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비하고 기다리라!
마25:1~13
2014. 12/7. 08:00, 11:00
우연을 내편으로 만드는 법
존 크롬볼츠는 직장인 수백 명의 직업을 분석한 결과 80%가 우연한 사건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신이 처음부터 주도면밀하게 계획해서 지금의 모습을 달성한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대부분이 예기치 않게 다가온 우연한 사건에 의해 현재의 자신이 형성되고 있었다. 그런데 성공한 사람들은 달랐다. 그들은 우연히 찾아온 만남이나 기회를 인생에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나아가서는 이런 기회를 의도적으로 만들려고 노력하였다. 그래서 그가 이런 우연을 기회로 바꾸는 방법에 대한 이론을 발표했는데, 그것이 바로 ‘계획된 우발성이론’(planned happenstance theory)이다. 소위 우연을 내편으로 만들기 위한 방법이다. 그는 ‘행운이란 우연이 아니다.’(Luck is no accident)고 말한다. 그러니 우연을 기다리는 수동적인 자세가 아니라 우연이 빈번하게 일어나도록 적극적으로 관여하여 의도적 계획적으로 행동하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연이 빈번하게 일어나도록 적극적으로 관여하는 가장 기본적인 행동은 무엇일까? ‘철저한 준비’이다. 어떤 상황이 닥치더라도, 예기치 않는 일을 만나더라도 유연하고 창조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잘 준비된 실력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런 철저한 준비가 우연을 기회로, 우연을 내편으로 만드는 방법이다. 이렇게 해서 일어난 우연은 더 이상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다. 예수님의 재림도 준비하지 않는 사람에겐 갑작스럽고 우연한 사건이 되고 말 것이다. 성경은 이런 불행이 우리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깨어있어 잘 준비하라고 하신다. 본문이 그 대표적인 말씀이다.
이스라엘의 결혼식
마24,25장은 종말에 대한 예수님의 교훈이다. 특히 25장은 말세를 살아가는 신자의 자세, 즉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자세에 대한 말씀이다. 이것을 세 개의 비유로 말씀하고 있다. 열 처녀 비유, 달란트 비유, 양과 염소의 비유가 그것이다. 본문은 그 첫 번째에 해당되는 비유인데, 주님은 고대 이스라엘의 전통혼례를 통해 말씀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혼례는 일주일 씩 그 축제가 계속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리고 혼례식은 더위를 피하여 낮이 아니라 저녁이나 밤중에 거행되었다. 신랑은 친구들과 어울려 놀다가 밤중쯤 되어 신부의 집으로 행진을 하고, 신부는 자신의 친구들(들러리)과 언제 도착할지 모르는 신랑을 마냥 기다린다. 마침내 신랑이 도착하면 신부는 들러리들과 함께 등불을 켜서 들고 나가 신랑을 영접하여 이제 신랑의 집으로 떠나는 연등행렬이 벌어진다. 여기서부터 잔치가 시작된다.
본문은 이와 같은 혼례식 중에서 신랑을 기다리는 들러리 처녀들의 이야기다. 신랑의 행차가 너무 늦어져 모든 처녀들이 잠이 들었다. 밤중에 신랑을 맞으라는 소리에 잠에 깨어났지만 들고 나가 신랑을 맞이할 등불이 꺼져가고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다른 그릇에 따로 기름을 준비한 처녀들은 곧바로 신랑을 맞으러 갈 수 있었지만 준비하지 못한 처녀들은 기름을 사로가야 했기에 결국 신랑을 맞이할 수가 없었다. 뒤늦게 슬피 울면서 문을 두드려보았지만 닫힌 문에서 들려오는 신랑의 소리는 ‘내가 너희를 모른다.’(12)는 말뿐이었다.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도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것과, 이런 비극의 주인공이 되지 않도록 깨어서 잘 준비하라는 것이다. 심각한 것은 이 비유의 대상이 믿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믿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믿는 사람들 사이에 이렇게 둘로 나뉘게 된다는 것이다.
준비하고 기다리라!
