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에서 구하소서!
페이지 정보
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3,563회 작성일 15-11-01 12:57본문
악에서 구하소서!
마6:9~13
2015. 11/1. 08:00, 11:00
유혹의 콩알
어느 여인이 쇼핑을 갔다가 아름답지만 매우 비싼 드레스에 현혹되어 그만 그것을 사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 저녁, 그녀는 남편에게 조심스레 그 옷을 보이며 가격을 말해 주었다. 가격에 놀란 남편이 아내에게 소리쳤다. ‘당신은 도대체 정신이 있는 사람이야? 우리 형편에 어떻게 그렇게 비싼 옷을 살 수 있어?’ 그러자 그녀가 대꾸를 했다. ‘마귀가 유혹을 해서 넘어지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남편이 말했다. ‘그러면 예수님처럼 사단아 물러가라고 외쳤어야지......!’ 그녀는 겸연쩍게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당연히 그렇게 했지요!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소리쳤더니, 뒤에서 다시 이런 소리가 들려왔어요! 뒤에서 보아도 그 옷이 너무너무 아름답소!’ 사단의 집요한 유혹과 그 유혹에 약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는 이야기다. 사단은 인간을 끊임없이 유혹하고, 인간은 그 유혹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
영국의 부흥 전도사 로랜드 힐 목사가 어느 날 거리를 지나가다 희한한 광경을 보았다. 돼지들이 마치 양처럼 어떤 사람을 줄줄 따라가고 있는 것이었다. 호기심이 생긴 그는 그 뒤를 따라가 보았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사람이 도살장으로 들어가는데도 돼지들은 아무런 저항도 없이 그저 따라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 광경이 너무 신기해서 돼지들을 데리고 온 사람을 만나 물었다. ‘당신은 어떻게 해서 돼지들이 이곳까지 쉽게 따라오게 했습니까? 그 비결이 무엇입니까?’ 그 사람이 이렇게 대답했다. ‘나에게 특별한 비결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보시다시피 나는 완두콩 바구니를 들고 오면서 계속 몇 알씩 흘려주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돼지들은 그 콩알에 정신이 팔려 그 길이 죽음의 길인 줄도 모르고 따라온 것입니다.’ 이 말에 그는 사단이 우리를 유혹하는 방법도 바로 이와 같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사단도 우리를 쾌락의 콩, 정욕의 콩, 욕심의 콩, 자랑의 콩, 명예의 콩, 지식의 콩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종류의 콩알로 유혹한다. 그런데 우리는 사단이 던져주는 그 콩알에만 정신이 팔려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생각하지도 않는다. 이렇게 되면 그 결국은 어떻게 될까? 영혼의 도살장 지옥으로 가지 않겠는가? 주기도문 여섯 번째(마지막) 간구는 이런 유혹의 콩알에 넘어가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이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인생과 시험
인생은 시험의 연속이다. 그래서 시험이 없는 사람은 없다. 시험은 누구에게나 어디에나 언제나 있다. 가장 이상적인 장소 에덴동산에서 살았던 아담과 하와도 시험을 받고, 심지어는 완전한 인간이셨던 예수님께서도 시험을 받으셨다. 그것도 40일 동안 금식기도 후에 시험을 받으셨다. 그러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 우리처럼 연약한 인간들에게 시험이 얼마나 많겠는가? 이 시험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우리 인생을 상승시키는 시험이다. 이를 ‘시련’(연단)으로서 시험(test)이라고 한다. 다른 하나는 우리를 낙심하게 하여 무너뜨리는 시험이다. 이를 ‘유혹’으로서 시험(temptation)이라고 한다. 유혹으로서의 시험 배후에는 사단이 있다. 사실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모든 악한 일의 배후에는 사단이 있다. 신학자 헬무트 틸리케는 제2차 대전 후 이렇게 말했다. ‘시험 뒤에는 시험하는 자가 서 있고, 거짓 뒤에는 거짓을 말하는 자가 서 있다. 죽음과 피흘림의 배후에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가 서 있다.’ 그는 인간이 행한 모든 악행 뒤에 악한 존재 사단을 본 것이다.
