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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서처럼 땅에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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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2,126회 작성일 15-10-04 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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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서처럼 땅에서도

마6:9~13

2015. 10/4. 08:00, 11:00

영적 조율(Spiritual Tuning)

폭풍우 속에서 표류(漂流)하던 세 사람이 간신히 어느 무인도에 상륙하였다. 한 사람은 부자였고, 다른 한 사람은 연예인, 나머지 한 사람은 백수였다. 부자와 연예인은 날마다 자신이 살던 곳이 그리웠지만 백수에게는 먹을 것만 있다면 어느 곳이든 상관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들은 바닷가에 앉아 지나가는 배가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도하였고, 그 응답으로 배대신 천사가 나타났다. 천사는 그들에게 한 가지씩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했다. 먼저 부자가 말했다. ‘저는 제가 살던 저택에 돌아가 집사의 수종을 받으며 식사를 하는 것이 소원입니다.’ 그러자 그는 당장 자신의 저택으로 옮겨졌고 진수성찬이 그 앞에 놓여있었다. 이번에는 연예인이 말했다. ‘저는 사람들의 갈채와 환호가 쏟아지는 무대에 다시 서는 것이 소원입니다.’ 그러자 그 역시 그렇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천사가 백수를 쳐다보았다. 그가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저는 별로 바랄 것이 없습니다. 집에 돌아가 봐야 달라질 것도 없고, 그냥 여기 있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그런데 저 혼자 있으려니 그것은 내키지 않네요. 같이 있었던 사람들과 계속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자 그것도 그대로 되었다. 그래서 모든 것이 도루묵이 되고 말았다.

 

인간은 이기적인 존재다. 그러다보니 기도 역시 자신의 뜻만 구하는 이기적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자신의 뜻만 구하는 이기적인 기도는 결국 하나마나한 것이 되고 만다. 이것은 기도뿐만이 아니다. 위 이야기가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고 그저 허공만 울리는 의미없는 소리가 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래서 올바른 기도는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자신의 뜻을 맞추는 것이라고 한다. 주기도문은 구조적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하나님의 뜻에 자신의 뜻을 맞추는 것을 ‘영적 조율’(spiritual tuning)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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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시작 음(音), ‘하나님의 뜻

연주회에서 연주를 시작하기 전에 각종 악기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고 있는 것을 본적이 있을 것이다. 악기의 소리(음)를 맞추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조율’(調律)이라고 한다. 아무리 뛰어난 연주자도 조율되지 않은 악기로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할 수 없다. 아무리 좋은 악기도 조율되지 않으면 올바른 음을 낼 수가 없다. 그래서 연주전에 반드시 조율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조율을 할 때 시작(표준) 음이 있다. 그것은 ‘’(A)음이다(1834년 슈트드가르트 국제회의에서 국제표준음으로 지정하여 현재까지 사용하고 있음). 모든 악기가 이음에 맞춰서 조율을 한 다음 연주를 한다. 우리의 영적 상태도 늘 조율이 필요하다. 연주자들이 연주를 할 때마다 악기를 조율하듯 우리도 매일매일 영적 조율을 해야만 한다. 그리고 이 영적 조율의 시작 음은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의 뜻에 내 뜻, 우리의 뜻을 맞추는 것이다. 계획도, 가치도, 목표도,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에 맞추는 것이다. 그래야 우리의 영적인 삶은 물론 우리 인생이 아름다운 소리를 낼 수가 있는 것이다(3요:2).

 

그래서 저는 새벽마다 늘 두 가지를 마음에 두고 기도를 한다. 하나는 ‘재충전’(recharging)이다. 우리에게 있는 그 어느 것도 영원한 것은 없다. 오래 사용하다보면 낡고 닳고 망가진다. 영적인 것들도 마찬가지다. (휴대폰 배터리처럼)사용하면 방전(탈진, burn-out)이 된다. 그런데 참 다행스러운 것은 우리 육체는 재충전이 불가능하지만 영적인 것들은 재충전이 가능하다는 사실이다. 아무리 방전이 되었어도 다시 충전하면 새것처럼, 아니 그보다 더 강력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4:I6). 그래서 저녁마다 휴대폰을 충전하듯 매일 새벽을 영적 재충전의 시간으로 삼고 있다. 다른 하나는 ‘조율’(tuning)이다. 나침반은 정북(正北)을 가리키도록 만들어졌다. 그런데 주변에서 자기장의 영향을 받으면 정북을 가리키지 못하게 된다. 우리 인생도 하나님의 뜻을 따르도록 창조되었다. 그런데 자신의 욕심과 세상의 유혹과 사단의 방해로 하나님의 뜻에서 늘 벗어나게 된 것이다. 이것이 타락이고, 범죄다. 이것을 바로 잡는 것이 영적 조율이다.

