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멍 뚫린 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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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3,016회 작성일 14-11-23 13:38본문
구멍 뚫린 전대
학1:1~11
2014. 11/23. 08:00, 11:00
우선순위가 잘못되면 모든 것이 엉망이 된다.
한 병원에 밤늦게 응급환자가 실려 왔다. 교통사고로 팔다리가 부러지고 온몸이 피투성이였다. 응급실 담당의사는 우선 피를 닦아내고 압박붕대로 지혈 등 응급처지를 취한다음 부러진 팔과 다리 수술을 위해 정형외과 의사를 급하게 호출했다. 그런데 정형외과 의사가 도착하기도 전에 그 환자는 죽고 말았다. 그 원인은 기도가 막힌 질식사였다. 응급실 의사가 다른 치료에만 정신이 쏠려 그만 환자의 기도를 확보하지 못한 것이다. 응급환자는 먼저 호흡이 있는지 확인하고 기도를 확보하는 것이 우선인데, 이를 놓치고만 것이다. 물론 의사는 최선을 다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최선은 최선의 결과를 가져오지 못했다. 그것은 그가 우선순위를 놓쳤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극단적인 예지만 우선순위가 잘못되면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비극적인 사건이다.
성경에서 하나님께 인정을 받았던 사람들의 한결같은 특징이 있다. 우선순위를 하나님께 두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이라면 목숨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혼란스러운 인생을 사는 사람들의 문제점은 우선순위가 잘못되어 있다는 것이다. 존 네이스빗은 ‘우선순위를 잘못 선택하면 삶의 목표에서 멀어진다.’고 했다. 찰스 휴멜은 ‘우리가 삶에서 만나는 온갖 곤경은 시간과 물질의 부족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우선순위를 잘못 선택함에서 온다.’고 했다. 주님께서도 산상보훈에서 우선순위를 강조하셨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6:33). 하나님의 나라가 중심이 되고, 하나님이 1번이 되는 삶을 살라는 뜻이다. 본문 역시 우선순위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말씀이다.
너희의 행위를 살필지니라.
학개는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돌아온 이후에 활동한 선지자다(주전 520년경). 포로에서 돌아온 백성들은 성전지대만 놓고 16년이 지나도록 자신들의 집만 꾸미고(4,9), 핑계만 일삼으며(2), 성전재건을 미루고 있었다. 이런 그들에게 성전재건을 촉구한 내용이 본서다. 내용은 2장인데, 약 4개월 동안 4번의 설교로 되어 있다. 본문은 그들이 성전재건을 미룬 이유(2)와 그 결과(6,9,10,11)에 대한 말씀이다. 그러면서 강조한 말씀이 있다.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희는 너희의 행위를 살필지니라.”(5,7). 마땅히 해야 할 일,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결과를 진지하게 살펴보라는 것이다. 그토록 부지런히 일하며 열심히 살았는데도 그 결과가 만족스럽지 못한 이유를 알라는 뜻이다. 많이 뿌려도 수확이 적고, 많이 먹어도 배부르지 않고, 마셔도 흡족하지 않고, 입어도 따뜻하지 않고, 많은 품삯을 받아도 남는 것이 없었다(6). 그 이유는 성전재건이라는 우선순위를 놓쳤기 때문이다. 저는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우선순위에 두고 해야 할 일에 대하여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그래서 우리의 삶에 문제점이 무엇인가를 발견하는 시간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시간의 우선순위, ‘예배’
주님은 하나님께서 참된 예배자를 찾으신다고 말씀하셨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4:23). 이 세대 속에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은 위대한 설교자도, 선교사도, 신학자도 아니다. 목회자도 장로도 집사도 권사도 아니다. 물론 크고 화려한 교회는 더더욱 아니다.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사람은 하나님을 ‘참되게 예배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을 ‘참되게 예배하는 공동체’를 찾으신다. 저와 여러분이, 그리고 우리 교회가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그런 신자, 그런 교회이기를 소원한다.
