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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로운 요셉(06-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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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8,536회 작성일 06-12-26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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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로운 요셉
마1:18~25

마귀가 가장 좋아하는 날
어느 글에서 보았는데, 마귀가 일년 중 가장 좋아 하는 달이 12월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연말이라 하여 망년회 등 여러 종류의 친목모임을 가지면서 망가지는 달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마귀가 가장 좋아하는 날은 성탄절이라고 합니다. 이는 마귀가 예수님의 탄생이 기뻐서 좋아하는 날이 아니라, 신자와 교회들 역시 세속주의, 상업주의에 편승하여 성탄의 본질을 잊고 가장 심하게 망가지는 날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모 일간지에서, 젊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성탄절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른 단어가 무엇인지’를 설문조사를 실시하였습니다. 가장 많이 나온 대답이 산타클로스이고, 다음으로 선물, 연인, 하얀 눈, 썰매, 화려한 트리, 루돌프 등 다양한 대답들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유감스러운 것은 정말 중요한 ‘예수님 그리스도’란 단어는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지난주에 유럽 어느 초등학교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한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성탄절에 선물을 주는 분은 산타클로스가 아니라 부모님이고, 성탄절의 주인공도 산타클로스가 아니라 예수님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관할 교육위원회에서 이 선생님을 파면시켰습니다. 그 이유는 아이들에게서 꿈과 상상력을 빼앗아버렸다는 것입니다. 꿈과 상상력이 진실보다 더 중요한 것인지, 진실에는 꿈과 상상력이 없는 것인지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예수님이 떠오르지 않는 성탄절, 산타클로스가 주인공이 된 성탄절이라면 이 성탄절이 마귀가 가장 좋아하는 날일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무튼 성탄절은 기쁨의 절기입니다. 그래서 온 세상이 함께 즐거워하는 것은 마땅한 일입니다. 죽어야 할 사람에게 생명의 길이 있다는 소식보다 기쁘고 즐거운 소식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 주님의 오심은 세상에 이런 소망을 가져오셨습니다. 때문에 온 세상이 함께 즐거워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이 성탄의 계절에 꼭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에게 이런 기쁨과 소망을 주기 위해 큰 희생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기억한다면 보다 경건하고 엄숙한 즐거움으로 이 성탄절을 보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선 우리 주님의 희생을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탄생하신 것은 엄청난 희생의 사건입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을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위해 친히 행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길만이 죄로 죽은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의 산고(産苦)로 새 생명이 세상에 태어난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러므로 성탄절은 주님의 이 엄청난 희생을 감사하며 즐거워하는 절기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마귀가 떠나고 천사가 수종을 드는 경건한 즐거운 날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마리아와 요셉의 희생을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특히 본문은 예수님의 잉태사건으로 인한 요셉의 심정과 태도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요셉의 희생으로 메시야 약속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가 되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요셉을 ‘의로운 사람’(어떤 곳에서는 ‘착한 사람’이라고 번역함)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 시간 주님의 탄생과 관련하여 성경이 의로운 사람이라고 부른 예수님의 육신의 아버지 요셉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세 종류의 사람                                                                        
세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첫째는 인간은 육체를 가졌기에 이 육체에 따라 본능이 주도하는, 육체 혹은 본능 주도적인 인간이 있습니다. 소위 육체를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 감정대로, 기분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헬라 철학 중에 에피쿠로스라고 하는 쾌락주의 철학이 바로 여기에 속합니다. 이들은 육체적인 쾌락이 최고의 행복이고, 본능에 충실한 것이 가장 인간적인 모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사람의 특징은 자기 욕심을 벗어나지 못한 자기중심적인 사람입니다. 성경으로 말하면 팥죽 한 그릇에 자신의 장자권을 팔아먹은 ‘에서와 같은 사람’, 눈에 보이는 대로 소돔과 고모라 땅을 선택한 ‘롯과 사람’이 여기에 속합니다.

둘째는 항상 합리적인 이론으로 이치에 맞는 삶을 살아가려는 이성 주도적인 인간이 있습니다. 철학적 혹은 도덕적 인간입니다. 이들은 본능이나 감정보다 이성과 양심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이들은 고행이나 금욕생활 등을 통해 육체적 본능을 억제하고 심지어는 학대하면서 이성과 양심에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 최대한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되지 않는 삶을 추구합니다. ‘내가 하기 싫은 일은 다른 사람에게 요구하지 마라’(공자)라는 말이 여기에 해당된 사람들의 주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소위 우리가 말하는 인류의 스승이란 분들이 이 부류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셋째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가진 성령 주도적인 인간입니다. 성령이 그 안에 계셔서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주도하시는 삶입니다. 내가 내 삶을 이끌어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끌어 가시도록 맡긴 삶입니다. 즉 하나님이 주도하시고 나는 응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시하신대로, 하나님께서 명령하신대로 그저 나는 따라가는 것. 이것이 성령 주도적인 사람입니다.

성령 주도적인 사람에게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성령 주도적인 사람은 1)자기 감정, 기분, 욕심에 따라 살지 않습니다. 2)법 이상, 이성과 양심 이상의 삶을 삽니다. 단순히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소극적인 삶을 살지 않습니다. 3)자기 유익보다 상대방의 유익, 하나님의 영광을 먼저 생각합니다. 그리고 4)항상 주님의 지시하심을 따라 삽니다. 성령과 말씀에 민감하다는 뜻입니다. 주님의 뜻이라면 어떤 희생도 감수하면서 헌신하고 충성하는 사람입니다.