 

뜻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이 시간은 주기도문 세 번째 간구,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10)는 말씀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여기에 ‘하늘’과 ‘’이 대조적으로 언급되고 있다. ‘하늘’은 ‘하나님의 영역’으로 하나님의 뜻이 완전히 실현된 상태를 가리키고, ‘’은 하나님의 뜻이 불완전한 상태를 가리킨다. 땅은 하나님의 뜻보다 인간의 욕심, 세상의 유혹, 사탄의 음모가 뒤엉켜 나타난 곳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도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기도해야만 하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이 이루신다’는 것이다. 우리가 노력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어지게 할 수는 없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뜻을 ‘우리를 통해서’ 이루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하시지만 우리를 통해 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신 것이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주기도문 세 번째 간구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 ‘완성’을 위한 기도이다. 두 번째 간구가 이 땅에 임하신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한 기도였다면, 세 번째는 확장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서 완성되기를 바라는 기도이다. 그런데 그 나라의 궁극적인 완성은 예수님의 재림과 함께 이뤄진다. 때문에 이 기도는 주님의 재림을 간절히 기다리며 드리는 ‘종말론적 기도라고 할 수 있다. 교부 오리겐의 멋진 해석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진다면 땅은 이미 땅일 수 없다. 그때 우리는 모두 하늘에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이 땅에서 온전히 이루어지는 날은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는 때이다. 누가복음 주기도문에 이 부분이 생략된 것도 같은 의미다. 누가복음에서 이 부분이 생략된 것에 대해 학자들은 앞에 나오는 ‘나라가 임하시오며’의 보충적 기도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결국 ‘나라가 임하는 것’과 ‘땅에서 뜻이 이루어지는 것’은 큰 맥락에서 같다. 아무튼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라며 기도해야겠지만 먼저 우리와 우리 가정과 교회에서부터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지도록 힘써야 한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완성’이 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땅에서도 이뤄져야할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께서 이루신다. 하지만 우리를 통하여 이루신다. 그렇다면 우리를 통하여 이 땅에서 이루시고자 하신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 이것은 예수님을 통해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주님은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오셨기 때문이다.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요6:38). 뿐만 아니라 주님의 양식은 주님을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고, 또한 그것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라고 하셨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4:34). 그러면 주님을 보내신 이의 뜻, 곧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요6:39,40).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얻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베드로도 비슷하게 말했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3:9).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당장 심판하시지 않고, 사람들이 하나님의 약속이 더디다고 생각할 만큼 오래 참으신 것은 주님의 재림과 함께 행하시는 종말론적인 심판에서 한 생명이라도 더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배려이다.

 

우린 여기서 우리를 통하여 이 땅에서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알 수 있다. 그것은 ‘영혼구원’이다. 잃어버린 영혼을 위해 기도하고,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그들에게 힘써 복음을 전파하고, 그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일이다. 모든 잃어버린 영혼들을 주님께 돌아오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를 통하여 이 땅에서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다. 주님은 이 일을 위해 이 땅에 오셨고, 이 일을 위해 사셨다(주님의 3대 사역 teaching. preaching, healing). 또한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하셨다.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를 제자로 부르신 이유이고, 맡겨주신 사명이다. 이런 의미에서 첫 번째와 두 번째 간구와 마찬가지로 세 번째 간구 역시 단순한 기도가 아니라 신자와 교회의 사명을 포함하고 있다. 제자들이 언제 세상의 끝이 오냐고 묻자 주님은 이렇게 대답하셨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24:14). 복음전파의 중요성을 강조하신 말씀이다. 복음전파의 완성이 곧 주님이 재림하시는 때이고, 그 때가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때라는 것이다. 신자는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처럼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는 사람들이다. 복음전파는 주님의 재림과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지기를 바라고 기대하는 태도다.

 

철이 든 신자

자식도 철없는 자식이 있고, 철든 자식이 있다. 철없는 자식은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불안하게 하고 힘들게 한다. 하지만 철든 자식은 부모의 마음을 시원케 한다. 부모의 마음을 알고, 뜻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신자도 철든 신자는, 하나님의 마음과 그 심정을 이해하고 아는 사람이다. 철든 신자의 모델은 단연 예수님이시다. 주님의 삶은 온통 하나님의 마음과 뜻, 관심에 집중되어 있었다. 주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이 땅에 오셨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해 사셨고, 그 뜻을 위해 죽으셨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신자의 모델이신 예수님을 푯대로 삼아 신앙을 경주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히12:1~2).

 

주님처럼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그 뜻을 받들어 섬기는 철든 신자가 되자. 그러면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것을 우리도 좋아하고,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을 우리도 싫어하고,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것을 우리도 사랑하고, 하나님이 바라보시는 것을 우리도 바라보고, 하나님의 마음이 있는 곳에 우리의 마음을 두게 될 것이다. 온전한 영적 조율이 일어나게 된다. 이렇게 우리 마음과 가정과 교회에서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지면 우리를 통하여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된다. 이 일을 위해 우리의 기도를 쏟아 붓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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