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의 감사(06-11-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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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6,746회 작성일 06-11-20 12:25본문
다니엘의 감사
단6:1~10
「만약 세계가 100명의 마을이라면」이란 책이 있습니다. 전 이 책을 보고서 ‘내가 참 부자다!’ ‘참으로 감사할 일이 많은 사람이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 책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은행에 예금이 있고, 지갑에 돈이 들어 있고, 집안 어디에 잔돈이 굴러다니는 사람은 마을에서 가장 부유한 8명 안에 드는 사람이고, 자가용을 가진 사람은 100명 중에 7명 안에 드는 부자고, 마을 사람들 중에 대학교육을 받은 사람은 1명. 바로 그 8명 중에, 그 7명 중에, 그 1명 중에 제가 들어 있다는 사실을 새롭게 깨달은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부자이고, 감사할 것이 많은 사람입니까? 전 여기서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일상성에 대한 감사입니다. 생활에서 일어나는 평범한 것들 속에서 감사를 발견하고 감사하는 일의 중요성입니다.
그런데 실제 생활 속에서 이 일상적인 것들에 대해서 그다지 감사를 느끼지 못하고 살 때가 많습니다. 매일 바라보는 태양, 밤 하늘을 수놓은 별들, 건강한 가족과 이웃, 생활할 수 있는 건강, 생계를 이어갈 수 있는 일터. 이 모든 일상적인 것들에 대하여 감사를 드린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너무 일상적인 것이기에 그저 당연하게 여긴 까닭입니다. 하지만 참된 감사는 이와 같은 일상성에서 비롯되어야 합니다. 아이가 공부 잘하는 것도 감사할 일이지만 건강하게 자라는 것을 더 감사하고, 많은 수입도 감사할 일이지만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그 일을 통해 보람을 느끼는 것을 감사하고, 예쁜 외모나 건강도 감사하지만 지금까지 살아 있음을 감사해야 합니다. 그런다면 우리의 삶은 지금보다 훨씬 행복하게 될 것입니다.
괴테는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인간은 감사할 줄 모르는 인간’이라고 했습니다. 세익스피어 역시 ‘세찬 겨울눈보라도 감사하지 않는 사람의 마음보다 모질지는 않다’고 했습니다. 감사가 있는 마음, 감사가 넘치는 사람은 마음이 따뜻하고 모두에게 유익한 사람입니다. 누구에게나 사랑받고 환영받고 존경을 받습니다. 이는 신앙 안에서도 마찬가집니다. 오늘 이와 같은 신앙의 선배를 한 분 여러분에게 소개하겠습니다. 그는 오늘 본문의 주인공 다니엘입니다.
다니엘은 이스라엘 사람인데, 나라가 바벨론과 전쟁에서 패배하여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온 사람입니다. 하지만 바벨론의 왕까지도 관심을 가질 만큼 다니엘은 탁월한 사람이었습니다. 실력과 믿음과 훌륭한 성품으로 준비된 사람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다니엘의 명성은 바벨론이 망하고 이어서 들어선 페르시아 나라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오늘 본문은 페르시아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페르시아 다리오 왕 역시 다니엘의 탁월성을 인정하여 나라의 국무총리로 임명을 하였습니다. 본문에 다니엘의 탁월성과 성품, 신앙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2절에서, ‘왕에게 손해가 없게 했던 사람’으로 묘사를 합니다. 아마도 다니엘은 재정을 담당하는 총리였던 것 같습니다(우리나라로 말하면 재경부총리). 이는 왕의 재산(결국 국가재산) 관리에 탁월성을 보였다는 뜻입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왕이 믿고 재정을 맡길 만한 깨끗한 사람이었다는 말씀입니다.