사실 이 비유의 내용은 간단한데, 각인각색(各人各色)이란 말이 어울릴 만큼 이에 대한 해석이 다양하고 복잡하다. 이는 본문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일에 있어서 크게 중요하지 않는 부분에 관심을 쏟으면서 상징 하나 하나에 의미를 부여하려다보니 그런 것 같다. 비유란 하나님의 나라와 같은 영적 진리를 일상의 일들을 소재로 사용하여 이야기 형식으로 전달하는 것이다. 그러니 내용은 단순하고 주제가 분명할 수밖에 없다. 본문 역시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들 가운데는 서로 다른 태도를 갖고 있는 두 부류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대조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신랑을 기다렸으면서도 기름을 준비하지 못하고 혼인잔치에 참석하지 못했던 미련한 다섯 처녀의 비극이다. 이들의 비극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을 생각해 보려고 한다.
1. 형식이 내용을 대신할 수 없다.
본문은 열 처녀를 슬기 있는 자들과 미련한 자들로 구분을 하고 있다. 그런데 겉으로는 이 두 종류의 처녀들 사이에 차이가 거의 없다. 그들은 ①모두가 혼례식에 초청을 받은 처녀이고(1), ②모두 등을 가졌고(3,4), ③함께 신랑을 기다렸다(5). 그리고 ④신랑이 늦게 오므로 다 졸며 잤고(5), ⑤신랑이 올 때 맞이하려고 했고(7), ⑥신랑을 ‘주여, 주여’라고 불렀다(11). 이와 같이 슬기 있는 처녀들과 미련한 처녀들 사이의 외적인 상황, 외적인 삶의 방법은 차이가 하나도 없었다. 형식에 있어선 차이가 없었다. 단지 다른 것이 있었다면 슬기 있는 처녀들이 ‘다른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다.’(4)는 것이다.
결국은 준비의 차이였다. 슬기 있는 처녀들은 기름을 준비하였지만 미련한 처녀들은 기름을 준비하지 못했다. 그런데 여기서 이 기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견해가 많다. 많은 경우 이 기름을 성령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그렇게 적용시킬 때,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한다. 그것은 ‘기름이 시간이 지나가면서 없어진 것처럼 성령이 있다가 없어질 수가 있는가?’ 하는 문제다. 인격이신 성령은 한 번 우리 안에 오시면 우리와 더불어 영원히 같이 계신다. 성경에서 많은 경우 성령이 기름으로 상징된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고 기름만 나오면 그것을 다 성령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보다 포괄적으로 이 말씀을 접근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기름은 우리가 마땅히 가지고 있어야 할 신앙의 내용, 삶의 내용이다. 이것이 슬기 있는 처녀들과 미련한 처녀들의 차이였다. 미련한 처녀들은 형식만 있고 내용이 없었다. 준비가 이런 차이를 만든 것이다.
흔히 사람들은 형식이 있기 때문에 내용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착각이다. 주님께서 당시 바리새인을 향해 ‘회칠한 무덤’이라, 혹은 ‘위선자’라고 책망하신 이유가 이 때문이다. 종교적인 행위는 무성한데, 신앙적인 열매가 없었기 때문이다. 율법의 형식만 지키고 율법의 정신은 지키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안식일 준수, 십일조 생활). 교회생활을 하고, 예배에 참석하고, 찬송을 부르고, 기도를 드리고, 봉사하는 것도 엄격히 말하면 형식이다. 많은 경우 이런 형식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에 저절로 신앙이 있는 사람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형식이 내용을 대신할 수 없다. 이것이 본문의 교훈이다. 물론 제가 형식을 무시하거나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형식 그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내용 없는 형식이 언제나 문제다.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 내용이 없는 형식은 설 자리가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참된 신앙은 언제나 위기 앞에서 그 진면목이 드러난다. 신랑이 오니까 드디어 내용이 있는 사람과 내용이 없는 사람의 차이가 드러났다. 우리 역시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미련한 처녀들처럼 형식에만 집착하고 있지는 않는지, 주님께 인정받을 수 있는 신앙의 내용을 형성해 가고 있는지 자신을 돌아보기 바란다.
2. 신앙의 삶은 누구도 대신할 수 없다.
