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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써야 할 것, ‘서로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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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3,203회 작성일 14-10-20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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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써야 할 것, ‘서로 함께’

전4:9~12

2014. 10/19. 11:00(산상예배, 장소: 월전중학교 체육관)

태초에 갈등이 있었다.

괴테는 ‘태초에 갈등이 있었다.’는 말을 했다. 인간의 역사에서 갈등이 얼마나 고질적인 것이고, 동시에 우리 삶에서 갈등의 불가피성을 강조하는 말이다. 우리의 가정, 직장, 심지어는 신앙 공동체인 교회까지 모든 관계 속에 갈등이 존재한다. 바울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4)고 외친 것처럼 관계뿐만 아니라 우리 안에서도 끊임없이 선과 악(롬7:21) 사이에, 혹은 성령의 소욕과 육체의 소욕(갈5:17) 사이에 갈등이 반복되고 있다. 게다가 먹고, 마시고, 입는 것과 같은 인간의 기초적인 욕구까지도 갈등의 원인이다. 때문에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늘 노심초사하며 염려에 매여 사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흔히 산다는 것을 ‘고해’(苦海)라고 한다. 여기서 괴로울 ‘’(苦)를 고대 산스크리트어로 ‘두카’(dukkha)라고 한다. 이는 수레바퀴의 축과 바퀴를 연결하는 부분에 ‘기름(윤활유)대신 모래를 끼얹은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괴로움이고, 이런 괴로움의 바다가 인생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인생이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은 고통의 근본이 기름대신 모래를 뿌리는 것과 같은 관계의 부조화에서 오는 아픔이란 뜻이다. 이 관계의 부조화에서 오는 아픔이 곧 갈등이다. 아무튼 고통의 바다를 넘어 관계의 아름다움을 누리며 사는 것은 우리의 소망이자 영원한 숙제다. 이 숙제의 해답이 ‘서로 함께’에 있다.

 

사람은 관계적인 존재다.

 건강한 인생은 갈등이 없는 것이 아니다. 갈등이 없다면 그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갈등이 있다는 것은 오히려 살아있다는 증거다. 그러니 건강한 인생은 갈등이 없는 것이 아니라 갈등을 줄이고 극복하는데 있고, 그 갈등과 더불어 사는 것을 배우는데 있다. 이를 위해서 필요하고 중요한 것이 서로 함께하는 것이다. 물론 서로 함께하는 것이 갈등을 줄이고 극복하며 사는 길이란 말은 역설이다. 대부분의 갈등이 관계에서 비롯되는데 관계를 통해 갈등을 줄이고 또한 극복할 수 있다니 말이다. 그래도 사람은 서로 함께 할 때 슬픔이나 고통은 줄어들고, 기쁨이나 즐거움은 커진다. 사람은 관계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사람을 영어로 ‘퍼슨’(person)이라 하는데, 이는 라틴어 ‘페르조나’(persona)에서 왔고, 라틴어 페르조나는 헬라어 ‘프로소폰’(προσωπον)에서 왔다. 프로소폰은 ‘얼굴을 맞대고’ 라는 뜻이다. 사람은 서로 얼굴을 맞대고 있는 존재, 즉 관계적인 존재란 뜻이다. 사람은 단절된 개인이 아니라 서로 마주 보며 공동체 안에서 살아가는 존재다. 이 말은 사람이란 자신을 성숙하게 하는 다른 사람을 필요로 하는 존재, 자신의 정체성을 공동체라는 맥락에서 찾게 되는 존재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혼자보다는 서로 함께 할 때 건강한 존재, 건강한 인생을 살 수 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다. 물론 신자 또한 불완전한 인간이고, 불완전한 인간이 모여서 형성한 공동체인 교회 역시 불완전하지만 이런 교회를 통해 서로 함께 하므로 건강하고 성숙한 신자로 자라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연약하고 부족하기 때문에,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서로 함께해야 하는 것이다. 본문은 서로 함께의 중요성을 아주 선명하게 말씀하고 있다.

 

1. 다시 일어섬(10).