아브라함은 예배를 소중하게 여긴 신앙적 영웅이다. 아브라함은 가는 곳마다 가장 먼저 ‘단’(예배)을 쌓고, 다음으로 ‘장막’(가정)을 치고, 마지막으로 ‘우물’(생업)을 팠다. 이는 그의 아들 이삭도 그랬다. 특히 아브라함의 삶에서 정점이 되었던 사건은 100세에 얻은 아들을 제물로 드리라는 명령에 묵묵히 순종한 일이다(창22:1). 자식을 제물로 드리라는 정말 얼토당토않은 명령에까지 순종하는 그의 태도는 그가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고, 예배를 얼마나 소중히 여긴 사람이었는가를 잘 보여준다. 그는 자식보다 예배를 더 중요하게 여긴 것이다. 이런 생활이 가능했던 것은 하나님이 그의 삶에서 1번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그의 삶에 하나님께서 복을 주어 ①복의 근원, ②복의 통로, ③믿음의 조상이 되게 하셨다.
어느 봉재공장 벽에 이런 글이 붙어 있었다. ‘실이 꼬이거든 감독에게 말하시오!’ 문제가 생기면 혼자서 해결하려고 하지 말고 전문가를 찾으라는 것이다. 우리도 살다보면 문제를 만날 수 있다. 그럴 때 어떻게 해야 할까? 하나님 앞에 나아가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혜를 구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예배다. 사실 본문은 이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많이 뿌려도 수확이 적고, 많이 먹어도 배부르지 않고, 마셔도 흡족하지 않고, 입어도 따뜻하지 않고, 많은 품삯을 받아도 남는 것이 없었다. 열심히, 부지런히 살았는데, 모두가 헛발질이었다. 마치 구멍 뚫어진 전대와 같고, 쥐고 있는 모래와 같았다. 바람을 잡는 것과 같았다. 열심히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실은 이것을 아는 것이 은혜다. ‘잘 살아보려고 온갖 노력을 다했습니다. 그런데 안 됐습니다. 내가 애를 쓸수록 일은 꼬이기만 하고, 실패를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야 내 힘과 능력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니 주님 도와주십시오!’ 주님의 은혜를 입고, 주님의 복을 받아야 한다(9~11).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잠18:17)고 했다. 하나님께 우선순위를 두고 사는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받는다. 예배가 바로 그것이다.
물질의 우선순위, ‘십일조’
‘돈 없으면 사람 구실도 못한다.’는 말이 있다. 영어에도 비슷한 속담이 있다, ‘돈만 있으면 귀신도 부릴 수 있다.’ 돈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성경에도 이런 말씀이 있다. “제물은 많은 친구를 더하게 하나 가난한즉 친구가 끊어지느니라.”(잠19:4). 이 말씀을 현대인의 성경으로 읽으면 더욱 실감이 난다. “부유하면 새로운 친구가 계속 늘어나지만 가난하면 있던 친구도 떠나고 만다.” 여러분! 친구가 늘어가고 있는가? 아니면 있던 친구도 떠나가고 있는가? 그것은 여러분의 인격보다는 주머니 사정과 관련이 깊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토록 돈에 목숨을 거는 것이다. 이 시간 그 소중한 돈 이야기, 별로 부유하지도 않는 여러분의 지갑을 살짝 넘보려고 한다. 양해하기 바란다. 헌금은 단순한 돈 이야기가 아니다. 마음의 문제이고, 신앙의 문제이다. 그리고 헌금 중에서 십일조는 여러 헌금 중 하나이지만 헌금의 기본이자 대표이다. 예배가 시간의 주인, 인생의 주인이 주님이신 것에 대한 고백인 것처럼, 십일조는 물질의 주인이 주님이신 것에 대한 고백이다. 그래서 헌금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면 십일조를 중요하게 거론하는 것이다. 그런데 십일조는 신앙고백적인 의미 외에 또 하나 중요한 의미가 있다. ‘공동체적인 의미’다. 공동체를 돌보고 세우는 섬김이다.