드디어 신랑이 도착했다는 전갈을 왔다. 그런데 문제는 등불이었다. 기름이 없어서 꺼져가고 있었다. 그렇다고 따로 기름을 준비하지도 않았다. 이것이 미련한 처녀들의 형편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슬기 있는 처녀들에게 기름을 빌려달라고 했다. 그들은 기름을 빌릴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것이 그들의 또 하나의 착각이다. 혹시 ‘그 정도를 거절할 만큼 인색한가?’ 하고 슬기 있는 처녀들에게 반발을 느낀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 주님께서 이 비유를 통해 주시고자 하시는 중요한 교훈이 있다. 신앙의 내용은 빌릴 수가 없다는 것이다.
신앙은 개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 나의 주님으로 고백하고 영접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이 사실이 없이 아버지가, 어머니가, 혹은 다른 식구들이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이 신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오해다. 신앙의 삶은 누구도 대신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내가 인격적으로 주님을 만나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주님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해야 한다. 신앙의 삶은 누구도 대신할 수 없다. 이것이 이 비유를 말씀하신 주님의 교훈이다.
3. 기회는 다시 얻을 수 없다.
잃어버린 기회는 다시 오지 않는다. 기름을 사가지고 와보니 잔치 집 문은 이미 닫혀있었다. 슬피 울며 문을 두드려보았지만 닫힌 문에서 들려오는 신랑의 소리는 냉정했다. ‘내가 너희를 모른다.’ 이는 한 번 닫힌 문은 다시 열리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모든 일에는 때가 있고, 기회가 있다. 물론 신랑이 오기 전에 그들에게도 기름을 살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그 기회를 놓쳤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기름을 살 수가 있다는 사실이 오히려 그들을 게으르게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우리도 언제나 그렇게 생각한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교회에 나갈 수 있고, 언제든지 성경공부 할 수 있고, 언제든지 봉사 할 수 있다고. 그러나 삶의 기회가 언제나 그렇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본문의 도전이다. 어느 한순간 내 인생의 기회의 문이 닫힐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몸부림쳐도 신앙의 열망과 내용을 획득할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하게 된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가르치고 있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6:2).
지금은 기름을 살 수가 있다. 지금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구원에 동참할 수가 있다. 지금은 하나님 앞에서 그분을 의지하며 신앙의 내용을 채울 수가 있다. 용서받을 수 있고, 말씀을 공부할 수 있고, 주님의 은혜를 사모할 수 있고, 주님을 섬길 수 있다. 그러나 내일은 우리의 시간이 아닐 수도 있다. 기회의 문이 닫힐 수도 있다. 아무튼 기억하라. 기회는 준비한 사람의 몫이다.
준비 됐나요? 준비 됐어요!
교회학교에서 돌아온 아이가 엄마를 붙들고 물었다. ‘엄마, 교회에서 선생님이 이 세상의 삶은 천국의 삶을 준비하는 거래요. 맞아요?’ 이렇게 묻는 아이가 너무 귀엽고 대견스러운 이 엄마는 ‘맞지’ 라고 대답했다. 그때 이 깜찍한 아이가 엄마에게 또 물었다. ‘그런데 엄마! 엄마는 작년엔 중국에 갔다 오고 올해는 베트남에 갔다 왔는데, 다른 나라에 갈 때마다 여행준비는 열심히 하면서 왜 천국에 갈 준비는 안 해요?’ 아이의 이 의외의 질문에 엄마는 유구무언이었다.
여러분은 어떤가? 준비 잘하고 있는가? 인생의 가장 진지한 여행, 육체를 버리고 떠나가는 이 마지막 여행을 위해 어떻게 준비하고 있는가? 여러분은 지금 주님을 만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주님은 ‘도적같이 오시겠다.’(마24:43)고 하셨다. 예고 없이 도둑이 찾아오는 것처럼 전혀 기대하지 않은 시간에, 전혀 기대하지 않은 어느 한순간에 주님께서 다시 오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준비해야 한다. 매일이 주님과의 만남을 위한 진지한 준비의 시간, 준비하는 삶의 여정이 되어야 한다. 주님을 사랑했고, 주님을 전하는 일에 평생을 바쳤던 무디는 죽음을 준비하는 자세로 하루를 살았던 하나님의 사람이다. 드디어 어느 한순간 찾아온 죽음 앞에서 무디는 ‘땅은 물러가고 하늘은 열린다. 내 주께서 나를 위해 오신다.’고 고백하였다. 죽음의 순간 이런 고백이 우리에게도 가능할 수가 있을까?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