사도행전에 나온 바울을 보면 이를 분명하게 알 수가 있습니다. 바울이 세 번의 선교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데, 예루살렘에서 큰 어려움을 당할 수 있으니 올라가지 말라고 제자들이 울면서 말렸습니다. 그 때 바울은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갑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행21:13). 이것이 성령 주도적인 사람의 모습입니다. 자기에게 해가 될지라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사용하시어 당신의 뜻을 이루시고 축복하십니다. 본문 나온 요셉 또한 이와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요셉에 대하여
불행하게도 예수님의 육신의 아버지 요셉에 대한 기록이 성경에 거의 없습니다. 예수님의 탄생과 더불어 몇 군데 간단하게 언급한 정도이고, 그마나 본문이 요셉에 대한 가장 많은 기록입니다(성모 마리아에 대해서도 마찬가집니다. 이는 성경이 누구를 지향하고 있는 지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도 요셉의 개인적인 프로필은 생략되었습니다. 성경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그가 몰락한 다윗 왕가의 후손이고, 가난한 목수였다는 것이 전부입니다. 그런데 전설에 의하면 요셉은 한번 결혼한 경험이 있었고, 자녀들도 있었습니다. 나이가 들어 마리아와 재혼하였으나 일찍 죽었다고 합니다. 그의 성품은 본문이 말씀하고 있는 대로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이 의로움이란 율법적으로 흠이 없는 절대적인 의인을 뜻한 것이 아니고, 상대적으로 사랑과 정의를 겸한 사람이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어떤 성경에서는 ‘착한 사람’이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이게 더 정확한 번역이라 생각됩니다.

성령 주도적인 사람, 요셉
특히 본문에 나온 요셉은 성령 주도적인 사람입니다. 바로 이 점이 그가 사랑과 정의를 겸한 의로운 사람이 되었던 비결입니다. 본문 18절에 의하면 요셉은 자기와 정혼한 마리아의 잉태소식을 듣습니다. 이는 견딜 수 없는 수치스럽고 불명예스러운 이야기입니다. 그는 이 엄청난 사건을 자신의 감정대로 처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율법대로 처리하지도 않았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약혼한 처녀가 정조를 잃으면 마을 밖으로 끌어내어 돌로 쳐 죽이도록 되어 있습니다(신22:20~21,23~24). 그렇지만 요셉은 드러내지 않고 가만히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습니다(:19). 그 이유는 자신의 감정보다 마리아의 안전과 생명을 먼저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성령 주도적인 사람의 특징입니다.

여기서 ‘드러내지 않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라는 말씀은, 마리아를 공적 재판에 넘기지 않겠다(마리아를 죽음으로 내몰지 않겠다)는 결정적인 결심(‘드러내지 않고’)과 그녀와 파혼하려는(그러면서도 율법을 존중히 여기고자) 소극적인 생각(‘가만히 끊고자 하여’)을 뜻합니다. 이는 이 어려운 상황을 피하려는 요셉의 간사한 태도를 말하려고 한 것이 아닙니다. 율법으로부터 마리아를 보호하면서도 그 율법을 존중하려는 요셉의 고뇌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요셉의 마리아에 대한 사랑과 하나님의 법을 지키려는 정의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뜻을 찾아 몸부림치는 과정이라 할 수가 있습니다. 이런 점 때문에 성경은 요셉을 의로운 사람이라 말씀한 것입니다.

감정 주도적인 사람이 이런 경우를 당하면 당장 자기 감정, 기분대로 상대에게 화풀이를 하거나 자기 손으로 일을 내고 맙니다. 반면 이성 주도적인 사람의 경우는 율법에 따라 합법적으로 이 문제를 처리합니다. 그런데 요셉은 자기 감정대로 이 일을 처리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율법에 따라 처리되는 것도 원치 않았습니다. 우린 여기서 이 두 가지를 넘어서고 있는 요셉의 태도를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요셉을 성령 주도적인 사람이라 말한 것입니다.

바로 이렇게 고민하는 요셉에게 하나님께서 천사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가로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20~21). 하나님은 항상 무슨 문제든지 진지하게 고민하는 사람에게 답을 주십니다. 감정대로 처리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몸부림치며 찾는 사람에게 응답하십니다. 요셉은 천사의 말을 듣고 즉시 순종했습니다. “요셉이 잠을 깨어 일어나서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 아내를 데려왔으나,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치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24~25). 요셉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마리아를 데려왔고, 아들을 낳자 그 이름을 예수라고 지었습니다. 여기에 보면, 요셉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 이상으로 순종을 하였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요셉이 성령 주도적인, 하나님의 말씀 주도적인 사람인 것을 보여줍니다.(이 외에도 마2:13~14,19,22에 요셉이 성령 주도적인 사람이었음을 보여주는 예가 나옵니다.)

사람은 육체를 입었기에 육체적인 욕망이 있고, 정신을 가졌으므로 합리성도 추구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으므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갈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주도하는 것이 무엇이냐, 누구냐에 따라, 육체(본능) 주도적인 인간, 이성 주도적인 인간, 성령 주도적인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삶을 누가 주도하고 있습니까? 이 요셉을 통해 나는 어떤 종류의 사람인지 진지하고 솔직하게 자신을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롬8:9절에,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한 신자들은 성령 주도적인 사람이 되어야 함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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