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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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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2,555회 작성일 15-09-14 1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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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마6:9~13

2015. 9/13. 08:00, 11:00

사단이 노리는 보물, 주기도문

도적과 사단의 공통점은 우리에게 있는 귀중한 보물을 노린다는 것이다, 도적은 우리의 물질적인 보물에 있고, 사단은 영적인 보물에 있다. 사단이 노리고 있는 보물 중에 하나가 주기도문이다. 그런데 이런 사단의 계획은 실패하고 말았다. 대부분의 신자들이 신앙생활을 시작하면서 주기도문을 암송하여 마음에다 새겨놓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단이 도적질을 할 수가 없게 된 것이다. 그러니 사단의 계획은 완전히 실패한 것이다. 암송이 중요한 것이 바로 이 점이다. 암송은 말씀을 마음에 새기는 훈련이고, 사단의 계획을 무력하게 만드는 최선의 방법이다. 특히 아이들에게 암송은 더욱 중요하다. 평생 암송된 말씀에서 떠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말씀의 보호와 인도를 받게 된다(잠22:6).

 

 

하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사단은 한 번 실패했다고 물러서는 존재가 아니라는 점이다. 주기도문을 빼앗는데 실패한 사단은 다른 방법을 택했다. 그것은 주기도문의 의미를 왜곡시키고, 잘못 사용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사단의 계획은 이미 성공하였다. 우리는 주기도문의 의미도 모르고, 그렇다고 알려고 하지도 않고, 그저 생각없이 습관적으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좋은 습관은 참으로 중요하다. 하지만 좋은 습관도 굳어져버리면 문제가 된다. 그러면 거기에 있는 의미가 죽게 된다. 그래서 알맹이 없는 껍데기만 남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가리켜 형식주의라고 한다. 신앙생활에서 경계해야 할 것 중에 하나가 이 형식주의다. 형식주의 빠지면 생명력을 잃게 된다. 예수님 당시 유대교가 좋은 예로, 이것이 주님이 그들을 책망하신 이유다. 유대인은 기도를 생명처럼 생각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주님은 그들의 기도가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외식적인 것이라고 책망하셨다. 그들이 처음부터 외식적인 기도를 드리지는 않았다. 그들은 기도 시간이 되면 사람을 의식하지 않고 어디서든지 기도를 드렸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에 대한 주변 사람들의 반응이 좋아지자 사람들에게 칭찬받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기도 시간에 맞춰 사람들이 많은 장소(시장이나 큰 길)로 나와서 기도를 드렸다. 그러면서 그들의 기도가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외식적인 기도로 왜곡이 된 것이다. 결국 사단에게 그들의 기도를 빼앗긴 것이다. 오늘 신자에게 있어서 주기도문이 이렇게 되었다. 그래서 루터가 주기도문을 최고의 순교자라고 한 것이다. 지난 주 설교에서 주기도문은 교회의 표지판이자, 우리 기도의 나침반이라고 했다. 다시 한 번 교회와 신자의 삶에 주기도문의 중요성을 상기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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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도문의 구조

예수님은 주기도문을 통해 바른 기도의 대상과 바른 기도의 내용을 가르쳐 주셨다. 주기도문의 구조는 부름말(서론)로 시작해서, 여섯 가지의 주제로 간구(본론)와 송영(결론)으로 되어 있다. 부름말과 송영 사이에 있는 간구는 전반부 세 가지 ‘하나님’ 청원과 후반부 세 가지 ‘우리’ 청원 두 부분으로 나뉜다. 전반부는 모두 2인칭으로 되어 있다. 당신(하나님)의 이름, 당신의 나라,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비는 기도다. 후반부는 모두 1인칭으로 되어 있고, 우리(인간)의 일용할 양식, 우리의 죄 용서, 우리를 악에서 구하는 기도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기도가 전반부의 내용에 담겨있고, 후반부는 우리의 필요에 대한 기도다. 윌리암 바클레이(W. Barclay)는 이 세 가지 기도를 삼위일체 하나님과 연관 지어 해석했다. 일용할 양식을 위한 기도는 천지를 창조하시고 생명을 지키시고 공급하시는 성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이고, 죄 용서의 기도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 주신 성자 예수님께 드리는 기도, 악에서 구하는 기도는 우리를 도우시고, 인도하시고, 보호하시고, 동행하여 주시는 성령님께 드리는 기도라고 했다. 아주 통찰력 있는 탁월한 해석이다. 결국은 후반에 해당되는 우리를 위한 청원 역시 하나님과 관련되어 있다는 뜻이다.