3절에서, ‘마음이 민첩하고 뛰어났다’고 합니다. 민첩하다는 것은 뚜렷하게 구별이 된다는 뜻입니다. 즉 다른 사람들과 비교를 했을 때 다니엘이 업무는 물론 인격 등 모든 면에서 탁월했다는 뜻입니다. ‘충성되어 아무 그릇함도 없고 아무 허물도 없었음이라.’고 말씀 한 4절은 3절에 대한 보충입니다. 충성될 뿐만 아니라 사심도 없는 거의 완벽한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이는 도덕으로 완전하다는 말이 아닙니다(왜냐하면 도덕적으로 완전한 의인은 하나도 없기 때문). 업무에 있어서, 그가 맡은 일에 있어서 그릇함이나 허물이 없이 완벽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페르시아 왕 다리오가 민족이 다르고 종교가 다르지만 그를 총리로 삼은 것입니다. 하지만 이 때문에 다니엘은 큰 어려움에 빠지게 됩니다........(본문설명 생략)
그런데 다니엘에게 이 위기는 신앙적 탁월성을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서 그가 믿는 신앙의 탁월성을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새무얼 스마일즈는 ‘위기는 인간에게서 그가 가진 최상의 자질을 끌어낸다’고 했습니다(「의무론」에서). 그리고 누구도 그의 신앙에 대하여 시비를 걸지 못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바로 이 위기에 빛난 것이 그의 감사하는 신앙입니다(10절). 여기서 다니엘의 감사하는 신앙을 몇 가지로 정리해 볼 수가 있습니다,
1. 의지적인 감사입니다.
어떤 사람은 다니엘의 태도를 보며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참으로 다니엘은 융통성이 없는 답답한 사람이다.’ 어떻게 보면 융통성이 없어 보이기도 합니다. 이 법령의 유효기간이 30일이니까. 잠시 기다렸다가 곱빼기로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아니면 창문을 꼭꼭 닫거나, 커튼을 쳐놓거나, 기도시간을 바꾸어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니엘은 피해가는 대신 평소대로 생활했습니다.
여러분, 만일 여러분이 다니엘의 입장이었다면 어떻게 했을 것 같습니까? 어떤 목사님이 한 번은 교인에게 이렇게 물어 보았답니다. ‘직장에서 식사할 때 기도합니까?’ 그랬더니 그 교인은 안한다고 하더랍니다. 왜 기도를 안하느냐고 물었더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고 하더랍니다. 이유인즉 ‘식사시간에 기도를 하면 사람들이 제가 크리스천인지 다 알게 되잖아요. 그런데 제가 혹 직장생활 하다가 실수라도 하게 된다면 하나님 영광이 가려지지 않겠습니까?’라고 하더랍니다. 참으로 기발한 생각이지요. 그래서 목사님이 하나님께 여쭤 봤답니다. ‘하나님, 이런 경우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때 하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시는 것 같더랍니다. ‘네 교인, 머리 하나는 끝내주는구나. 어떻게 그런 생각을 다 했을까? 내 영광 많이도 생각해 주는구나. 그러나 그런 영광은 생각 안 해줘도 좋으니 관두라고 해라.’ 그러나 여러분, 공감은 되시지요? 신앙을 드러내며 당당하게 사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다니엘은 자신의 신앙을 드러내기를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다 알고도 전에 행하던 데로 하루 세 번씩 하나님께 무릎 꿇고 기도하며 감사하였습니다. 이는 죽음을 각오한 신앙적 결단이요, 감사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감사를 잃지 않는 모습입니다.
10절, ‘.....알고도.....’라고 단어를 주목해 주십시오.
이 말씀은 1)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
2)조서의 내용을 어기면 어떻게 되는 것,
3)적들이 고발할 기회를 엿보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실들을 알고도 기도하고 감사했다는 말씀입니다. 이는 다니엘의 신앙적 의지를 엿볼 수 있는 말씀입니다. 어떤 경우도 타협하지 않겠다는 신앙적 결심입니다. 바로 이런 신앙적 결심이 있었기에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 중요한 것 중에 이와 같은 의지적 결단이 있습니다. 감사도 마찬가집니다. 감사할 수 없는 환경, 상황일지라도 감사하며 살기로 결심하고 결단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런 감사를 의지적 감사라고 합니다.
영어의 ‘생각하다’는 단어 think와 ‘감사하다’는 단어 thank는 어원이 같습니다. 이는 감사하기 위해서는 생각이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무엇을 생각하느냐, 어떤 각도에서 생각하느냐에 따라 감사할 수도 있고, 불평할 수도, 원망할 수도 있습니다. 환경이 달라져야 감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이 달라져야 감사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돈이 생겨야, 병이 나아야, 진급하고, 합격하고, 사업이 잘되어야 감사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을 바라보고 사느냐, 무엇을 생각하고 사느냐, 어느 방향으로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생각의 방향을 조정하는 것이, 우리의 생각을 주장하는 것이 의지입니다.