인간이 경험하는 모든 종류의 악, 그로 인해 파생되는 모든 불행 뒤에는 반드시 악한 자 사단이 있다. 우리가 악을 행하면 그 악은 우리의 개인적 악행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사단이 우리 자신을 점령하여 자신의 활동무대로 만들어버린다. 사단은 악을 행한 사람의 양심을 무디게 하고, 무감각하게 하여 마침내 자신의 하수인으로 만든다. 그래서 주님께서 바리새인을 향하여 ‘독사의 자식’이라고 불렀고, 또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라고 했다. 그들의 악행 뒤에 있는 사단을 보셨기 때문이다. 주기도문의 마지막 간구는 이와 같은 사단으로부터 보호해 달라는 기도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단, 곧 사단의 시험에 빠지지 않고 날마다 승리하는 삶을 살 수가 있을까?
1. 자신의 연약성을 알아야 한다.
인간이 대단한 것 같지만 사실은 참 연약한 존재다. 바울은 이런 인간을 깨지기 쉬운 ‘질그릇’에 비유했다. 작은 일에도 쉽게 상처받고, 쉽게 좌절하고, 쉽게 무너질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파스칼 또한 인간을 ‘갈대’라고 했다. 가벼운 유혹의 바람에도 심하게 흔들리고, 꺾일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연약한데, 세상은 시험이 많다. 사도 야고보는 ‘내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1:2)고 했다. 시험이 ‘여러 가지’라는 것이다. 어떤 영어 성경은 이를 ‘full colors’라고 매우 인상적으로 번역을 하였다. 우리가 직면해야 할 시험이 얼마나 많은지를 아주 실감나게 표현하고 있다. 사실 우리가 듣고 보고 경험하는 모든 것이 유혹거리다. 예수님도 시험했던 사단은 이런 여러 유혹거리를 가지고 우리를 시험한다. 이것이 저와 여러분이 직면한 현실이고, 또한 실존이다.
많은 사람들이 사단의 시험에 허무하게 무너진 이유는 사단이 얼마나 다양한 유혹으로 집요하게 시험하는지를 알지 못하는 것,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를 모르는 것 때문이다. 주님께서 잡히시기 전날 밤 베드로를 보라! 그는 주님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바치겠다고 장담했다.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마26:33,35). 그런 그가 (몇 년 후 몇 달 후 며칠 후도 아닌)바로 그날 새벽에 그것도 (힘이 있는 권력자나 거대한 권세 앞이 아닌)어린 소녀 앞에서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저주까지 하는 모습으로 무너졌다(마26:69~74). 이것은 그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부족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는 누구보다 주님을 사랑했다. 그 사실을 주님도 잘 아셨다. 문제는 그가 자신의 연약성을 알지 못한 것이다. 자신이 얼마 연약한 존재인지를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주기도문의 이 간구는 베드로처럼 작은 시험에도 무너질 수 있는 우리의 실존적인 현실을 직시하라는 말씀이다. 세상은 유혹이 많은데, 우리는 그 유혹에 속수무책이라는 사실, 사단은 강한데 우리는 연약하다는 사실을 기억하라는 것이다. 신앙생활은 여기서부터 시작이 된다. 나는 부족하고, 연약하다. 나에게는 소망이 없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늘 사단의 시험에 빠지는 절망적인 죄인이다. 그래서 주님의 도우심과 용서가 필요하고, 주님 없이는 살 수가 없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2. 깨어 기도해야 한다.