 

기도의 대상

우선 주기도문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라는 부름으로 시작한다. 이는 기도의 대상과 관련된 내용이다. 이것은 그 사람의 신앙과 그가 속한 신앙 공동체의 정체성을 결정짓지는 중요한 내용이다. 모든 종교에는 기도가 있다. 그리고 종교를 떠나서 사람은 누구나 기도를 한다. 그러니 기도의 내용만으로는 그가 누구를 믿고, 누구에게 기도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때문에 ‘무엇을 기도하느냐?’(기도의 내용)보다 ‘누구에게 기도하느냐?’(기도의 대상)가 더 중요하다. 주님께서 본문 앞부분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기도를 비판하신 것은 그들이 드린 기도의 내용 때문이 아니라 기도의 대상 때문이었다. 그래서 주님은 하나님이 기도의 대상이라는 것을 강조하신 것이다. 주님께서 기도의 대상으로 소개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하는 말씀에는 두 가지의 중요한 의미가 있다.

 

첫째, 하나님의 초월성

하나님은 우리와 비교할 수 없이 크고 위대하신 분이시다. 본질적으로 우리와 다른 분이시다. ‘하늘에 계신’이란 말씀이 이를 뜻한다. 주님은 우리 기도의 대상이 되신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분’이시라고 하셨다. 여기서 ‘하늘’은 ‘공간적’ 혹은 ‘장소적인’ 의미가 아니라 ‘상징적’ 의미이다. 하나님의 ‘초월성’을 상징한다.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어디에나 계시고(無所不在), 삶과 죽음을 초월하여 영원히 살아계시는 분이시다. 또한 모든 것을 아시는 전지(全知)하시고,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전능(全能)하신 분이시다. ‘하늘에 계신’이란 이렇게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신 하나님께 경외감을 가지고 기도하라는 것이다.

 

우리가 한 인간으로, 혹은 부모로서 가장 안타까운 순간은 힘이 없고 능력이 없어서 자식에게 도움이 되지 못할 때다. 특히 자녀가 절실하게 도움을 요청해 왔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할 때 그 참담함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이런 모습이 김정현의 「아버지」란 소설에 잘 나타나고 있다. 아버지는 입시를 앞둔 사랑하는 고3 딸을 위해서 해줄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어 안타까워한다. 그러다 우연이 딸이 지원하는 대학 영문과 모집정원이 35명이라는 것을 알고, 일 년 내내 ‘35’라는 숫자에 묶여 산다. 버스나 전철 탈 때 뒷자리에 빈 좌석이 있어도 앞에서 35번째 안에 있으려고 아무리 피곤해도 뒤로 가서 앉지 않고, 지하철 개찰구도 35번째 안에 나가려고 편한 에스컬레이터를 두고 계단을 뛰어오른다. 직장은 항상 35번째 안에 출근하고, 버스도 1번~35번까지 버스만 타고, 동료 승용차도 끝자리가 35안의 숫자가 아니면 절대 타지 않았다. 무언가를 해주고 싶지만 힘이 없어서, 능력이 미치지 못해서 해주지 못해 안타까워하는 모든 부모의 심정을 잘 대변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이런 부모와 달리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분이시다. 그 분은 하늘에 계시기 때문이다.

