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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오십시오. 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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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2,278회 작성일 14-11-30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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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오십시오. 주님!

행1:6~11

2014. 11/30. 11:00(세대통합예배)

기다림의 절기, 대강절(Advent)

 오늘부터 성탄절 전까지를 교회력에서는 ‘대강(림)절’이라고 부른다. 대강절은 기다리는 절기다. 이미 2천 년 전에 유대 땅으로 오신 주님을 기억하고,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절기다. 그런데 이 절기가 시기적으로 겨울이 깊어가고 어둠이 짙어가는 기간에 있다. 이 사실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이는 주님께서 다시 오시기전 세상의 모습과, 절망이 깊은 세상에서 주님이 유일한 소망이시라는 뜻이다.

 

인간은 미래를 바라보며 사는 소망의 존재다. 인간이란 단어가 그것을 말해준다. 헬라어로 인간을 ‘안드로포스’(ανθρωπος)라고 한다. 이는 머리를 들고 서서 걸어 다니는 존재, 즉 ‘위를 바라보며 사는 존재’라는 뜻이다. 위를 바라보며 산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님을 바라보며 사는 ‘영적인 존재’라는 것과, 미래를 바라보며 사는 ‘소망의 존재’라는 것이다. 94%의 사람들이 자신의 인생목표를 기다리는 데 있다고 했다. 더 좋은 사람을 기다리고, 더 좋은 직장을 기다리고, 더 좋은 소식을 기다리고, 더 좋은 만남을 기다리고, 더 좋은 기회를 기다리는 것이다. 성공을 기다리고, 치유와 회복을 기다리고, 행복을 기다린다. 그러니 인생은 기다림의 연속이다. 심리학자 브리즈니츠가 두 사람을 얼음물에 손을 담그고 누가 오래 견디는지 실험을 했다. 한 사람에게는 남은 시간을 계속 알려주고, 다른 한 사람에게는 아무런 말도 해주지 않았다. 결과는 남은 시간을 알려준 사람이 훨씬 오래까지 견뎠다. 사실 우리에게 내일에 대한 기대와 기다림이 있기에 오늘의 어려움과 고통을 참고 견디며 살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 가장 스트레스를 받을 때는 어려움을 당할 때가 아니다. 기대와 소망이 무너질 때다. 인간은 미래를 바라보며 사는 기다리는 존재, 소망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특히 본문을 근거로 ‘신자는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사람들이고, 교회는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공동체’로 정의할 수 있다.

 

마라나다!(μαραναθα!)

기독교 신앙은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재림이 핵심이다. 우리의 최대관심은 주님의 십자가와 나와의 관계, 주님의 부활과 나와의 관계, 주님의 재림과 나와의 관계에 있고, 또 그래야 한다. 본문은 부활과 재림 사이에 일어난 승천사건에 대한 내용이다. 여기서 우리는 재림의 약속을 읽을 수가 있다. 사실 우리는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재림만큼 승천을 중요하게 생각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승천이야말로 부활과 재림을 확실하게 보장해주는 증거다. 아마 성경에 승천에 대한 기록이 없었다면 부활과 재림은 역사성을 잃고, 관념화 신화화되었을지도 모른다. 부활과 재림의 중간에 승천이 못을 박듯 확실하게 자리함으로 부활과 재림은 비로소 확실하게 구체성을 띠고, 현실성과 역사성을 지니게 된 것이다. 본문은 재림신앙이 승천사건에서 출발하였음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11).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마라나다’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는 재림신앙을 잘 표현하는 말이다. 마라나다란 말은 아람어로 초대교회의 중요한 신앙고백이면서 인사말이었다. 이 단어가 고전16:22절에 나오는데, 개역성경은 ‘주께서 임하시느니라.’(선언적 의미)로 번역하였고, 개역개정은 ‘주여 오시옵소서.’(기원적 의미)로 번역하였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승천하신 주님이 속히 재림하실 것으로 믿었다. 이를 ‘임박한’ 종말사상이라고 한다. 때문에 그들은 마라나다를 주로 선언(포)적인 의미로 사용했다. 그래서 이 말로 핍박과 고난 중에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였다. ‘조금만 참자. 조금만 견디자. 주님 (곧)오신다!’(약5:8,9). 반면에 주님을 위해 열심을 내지 않는 사람들, 열심히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경고적인 의미가 되었다. ‘열심을 내라. 게으르지 마라. 주님 (곧)오신다!’(고전16:22).

 

그런데 속히 오리라 기대했던 주님은 오시지 않고 사도들은 물론 목격자들까지 죽고, 시간이 자꾸 흘러갔다. 그러면서 새로운 종말사상이 생겨났다. ‘지연된’ 종말사상이다. 그러자 마라나다의 의미도 주님 곧 오신다는 ‘선언(포)’에서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계22:20) 라는 ‘기원(도)’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마라나다는 그대로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간절한 기도(원)가 되었다. 건전하고 건강한 신앙은 이 둘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다. 언제 오실지 모르는 주님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자기 생활에 충실하면서 동시에 주님이 곧 오신다는 긴장을 놓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마라나다 신앙을 잘 나타내는 것이 대강절이다. 그리고 이 대강절은 11월 말에서 12월까지 한 달이 아니라 매일이 되어야 한다. 평생이 되어야 한다.

 

주의 길을 예비하라!