훈련이 잘 된 개가 있었다. 주인은 그 개의 복종심을 정기적으로 점검했다. 어느 날, 주인이 먹음직스러운 고깃덩어리를 던져주자 개가 그것을 덜컥 물었다. 그 때 주인이 ‘먹지 마!’ 하고 말했다. 그러자 개는 물고 있던 그 고깃덩어리를 내려놓고 주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주인이 가는대로 따라다니며 주인만 볼뿐 고깃덩어리는 처다 보지도 않았다. 이 개가 유혹을 이길 수 있는 비결이 바로 여기에 있다. 고깃덩어리를 보지 않고 주인에게 시선을 집중한 것이다. 주인의 소리에만 귀를 기울인 것이다. 기도는 소위 ‘주(主) 바라기’다. 기도는 우리 마음과 생각, 눈과 귀를 주님께 집중하는 훈련이다. 그래서 찬송가 가사처럼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 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 세상과 나는 어디 가고 주님만 보인 것일까? 이미 우리가 천국에라도 갔다는 말인가? 이것은 우리의 초점이 온전히 주님께 맞춰질 때 경험되어지는 현상을 고백한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기도를 해야 하는 이유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기도를 요구하신 이유다. 기도하면 유혹 많은 세상도, 사단도, 그 유혹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연약한 나도 간 곳은 없고 오직 주님만 보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단의 유혹에 쉽게 빠지는 이유, 사단이 던져준 미끼에 덜컥 걸려드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우리 인생의 초점을 주님께 두고 살지 않기 때문이다. 주님은 보지 않고 사단의 활동무대인 세상만 보고, 사단이 던져놓은 화려한 미끼만 보기 때문이다. 주님의 음성은 듣지 않고 사단의 달콤한 속삭임만 듣기 때문이다. 이런 우리를 잘 아시는 주님께서 마지막으로 이 기도를 가르쳐주신 것이다.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즉 악한 자에게서 구해달라고 깨어 기도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고픈 배를 채울 일용할 양식이 필요하고, 매일 짓는 죄를 해결할 수 있는 용서가 필요한 것처럼 시험에 빠지지 않기 위한 매일의 보호가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루터는 매일 저녁 잠들기 전에 하루의 생활을 돌아보면서 용서해 달라(Forgive me)고 기도를 드리고, 아침에는 오늘도 악한 자의 시험에서 지켜 달라(Protect me)고 기도했다고 한다. 젊은 시절 기도하지 않다가 시험에 빠졌던 베드로도 훗날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5:8) 라고 역설했다. 시험에 빠지지 않으려면, 그래서 사단의 시험으로부터 보호를 받으려면 깨어서 기도해야 한다. 기도를 쉬면 머리를 드는 것이 있다. 사단의 유혹이다. 기도소리가 작아지고 기도시간이 줄어들면 사단의 활동무대가 넓어지고 영향력이 커진다. 기도를 중단하는 순간 우리 마음은 사단의 놀이터가 된다. 그래서 주님은 시험에 들지 않도록, 즉 사단이 우리를 주장하지 못하고, 승리하지 못하도록 깨어 기도하라고 하셨다. 신앙생활에서 기도를 대신할만한 것은 없다. 기도 없는 신앙생활은 호흡을 할 수 없는 허파와 박동이 멈춘 심장과 같다.
죄의 더러움과 심각성
어느 여학교에서 있었던 일이다. 학생들이 립스틱을 화장실 거울에다 칠하곤 했는데, 심지어는 입술자국까지 남겨놓았다. 그 자국이 점점 많아져 골칫거리가 되자 마침내 교장 선생님이 조치를 취했다. 교장 선생님은 관리인과 함께 학생들을 화장실로 불렀다. 교장 선생님은 관리인에게 거울에 묻은 입술자국이 문제가 되고 있음을 설명했다. 그리고 어떻게 거울에 묻은 입술자극을 지우는지 시범을 보이도록 했다. 그러자 관리인은 학생들 앞에서 변기청소를 할 때 사용하던 자루가 달린 긴 솔을 가지고 입술자국이 묻은 거울을 문질렀다. 그 후, 더 이상 거울에 입술자국이 나타나지 않았다. 학생들은 자기들이 입 맞춘 거울이 무엇으로 닦이고 있는지 보았기 때문이다. 죄가 얼마나 더럽고 심각한지를 기억하는 것도 사단의 시험에 빠지지 않는 비결이다. 모쪼록 삶의 곳곳에 사단이 뿌려놓은 유혹의 콩에 넘어가지 않고 사단의 시험에서 승리하는 매일이 되기를 바란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