십일조는 율법이 주어지기 훨씬 전부터 존재했던 고대국가의 사회제도였다. 왕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십일조였고(삼상8:15, 참조 창14:20), 종교적으로도 우상에게 제물로 바쳐지는 것이 십일조였다(암4:4). 이와 같은 십일조는 ‘약육강식의 지배원리’를 대표하는 삶의 방식이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십일조를 완전히 새로운 삶의 방식을 위한 도구로 바꿔주셨다. 즉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돕는 ‘더불어 사는 원리’로 주셨다. 이것은 주님께서 그토록 강조하셨고, 친히 모범을 보이셨던 삶의 원리이다(막10:43~46). 하나님께서 십일조 제도를 세우고, 십일조를 드리도록 명하신 배경과 이유에 잘 나타나고 있다. 민수기에서 십일조는 가나안 땅에서 분깃을 얻지 못한 제사장과 레위인의 생계를 위한 것이었다(민18:21/ 제1십일조, ✜공동체를 무너뜨리는 고라일당의 반역사건 직후에 주어진 명령이라는 점에 주목). 그런데 신명기에서는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에게까지 확대되었다(신14:28,29/ 제2,3십일조).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도와 더불어 함께 잘사는 것이 십일조 정신이다. 그래서 십일조를 통해서 모두가 하나님 안에서 영원한 공동체임을 깨닫게 만든 것이다. 오늘날은 교회까지도 돈이 없으면 사람 구실을 못하는 곳이 되었다. 교회는 사랑이 없으면 사람 구실 못하는 곳이 되어야 한다. 이는 십일조의 정신이 회복되면 가능하다. 십일조는 하나님과 ‘나’를 묶어줄 뿐만 아니라(신앙고백적 의미), 하나님과 ‘우리’를 묶어주는 신비로운 신앙의 실천인 것이다(공동체적 의미). 초대교회는 이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그들은 십일조의 한계를 넘어 ‘2/10’, ‘5/10’, 바나바와 같은 사람은 자신의 소유를 모두 팔아서 ‘10/10’까지도 드렸다(행4:32~35). 그러므로 십일조는 공동체를 위한 실제적인 교육 프로그램이고, 공동체를 온전하게 묶어주는 끈이다. 내가 드린 십일조를 통해 공동체가 든든하게 세워지고, 이로 인하여 하늘에서 기뻐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는 놀라운 신앙의 비밀이 바로 십일조의 의미다.
마포불백
혹시 ‘마포불백’이란 말을 들어보았는가? ‘마누라도 포기한 불쌍한 백수’라는 단어들의 첫 글자다. 꽤 잘 알려진 유머다. 집에서 하루 한 끼 밥을 먹으면 ‘일식이’, 두 끼를 먹으면 ‘두식이 놈’, 세 끼를 다 먹으면 ‘삼식이 새끼’, 그리고 한 끼도 안 먹으면 ‘영식님’이라고 존칭까지 붙여준다. 이는 은퇴한 남성의 초라한 위상을 절묘하게 풍자한 말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이 마포불백은 삼식이가 가정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생존비법’이다.
①인명재천(人命在天)이 아니라 인명재처(人命在妻)
②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 아니라 진인사대처명(盡人事待妻命)
③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 아니라 처화만사성(妻和萬事成)
④천하태평(天下泰平)이 아니라 처하태평(妻下泰平)
⑤순천자흥 역천자망(順天者興 逆天者亡)이 아니라 순처자흥 역처자망(順妻者興 逆妻者亡)
이것이 은퇴 남편의 초라한 위상에 대한 풍자이긴 하지만 일견 중요한 교훈이 있다. 아내를 소중히 여기고 존중히 여기자는 것이다. 사실 평생 동반자인 아내를 소중히 여기고 존중해서 나쁠 것은 없다. 그리고 이것은 그대로 신자의 삶에 적용할 수 있다. 우리가 주님 안에서 형통한 삶을 누리는 비결도 이와 같다. 주님을 소중히 여기고 존중히 여기는 것이다. 주님을 삶의 1번으로 모시고 섬기는 것이다. 이런 마음과 태도로 시간을 드리고 물질을 드릴 때 그것이 마중물이 되어 우리에게 더 큰 은혜와 복을 불러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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