모습이 아닌지 심심한 반성이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본문 중 24~25절 말씀, “네 보배를 진토(塵土)에 버리고 오빌의 금을 강가의 돌에 버리라. 그리하면 전능자가 네 보배가 되시며 네게 귀한 은이 되시리니” 이 말씀은 제게 참으로 의미가 있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고비마다 이 말씀의 응답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 신앙생활의 핵심을 교훈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요12:24절에서,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고 하셨는데, 같은 원리입니다. 우린 버림으로써 얻습니다. 내 자신을 버림으로써 주님을 얻고, 육적인 생명을 버림으로 영원한 생명을 소유합니다. 세속적인 정과 욕심을 버림으로 천국을 얻게 되고, 나의 야망을 버림으로 주님이 주시는 비전을 품게 됩니다. 세속적인 안전을 버림으로 영적인 평화와 평안을 얻게 되고, 이 땅의 보배를 버림으로 천국의 보화를 얻게 됩니다. 본문은 이와 같은 소중한 진리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주님께 쓰임받고, 우리가 드린 기도가 응답받을 수 있는 원리를 가르쳐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처음 접하게 된 것은 1990년 1월 첫 주입니다. 결혼과 신대원 시험을 앞두고 년 초에 기도원에 가서 일주일 동안 금식기도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금식을 하면서 성경을 읽다가 오늘 본문의 말씀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그 때 저는 네 보배를 진토에 버리라는 말씀에 따라 네게 있어서 보배가 무엇인지 먼저 메모지에 적었습니다. 그리고 하나씩 기도하면서 지웠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반드시 받아야 할 훈련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 내려놓음의 훈련입니다.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을 버리는 훈련입니다. 포기하고 주님께 전적으로 맡기는 훈련입니다. 모세가 미디안 광야에서 40년 동안 양치기를 하고, 이스라엘 백성이 40년 동안 광야를 방황하고, 바울이 아라비아 사막에서 13년 동안 생활한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그 동안 붙잡고 있던 모든 보배들을 내려놓는 훈련이었습니다. 모든 이 훈련의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나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 중에 가끔 가정적으로, 경제적으로, 혹은 일신의 어려움을 당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는 장차 우리를 주님의 귀한 일군으로 사용하시고자 내려놓음의 훈련을 하신 것입니다. 포기하고 주님께 전적으로 맡기는 훈련입니다.

D.L.무디는 모세의 생애를 3기로 나누어 설명을 하였습니다. 제1기는 I am Something, 나는 무엇인가 있고, 그래서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시기입니다. 제2기는 I am Nothing, 나는 아무것도 없고,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시기입니다. 그리고 제3기는 I am Nothing을 통해 주님께 쓰임받은 시기라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I am Something 시기의 모세를 사용하지 않고, I am Nothing 시기의 모세를 사용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쓰임받는 비결 중 하나가 우리 가진 것을 모두 포기하는 것, 내려놓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에게 무언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에게 있는 그 무엇을 의지하지 주님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I am Something 시기의 모세가 그랬습니다. 그 때 모세는 당시 대제국 애굽의 권세를 배경으로 모든 것을 가진 인물이었습니다. 그래서 무엇이든지 자기 힘으로 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당시 이런 모세의 태도를 보여주는 내용이 성경에 아주 의미심장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자기백성을 돌아볼 마음이 생겼다’(행7:22)는 말씀입니다. 이는 모세에게 고통당하는 자기 동족에 대한 자의식이 생겼다는 뜻도 되지만, 감히 스스로 자기 민족의 구원자로 자처하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내게 힘이 있고 능력이 있으니 내 민족을 내 손으로 구원해야겠다는 생각입니다.

둘째는, ‘좌우를 살펴 사람이 없음을 보고......’(출2:12). 이는 당시 모세의, 특히 스스로 무엇인가를 가졌다고 하는 사람들의 치명적인 약점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좌우만 살피지 위를 볼 줄 모릅니다. 위를 본다는 것은 주님의 눈치를 살피고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께 기도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당시 모세는 위를 볼 줄 몰랐습니다. 좌우만 살펴서 사람이 보지 않으니까 살인을 저질렀습니다. 이런 사람은 아무리 탁월해도 하나님의 종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를 사람이 살지 않는 광야로 몰아넣어 사람을 바라보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는 훈련을 시킨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려놓는 훈련, 포기의 훈련은 하나님만 바라보는 훈련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모든 것 다 내려놓고 하나님만 바라보는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또 하나 내려놓음은 기도 응답의 비결입니다. 기도란 모든 문제를 주님 앞에 내려놓는 것입니다. 그 문제에 대한 나의 권리를 포기하는 것하고, 스스로 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대신 주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심각한 문제에 직면했을 때 손을 들고 기도하는 장면들이 나옵니다. 이는 항복의 표시요, 전적인 맡김의 표시입니다. 그러므로 내려놓음은 기도의 가장 중요한 자세입니다.