살다보면 누구나 예외 없이 넘어짐의 순간을 경험하게 된다. 문제는 넘어지느냐, 넘어지지 않느냐, 얼마나 자주 넘어지느냐가 아니라 넘어질 때 얼마나 빨리 다시 일어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사실 하루에 몇 번을 넘어져도 그 때마다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 문제가 될 것도 없다. 또한 다시 일어서고자 할 때 나의 일어섬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이 곁에 있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10절 마지막 부분에서,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고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고 했다. 그러니까 넘어져도 일으켜줄 사람이 곁에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는 것이다. 여기에 바로 서로 함께의 중요성과 행복이 있다. 본문은 인생의 길에서 넘어졌을 때, 손을 붙잡아 일으켜줄 수 있는 사람을 가진 사람의 행복을 넒은 의미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신앙공동체 안에서 교제의 중요성을 강조한 말씀이다.

 

교회는 인생의 길을 걷다가 넘어진 상처받은 사람을 치유하기 위하여 부름 받은 공동체다. 이 일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 교제(친교)다. 그래서 교제가 교회의 중요한 존재기능 중 하나가 된 것이다. 교제를 헬라어로 ‘코이노니아’(ĸоινωνία)라고 하는데, 이는 친교이상의 의미를 가진 ‘삶에의 참여’를 뜻한다. 이것이 신앙적인 교제의 특징이다. 신자의 교제는 단순한 친교가 아니라 삶에의 참여다. 초대교회의 모습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그들은 가진 모든 것을 서로 나눴다. 이 일이 가능했던 것은 서로의 삶에 깊이 참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서로의 필요를 알 수 있었고, 또한 필요에 따라 서로 나눌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교제가 상처를 싸매주고, 다시 세워주고, 치료와 회복을 경험하게 해준다. 그러므로 서로 함께하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어깨를 내어줄 수 있는 여유, 따뜻하게 안아주고 품어줄 수 있는 넓은 가슴이다. 이것이 사랑이다. 그래서 베드로는 “무엇보다도 뜨겁게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벧전4:8)고 했다. 반면에 경계하고 피해야 할 것은 비난하고 정죄하는 것이다. 성경은 ‘그리스도 안에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롬8:1)고 하였다. 그러지 않아도 삶이 힘들어서 쓰러진 사람을 짓밟고 정죄하는 어리석음이 우리에게 없어야 한다.

 

2. 위로를 얻음(11).

왜 우리는 인생의 길에서 서로를 필요로 할까? 이 길이 너무 춥고 험하기 때문이다. 혼자 힘으로 헤쳐 나가기엔 너무 힘들고 어려운 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11절에서,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다.”고 했고, 9절에서, “두 사람이 한사람보다 낫다.”고 한 것이다. 함께 하면 힘이 되고 위로가 된다는 뜻이다.

 

이 말씀이 기록된 팔레스틴은 사막지역이다. 낮이면 열사의 태양이 이글거리는 용광로와 같은 땅이지만 밤에는 뼈 속까지 에이는 추위가 몸서리치도록 매서운 곳이다. 그래서 행인들은 밤이면 서로 등을 마주하고 밤을 보낸다. 추위를 극복하기 위해서다. 때문에 사막에서 생활하는 유목민은 길동무를 만드는 것이 인생의 필수조건이다. 그래야 춥고 험한 광야를 성공적으로 살아낼 수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 인생길도 광야와 같다. 서로 등을 마주할 수 있는 길동무가 필요하다. 서로 격려하고 위로하고 붙들어주고 용기를 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우리는 넘어졌던 인생의 길에서 다시 일어서야 한다. 그러나 일어서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일어서서 다시 그 길을 걸어가야 한다. 계속해서 그 길을 걸어갈 수 있는 에너지를 공급받아야 한다. 서로 함께 하는 삶이 이것을 가능하게 해준다. 高樹靡陰 獨木不林(고수미음 독목불림)이라고 했다. ‘위로만 솟은 나무는 그늘을 만들지 못하고, 홀로 서 있는 나무는 숲을 만들지 못한다.’는 뜻이다. 서로 함께하는 곳에 쉼과 회복을 주는 그늘과 숲이 있다. 저와 여러분의 삶이, 그리고 우리 교회가 인생길에서 지친 사람들에게 그늘이 되고, 숲이 되기를 바란다.

