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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을 거룩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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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1,478회 작성일 15-09-20 1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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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을 거룩하게

마6:9~13

2015. 9/20. 08:00, 11:00

그 이름을 위하여

사극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으로, 병사들이 자기 나라의 깃발 앞에 모이고, 깃발을 앞세우고 행군하고, 또한 깃발을 들고 나가서 적과 싸우는 모습이다. 여기서 깃발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것은 각 나라, 예를 들어 그 나라가 고구려라면 고구려라는 나라를 의미하고, 그 깃발아래 모인 병사들은 고구려의 이름으로 모인 사람이다. 그들은 고구려의 이름을 위하여 전장으로 나아가고, 고구려의 이름을 위하여 싸우고, 고구려의 이름을 위해 죽고, 고구려의 이름을 위해 사는 사람이다. 자신들이 패하는 것은 나라의 이름을 더럽히는 것이고, 승리하는 것은 나라의 이름을 빛내는 것이다. 신자 또한 주님의 이름 앞에 모인 주님의 군사다. 주님의 이름을 위해 살고, 주님의 이름을 위해 일하고, 주님의 이름을 위해 싸우고,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죽기로 다짐한 사람들이다. 우리의 승리는 주님의 이름을 높이고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지만 우리의 실패는 주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고 더럽히는 것이다. 주님의 이름에 모든 것을 건 사람이 신자다. 바울은 자신이 부름 받은 이유가 특히 이방인에게 주님의 이름을 증거하는 것이라고 했다(롬1:5). 신자는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래서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는 신자의 사명이고, 또한 삶의 목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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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이름이란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그 사람 존재자체’를 뜻한다. 그 사람의 실체, 인격, 정체성을 모두 포함하는 것이 이름이다. 그래서 성경에는 어떤 사람의 삶이 완전히 바뀌었다는 뜻으로 그 사람의 이름을 바꾼 사례가 소개되고 있다.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사래가 사라로, 야곱이 이스라엘로, 시몬이 베드로로, 사울이 바울로 바뀐 것이 그것이다. 이름을 개명하여 그 사람이 바뀌었다는 것, 바뀔 것이라는 것, 바뀌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이는 그 사람 자체와 이름이 깊은 연관이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이란 하나님 자신을 의미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을 위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위한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이다. 이 시간에는 주기도문 본론의 첫 번째 간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라는 말씀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첫 번째 간구의 의미

아담이후 인류 역사는 하나님께 대한 끊임없는 반역의 역사였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사용하여 하나님을 모욕하는 역사였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점점 더 심해지고 있다. 지금 우리 시대가 그 절정이 아닌지 모르겠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이 조롱을 넘어 혐오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 오늘의 상황이다. 더구나 신자와 교회의 그릇되고 망령된 행실이 이를 더욱 가속화시키고 있다. 우리를 통하여 영광을 받으셔야 할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이 이렇게 조롱거리가 되고 멸시를 받고 있으니 통탄할 일이다. 그러니 이런 현실에서 주기도문의 첫 번째 간구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너무 중요하고, 절실하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이 한 마디의 짤막한 기도는 간구를 넘어서 우리의 책임과 사명을 담고 있다. 이 말씀은 자칫 오해할 수가 있다. 마치 우리가 거룩하지 않은 하나님을 거룩하게 해드리는 것처럼 보여질 수가 있기 때문이다. 사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하여 거룩하게 될 필요가 없는 분이시다(이 구절이 단순과거 수동태인 것이 이를 강조함). 하나님은 원래 거룩하시고, 또한 스스로 거룩하게 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거룩’은 서론에서 ‘하늘에 계신’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초월성을 의미한다. 그러니 초월적인 존재이신 하나님이 어떻게 인간을 통해 거룩해질 수가 있겠는가? 하나님은 홀로 거룩하시고, 홀로 위엄이 넘치시고, 홀로 영광이 가득하신 분이시다. 그렇다면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란 무슨 의미일까?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1. 그 거룩하신 이름을 잘못 사용하지 말라!

주기도문의 첫 간구는 십계명 제3계명과 연관이 있다. 이 계명 역시 하나님의 이름과 관련된 것이다.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여호와는 그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출20:7). 여기서 주목해야할 단어는 ‘망령되게’이다. ‘망령되게’란 말은 ‘헛되게’, ‘거짓되게’, ‘함부로’라는 뜻이다. 고대사회에서는 신의 이름으로 그 신의 신적인 능력을 이용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신의 이름을 이용해서 축복과 저주를 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마법도 행했다. 하나님의 이름을 이와 같이 헛되고 의미도 가치도 없는 쓸데없는 일에 함부로 사용하지 말라(濫用)는 뜻이다. 헛된 일에 잘못 사용하지 말고(誤用), 이기적인 야망을 위하여 거짓되게 사용하지 말라(惡用)는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것을 아주 철저하게 지켰다. 하나님의 이름을 나타내는 글자(יהוה)를 발음조차 하지 않고, ‘아도나이’(אדוני, 주님)나 ‘하솀’(השם, 그 이름)이란 글자로 대신하여 발음하였다. 필사를 할 때도 하나님의 이름이 나오면 사용하던 붓을 깨끗이 씻은 다음 사용했다. 그 뿐만 아니라 문장에서도 하나님을 주어로 직접 거명하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주어가 생략된 수동태 간접화법을 사용하였다. 이것을 히브리 문학에서 말하는 ‘신적 수동태’ 혹은 ‘신학적 수동태’라 부른다. 주기도문 첫 번째 간구도 이 신적 수동태로 되어 있다.