야고보는 우리의 기도가 주님의 응답을 받지 못한 이유를 두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기도하지 않기 때문이요(약4:2下). 그렇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기도응답을 경험할 수가 없습니다. 다른 하나는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약4:3). 욕심 때문에 기도응답을 경험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욕심이란 단어의 뜻이 ‘금지된 것을 갈망하는 것’인데, 모든 집착의 끈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내려놓지 못한 것은 바로 이 욕심 때문입니다. 옛날 중국의 주나라에 어진 신하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왕이 밥상을 보고 “나라가 잘살게 되었는데 왜 식탁에 상아 젓가락이 오르지 않고 아직도 나무젓가락이 오르느냐?”고 젓가락을 던지면서 호통을 쳤습니다. 그 어진 신하는 몹시 근심하기 시작했습니다. 아예 집밖으로 나오지 않았습니다. 친구들이 그가 왕의 젓가락 때문에 고민한다는 얘기를 듣고 그를 찾아 물었습니다. “아니 자네 왕의 젓가락 하나 바꾸는 것이 무슨 대수라고 그렇게 고민하는가?” 그러자 그 신하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런 얘기 하지 말게. 상아 젓가락이 대수롭지 않은 것 같아도 그리 단순하지 않네. 상아 젓가락을 장만하면 그 다음은 금 그릇을 가져오너라. 그 다음에는 산해진미로 밥상을 채워라. 다음은 금상을 만들어라. 다음은 아방궁을 지어라. 끝없이 임금이 탐욕을 낼 것인데 백성들이 그를 채우기 위해서 얼마나 세금을 찬탈 당하고 고생할 것인가.” 그래서 자기가 고민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런 욕심이 있는 한 기도응답은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이용규 선교사가 쓴 「내려놓음」이란 책에 나온 몽골자매 이야기입니다. 예배시작 시간이 거의 다 되어 한 자매가 땀이 범벅이 되어 교회를 들어왔습니다. 사연인즉 소를 잃어 버렸는데, 소를 찾다가 예배시간이 다 되어 소 찾기를 포기하고 예배를 드리기 위해 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기 위해 그 소중한 소까지 포기한 그 자매의 믿음에 교회의 모든 지체들이 놀라며, ‘예배를 위해 소를 포기한 이 자매를 실망시키지 말아달라며’ 위하여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예배를 마쳤는데, 예배당 밖에서 소 울음소리가 들려 나가보았더니 그토록 찾아 다녔던 소가 예배당 앞에 와있었다고 합니다. 내려놓고 주님께 맡겼더니 주님께서 놀랍게 역사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책의 저자는 말하기를 우리가 내려놓으면 하나님이 채우신다고 강조합니다. 이것이 응답받는 기도의 중요한 원리인 것입니다. 저 역시 이런 경험이 있습니다. 특히 교회개척 후에 계속하고 있습니다(손용규 집사님 가정, 강호정 집사님과 그 자매들 가정, 최동현 집사님 가정).

교회개척 1개월 반이 되었을 때(아마 이 때쯤 되었을 것입니다), 40일 특별기도회를 시작하였습니다. 기도회를 시작한 다음 날 손용규 집사님을 위해 기도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그 때부터 우리는 모일 때마다 손 집사님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손 집사님이 퇴원을 했는데, 교회는 천주교로 나갈 것 같다고 했습니다. 그 동안 손 집사님을 위해 계속 기도는 했지만 우리교회 나오게 해달라고 기도한 적은 한번도 없습니다. 물론 개척교회를 한 목사로서 우리 교회에 나오면 좋겠다는 생각을 안했다면 비정상이겠지요. 마음의 간절한 소원은 있었지만 그렇게 기도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픈 사람 놓고 내 이속을 먼저 챙기는 것 같은 기분 때문입니다. 그런데 손 집사님이 천주교회로 나간다니까 그 생각까지도 포기가 되었습니다. 그 때가 2005년 4월 둘째 주일일 것입니다. 우리 손 집사님이 모자를 쓰고 가족과 함께 우리 주일예배에 참석하였습니다. 그 때까지도 전 그저 인사차 교회에 온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함께 식사를 하고나서 손 집사님이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이 교회에 다니면 안됩니까?’ 정말 감격스러운 순간이었습니다. 엄청난 선물을 받은 기분이었습니다. 정말 내려놓으니까, 우리 주님께서 다시 주신 것입니다. 비록 이 일을 위해 직접 기도하지 않았을지라도 마음의 소원을 아시고 응답하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내려놓는 것을 빼앗기는 것으로, 포기하는 것을 잃어버린 것으로, 붙잡고 있던 것을 놓아버리면 죽음으로 착각합니다. 빼앗기고, 잃어버리고, 죽은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내가 놓으면 주님이 붙잡아주시고, 내 보배를 버리면 주님이 보배가 되어주십니다. 포기하면 주님이 채워주십니다. 더욱 신비한 것은 이렇게 주님을 위해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포기하고 살면, 주님이 그것들을 다시 다 사용하게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의 생애가 이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주님을 믿은 후 가진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버렸습니다. 그가 배운 헬라 철학도, 유대교의 율법도, 로마 시민권도 모두 포기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의 선교과정에서 이 모든 것을 다시 다 사용하셨습니다. 내가 내려놓아야 주님이 사용하십니다. 내 자신을 사용하시고,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사용하십니다. 정말 값지게 사용하십니다. 내가 붙들고 있으면 그것은 나의 일신을 위해서 밖에 사용하지 못합니다. 때로는 그것이 내 자신과 이웃을 망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 앞에 내려놓고 맡기면 자기 자신은 물론 주님의 영광과 이웃의 유익을 위해 사용되는 것입니다.


댓글목록

서원주님의 댓글

서원주 작성일

주님을믿는다고말로만 생각으로만 지식으로만이었던나 ...  주님께온전히 내려놓음으로 흔들리는 신앙과 직장의주일성수가 일치가될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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