 

3. 승리하게 됨(12).

소 한 마리가 끌 수 있는 양이 6톤이라고 한다. 그런데 두 마리가 끌 수 있는 양은 12톤이 아니라 24톤이다. 무려 4배나 된다. 이것은 서로 함께 협력하면 새로운 힘이 나오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을 ‘시너지 효과’(synergy effect)라고 한다. 작은 것도 함께 모이면 큰 힘을 발휘한다. 아프리카 밀림에서 가장 무서운 존재가 개미떼라고 한다. 덩치가 큰 코끼리도, 맹수의 왕 사자도, 날쌘 치타도 이들을 두려워한다. 그 큰 코끼리도 이들에게 붙잡히면 하루면 앙상한 뼈만 남는다. 부드러운 물도 모이면 커다란 제방도 무너뜨리고, 돌도 나무도 집도 다 무너뜨린다. 요즈음은 물을 세게 뿜어내어 옷감과 같은 천에서부터 콘크리트, 돌, 쇠 등을 자르는데 사용되는 물칼도 있다. 작고 약한 것도 모이면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것이 서로 함께의 원리다.

 

12절에, “한 사람이면 능히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세 겹 줄’의 의미를 흥미롭게 해석한 사람이 있다. ‘믿음의 사람 두 사람이 함께 하면 거기에 주님이 함께 하시고, 주님이 가세한 세 겹 줄은 결코 끊어질 수 없다.’ 그렇다. 우리가 서로 함께하고 거기에 주님이 함께 하신다면 무엇을 두려워하겠는가? 또한 무엇이 두렵겠는가? 사실 이것이 주님의 약속이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18:20). 서로 함께 하는 곳에 주님이 함께 하신다. 주님이 함께 하시면 모든 것이 잘되고, 모든 일에 승리할 수밖에 없다. 무슨 일이든 혼자는 힘들어도 함께하면 잘 할 수 있다. 혼자하면 실패해도 함께하면 승리한다.

 

같이 산다는 것

지난주일 주보글에서 소개했던〈달마야 놀자!〉라는 영화를 기억할 것이다. 이 영화는 하늘과 땅만큼 서로 다른 사람들(조폭과 스님)이 함께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일종의 코미디다. 하지만 이를 통해 ‘같이 산다는 것, 즉 서로 함께 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고 있다. 이것이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인 조폭 두목과 주지승 사이의 대화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머무는 동안 계속 사고를 치고, 그 때마다 감싸주기만 한 주지에게 조폭 두목이 물었다. ‘스님은 왜 우리가 잘못해도 꾸짖거나 내치지 않고 감싸주는 것입니까?’ 그러자 주지가 두목에게 물었다. ‘밑 빠진 독에 물을 채울 때 무슨 맘으로 하였느냐?’ ‘그냥 항아리를 연못에 던져 넣었습니다.’고 대답했다. ‘나도 밑 빠진 너희를 내 마음속에 던져 넣었다.’고 주지가 말한다.

 

서로 함께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은 알지만 어떻게 조폭처럼 밑 빠진 독과 같은 인생, 고칠 수 없는 인생과 같이 살 수 있을까? 어떻게 조폭 같은 남편, 자식, 부모, 이웃과 함께 할 수 있을까? 이는 우리의 고민이다. 그것은 ‘그냥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것’이다. 연못이 밑 빠진 독을 품어 물에 잠기게 하듯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냥 받아주고 감싸주고 품고 살아가는 것이다. 사랑은 그가 누구인지 묻지 않는다. 어떤 사람인지 따지지도 않는다. 차별하지도 않고, 무시하지도 않는다. 그냥 받아주고 감싸주고 품어준다. 이것이 같이 사는 법이다. 서로 함께 살아가는 법이다. 이를 통해 다시 일어서게 되고, 서로 격려하고 위로하고 붙들어주고 용기를 주게 된다. 그리하여 잘되고, 승리하게 된다. 교회는 다양한 사람들이 서로 함께하는 곳이다. 서로 함께하는 삶을 훈련하는 곳이다. 우리 교회를 통하여 서로 함께하는 삶을 훈련하고 실천하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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