본문은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자세에 대한 중요한 교훈을 준다. 그것은 재림을 단순히 정적(靜的)인 경건으로 받아들이지 말라는 것이다. 최후의 당부로 선교적인 사명(8)을 말씀하신 다음 주님은 홀연히 하늘로 올라가셨다(9). 갑작스런 주님의 승천에 제자들은 망연히 주님이 올라가신 하늘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 때 두 천사가 그들 곁에 나타나서 말했다(10).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11). 속히 일상으로 돌아가라는 뜻이다. 이 말씀이 아니었다면 어리석은 사람들은 아마 날마다 하늘만 쳐다보고 있었을 것이다. 너희가 본 그대로 오시리라 했으니까! 그러나 주님은 천사를 통하여 그렇게 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만사 뒷전에 제쳐놓고 주님 기다린다며 금식이나 철야를 하면서 망연히 기다리지 말라는 것이다. 정적인 경건으로 명상이나 하며 기다리는 식의 대망사상은 안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고 있는데도 데살로니가 교회를 비롯하여 교회사에서 이런 일들이 왕왕 일어났다. 20여 년 전(1999.10.31)에 우리나라에서 있었던 다미선교회 사건도 그 중 하나다. 재림을 기다리는 자세는 가만히 있는 자세, 노는 자세가 아니라 일하는 자세, 섬기는 자세다. 금번 대강절에 주님을 기다리는 자세에 대하여 생각해 보려고 한다.

 

고대 헬라-로마시대에 황제나 왕이 어느 도시(지역)를 방문한 것을 ‘파루시아’(παρουσία)라고 했다. 그런데 신약성경의 저자들(특히 바울)은 이 ‘파루시아’를 주님의 영광스러운 오심(재림)을 가리키는데 사용하였다. 그리고 황제나 왕의 방문에 앞서 사자(전령)가 먼저 그 도시(지역)로 가서 황제의 방문을 알리면 시민들이 나와서 길을 새로 만들거나 평탄하게 잘 다듬은 다음 세마포를 깔면서 황제가 오는 길을 예비했다. 우리도 손님이 온다고 하면 집안을 청소하고 단정하게 준비하여 손님을 맞이하는 것과 같다. 선지자 이사야는 이와 같은 황제의 방문에 빗대어 다음과 같이 하나님의 길을 예비하라고 외쳤다(사40:3~5).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이는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

 

복음서 기자들은 이 말씀을 요단강에서 물로 회개의 세례를 베푸는 세례요한에게 적용하였다. 예수님보다 6개월 먼저 와서 광야에서 생활을 하며 백성들에게 회개를 선포하고, 회개의 세례를 베푼 요한이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도록 보냄을 받은 사자(선구자)라는 것이다. 우린 여기서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자세가 무엇인지, 주님이 나의 마음과 우리 가정과 우리 교회에 임하시도록 길을 예비하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 수 있다. 그것은 바로 ‘회개’이다. 그래서 대강절을 ‘겨울의 사순절’이라고 불렀다. 사순절은 주님이 가신 고난의 자취를 따르며 부활을 준비하는 참회의 기간이다. 그런데 이 대강절을 겨울의 사순절이라고 부른 것은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준비 역시 참회(회개)가 중요하다는 뜻이다. 이사야의 말씀처럼 낮은 곳은 돋우고, 높은 곳은 낮추고, 울퉁불퉁 고르지 못한 곳은 평탄하게 하고, 구불구불한 곳은 곧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곧 회개다.

 

죄를 따라 다니는 죄인 Vs 죄로부터 도망치는 죄인

회개를 헬라어로 ‘메타노이아’(μετανόια)라고 한다. 이는 단순히 옛 잘못을 뉘우치고 고친다는 정도가 아니라 ‘의식의 변화’를 뜻한다. 몇 가지 잘못된 태도나 습관을 고치는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속사람이 ‘근본적으로 변한다.’는 뜻이다. 즉 그의 존재 이유와 목적, 삶의 방향을 바꾼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회개는 단순한 뉘우침이 아니라 철저한 방향전환이다. 더 나아가 회개는 죽는 것이다. 죄에 대하여 죽고, 세상에 대하여 죽고, 육신과 정욕에 대하여 죽는 것이다. 한 아이와 목사님의 신앙상담 내용이다.

 

목사: 믿기 전에 너는 어떤 사람이었니?

아이: 저는 죄인이었습니다.

목사: 그럼 지금은 어떤 사람이니?

아이: 지금도 죄인입니다.

목사: 그래, 그럼 예수님을 믿기 전과 믿은 후에 달라진 것은 없니?

아이: 믿기 전에는 죄를 따라 다니는 죄인이었는데, 믿은 후에는 죄로부터 도망 다니는 죄인입니다.

 

어쩐지 아이의 대답이 아이답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회개의 의미를 잘 말해주고 있다. 죄를 따라 다니던 죄인이 죄로부터 도망을 다니는 죄인이 되었다는 것은 방향이 완전히 바꿨다는 것이다. 우리 찬송가에도 ‘주 안에 감추인 새 생명 얻으니 이전에 좋던 것 이제는 값없다.’(436장 2절)고 말한다. 이전에 좋게 여기던 것, 가치 있게 여기고, 중요하게 여겼던 것들에 이제 더 이상 가치나 의미를 두지 않는 것이 회개다. 이렇게 이전 것들로부터 철저히 돌아선 사람이 신자다. 그리고 이런 삶의 자세를 가지고 주님을 기다리는 것이 마라나다 신앙이다.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대강절 정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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