 

둘째, 하나님의 내재성

자칫 하나님의 초월성만 강조하다보면, 하나님은 나와 너무 멀리 떨어져 계신 분, 나와 너무 다른 분, 그래서 나와는 관계가 없는 분으로 생각할 수 있다. 다른 가정의 아버지가 아무리 능력이 있고, 아무리 실력이 있고, 아무리 자상해도 나와는 상관이 없는 것처럼 하나님도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그래서 다음으로 주님은 우리 기도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하셨다. 이것은 하나님의 ‘내재성’, 혹은 ‘친밀성’을 상징한다. 아버지란 이 호칭은 우리 주님께서 즐겨 사용했던 것이다. 그래서 복음에서만 170회나 나온다. 그것도 아버지의 애칭인 ‘아바’(abba, 아람어)라는 단어를 사용하셨다고 한다. 당시 유대인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개인이 직접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지는 못했다. 그렇게 부르는 것을 불경스러운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주님은 제자들에게 기도할 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기도하라고 하셨다. 친밀감을 가지고 기도하라는 말씀이다.

 

하나님은 죄인인 우리가 가까이 하기에 너무 크고 거룩하고 두려운 분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하늘에서 우리를 내려다보고 계시면서 그저 ‘이래라 저래라’ 말씀만 하시는 분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바로 옆에 계시는 아버지처럼 우리와 동행하시고 돌보아주시고 인도해주시는 분이다. 우리의 형편을 다 보시고 들으시고 아시는 분이다. 심지어는 우리의 신음까지도 들으신다고 했다. 우리가 흔들리거나 넘어지려고 할 때 붙잡아주시고, 넘어졌을 때 일으켜 세워주시고, 깊은 수렁에 빠졌을 때 건져주시는 분이다. 탕자의 비유(눅15:)가 이런 아버지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아버지의 재산을 창기와 함께 다 낭비하고 거지가 되어 돌아온 아들을 보고 맨발로 뛰어나가 눈물로 반겨주고, 냄새나고 더러운 몸을 껴안고 입을 맞추고, 새 옷을 입히고, 신을 신기고, 금가락지를 끼우고, 금의환향이라도 한 것처럼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베풀어준 아버지와 같으신 분이 우리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배에서 태어남으로부터 내게 안겼고 태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업힌 너희여, 너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리하겠고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희를 품을 것이라. 내가 지었은즉 내가 업을 것이요, 내가 품고 구하여 내리라.”(사46:3,4). 우리를 끝까지 책임지시겠는 약속이다. 우리를 지으신 아버지시기 때문이다. 부모는 자식을 끝까지 책임을 진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시다.

 

우리 기도의 희망, ‘하늘에게 계신 우리아버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라고 하는 이 짤막한 부름은 우리 기도의 희망이다. 아무리 자상하고, 친절하고, 친밀해도 능력이 없어 필요를 채워줄 수 없는 분이라면 그에게 아무 것도 요청하지 않는다. 아니 요청할 수가 없다. 반대로 아무리 힘이 있고, 능력이 있고, 권세가 있어도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분이라면 이 또한 마찬가지다. 그런데 주기도문 서문은 우리 기도의 대상이신 우리 하나님이 이 두 가지를 모두 충족시켜주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무한한 능력을 가지신 하늘에 계신 분이 곧 우리를 끝까지 책임지시는 우리 아버지시라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기도의 희망이다.

 

자식은 부모에게 무엇이든 요청할 수 있는 특권이 있다. 어려운 부탁도 ‘아버지’하고 매달리면 된다. 부모가 자녀의 요청을 들어주는 것은 그의 말이 합리적이고 탁월해서가 아니라 관계 때문이다. 말의 내용이 아니라 자녀라는 사실 때문이다. 무슨 내용을 말하느냐보다 누가 말하느냐가 중요하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하나님의 자녀다. 그런데 그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전능하신 분이다. 이 얼마나 엄청난 축복이고 특권인가? 그러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해야 할 일은 한 가지다. 그것은 기도하는 것이다. 부질없이 낙심하지 말고 부지런히 구하고 찾는 것이다. 우리가 주님께 복을 얻지 못함은 주님이 인색하시거나 무능해서가 아니다. 주님이 우리와 너무 멀리 계셔서가 아니다. 우리가 주님께 기도하지 않기 때문이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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