 

2. 그 거룩하신 이름을 빛나게 하라!

하나님의 이름을 남용(濫用), 오용(誤用), 악용(惡用)하지 말라는 것이 십계명 제3계명이 금하는 명령이다. 주기도문 첫 번째 간구도 소극적으로는 같은 의미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함부로, 거짓되게, 잘못 사용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런데 제3계명과 첫 번째 간구는 표현에 있어서 차이가 있다. 3계명은 소극적인 명령(‘~하지 말라!’)으로 되어 있고(물론 3계명에도 적극적인 의미가 포함 되어 있음), 첫 간구는 적극적인 청원(‘~하게 하소서!’)으로 되어 있다.

 

이 첫 번째 간구는 소극적으로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헛된 일에 함부로 사용하지 말라는 것이지만, 적극적으로는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이름이 우리를 통하여 존경과 영광을 받으시고, 그 거룩한 명성이 널리 찬양과 경배를 받으시도록 하나님께 드리는 경건한 바램(요청)이다. 즉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이 더욱 높여지고, 크게 드러나고, 빛나게 해달라는 뜻이다. 나아가서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이름이 더욱 높여지고, 크게 드러나고, 더욱 빛나도록 살겠다는 다짐이다. 세계적인 컨설턴트 브라이언 트레이시는 마케팅 업무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 ‘고객에게 당신의 제품을 팔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의 제품을 빛나게 해서는 안됩니다. 언제 어디서나 당신의 고객이 빛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야 합니다.’ 탁월한 세일즈맨이 되려면 자신이 팔고자 하는 제품을 빛나게 하지 않고, 언제 어디서나 고객이 빛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신자도 마찬가지다.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을 빛나도록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런 사람이 성숙한 신자다. 이것이 첫 번째 간구의 정신이다. 단순히 하나님의 이름을 잘못 사용하는 것을 넘어서 우리를 통하여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이 빛나도록 하는 것이다. 이런 책임과 사명이 우리에게 있다. 그래서 루터는 이 부분을 이렇게 설명하였다. ‘이 부분은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영광의 찬양일 뿐만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을 내 생활을 통해서 거룩하신 하나님으로 세상에 증거하기 위한 성화의 책임을 동반한다.’ 우리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빛나게 하는 것은 물론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고 따르며 섬길 수 있도록, 그래서 모든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더 많이 기도해야 합니다!

테레사 수녀가 미국을 방문했을 때, 공항 인터뷰 장에서 한 기자가 요청을 했다. ‘미국에 오신 기념으로 미국인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한 마디 해주세요?’ 그러자 수녀가 짤막하게 대답했다. ‘그래요. 미국인들은 더 많이 기도해야 합니다.’ 물론 신자로서, 특히 수녀로서 기도해야 한다는 말은 당연하지만 그래도 의외였다. 지금까지 살아온 그녀의 삶에 비춰볼 때, 기도해야 한다는 말보다는 ‘더 많이 베푸세요. 더 많이 섬기세요. 더 많이 나누세요.’ 라고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녀가 미국인들에게 ‘더 많이 기도해야 합니다.’ 라고 이렇게 말을 한 이유가 무엇일까? 아마도 그녀의 눈엔 미국인들이 기도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을 정도도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지만 영적으로는 매우 빈곤하고 곤고하게 보였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사실 말로는 하나님을 말하지만 하나님을 인정하는 삶의 자리는 날로 좁아지고 있다. 집의 평수를 넓히는 데는 관심이 많아도 하나님을 인정하는 자리를 넓히는 데는 관심이 부족하고, 사람들과의 관계는 소중히 여기면서 하나님과의 관계는 소홀히 하고 있다. 게다가 앞에서 말한 대로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모독하는 문화가 급격히 확산되고 있다. 이런 세속의 도전 앞에 신자와 교회가 더 많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 그것은 ‘기도’다.

 

예전에 나온 「사막을 건너는 여섯 가지 방법」이란 책이 있다. 여기에 사막을 건너는 방법의 하나로 ‘지도가 아닌 나침반을 따라가라.’는 내용이 있다. 사막에서는 지도가 별다른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사막은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이다. 지도에 나온 지명이나 길은 모래폭풍이 한 번 지나가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다. 그러면 사막에서 방향을 잃게 되고, 방향을 잃으면 사막에 갇히게 된다. 그래서 사막에서는 지도보다 나침반을 따라가는 것이 훨씬 현명한 일이라는 것이다. 나침을 따라가면 방향을 잃지 않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살면서 종종 부딪히는 사막과 같은 현실에서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은 다름 아닌 ‘방향성’(directivity)이다. 나침반이다. 그런데 우리 인생의 그 나침반이 곧 기도이다. 그러므로 기도하지 않는 것 나침반을 무시하거나 잃어버린 것이다. 그러니 사람이 기도를 잃어버렸다는 것은 자신을 잃어버렸다는 말과 같고, 삶의 방향을 잃어버렸다는 것과 같다. 스스로 자신의 눈을 찌르고 어둠 속에 갇힌 것과 같다. 그래서 테레사 수녀가 미국인이 풍요와 안락한 생활에 빠져 인생의 올바른 방향을 잃지 않도록 더 많이 기도해야한다고 말한 것이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기도문을 주신 것도 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인생의 방향감각을 잃지 않고 살도록 주신 것이다. 한주간도 열심히, 간절히 기도하시기 바라며, 특히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드러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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