「주는 나의 피난처」라는 책이 있습니다. 코리텐 붐이 나치독일의 수용소에서 많은 고생을 치른 체험담을 기록한 것입니다. 이 책에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당시 코리는 언니와 함께 갇혔는데 그들이 갇힌 감방은 유독 벼룩이 많은 곳이었습니다. 벼룩 때문에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코리의 언니는 동료들에게 벼룩이 있는 것도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독려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언니는 독일군의 감시를 피해 감방에 있는 사람들에게 성경을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독일군 간수들이 멀리서 감방을 쳐다보고는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벼룩 때문이었습니다. 벼룩 때문에 간수들이 그 감방에 접근을 안 한 것입니다. 그 덕분에 그들은 마음 놓고 성경을 공부하고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보십시오. 벼룩에 대해서도 감사할 이유가 있지 않습니까? 감사할 수 없는 환경에도 불구하고 의지적으로 감사하다 보니 무익해 보이는 상황조차도 하나님의 섬세하신 섭리였음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보 묵상의 글은 정호승 씨의 산문 「위안」이란 책의 서문입니다. “하루살이는 하루만 살 수 있는데, 불행히도 하루 종일 비가 올 수도 있다.” 저는 이 글을 읽고 큰 충격과 감동을 받았습니다. 하루밖에 살지 못하는 하루살이에게 하루 종일 비가 온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 인간에게 하루는 짧은 시간이지만 하루살이에게 하루는 평생입니다. 맑은 바람 한 번 들이켜지 못하고, 따스한 햇살 한 번 쬐어보지 못하고 일생동안 비만 맞고 있다가 생명을 다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짧게는 1년, 길게는 3년 동안 물속에 있다가 겨우 알에서 깨어나 맑은 세상을 날 수 있는 성충이 되었는데, 하루 종일 비가 오다니. 만약 내가 하루살이였다면 어떻게 했을까? 하늘을 원망하고 운명을 한탄하다가 죽어버렸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의 삶은 하루살이의 삶보다 얼마나 행복한지 모릅니다. 비록 궂은 날이 있어도 하루살이의 일생처럼 그렇지는 않습니다. 때때로 불행한 일들이 일어나지만 항상 불행한 일만 있지는 않습니다. 그런데도 하루살이는 자신의 삶을 비관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감사하면서 최선을 다하며 산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생각과 관점의 방향입니다. 아니 의지적 결단이 문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내 삶을 어떻게 살겠다’는 의지적 결단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다니엘의 삶이요, 신앙이요, 감사였습니다. 다니엘은 그 정망적인 상황과 환경에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지키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어떤 것인 줄 알고도 전에 하던 대로 감사하며 기도를 하였습니다. 바로 이런 믿음, 이런 감사를 주님은 기뻐하십니다.
2. 훈련된 감사입니다.
키케로는 ‘감사는 가장 위대한 품성이며 모든 성품의 아버지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합니다. 다니엘이 이처럼 돈 관리에 깨끗하고, 업무능력이 뛰어나고, 성실하고, 대인관계도 원만하고, 신앙생활에 당당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감사하는 태도에 그 바탕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망한 사람이 없는 것처럼 하루아침에 좋은 성품, 좋은 신앙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감사도 마찬가집니다. 감사가 몸에 베이도록 훈련해야 감사가 생활화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왜 감사해야 하는지를 생각하면서 크고 작은 일에 감사를 표현하고 감사를 훈련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감사에 인색한 이유 중 하나는 서두에서도 말씀드렸듯이 매사를 너무 당연시하는 습관 때문입니다. 세상에 당연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산에 가보신 분들을 아실 것입니다. 나무 한 그루, 풀 한포기도 주변 생명체들의 희생의 결과입니다. 우리 인생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나라고 하는 존재는 부모와 형제를 비롯한 수많은 희생의 결과물입니다. 그러므로 나와 관계된 어떤 것도 당연한 것은 없습니다. 이 말은 모든 것이 감사의 조건이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아니 이런 것들을 내게 허락하신 주님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감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감사는 형통의 비밀입니다. 형통할 때 감사하면 형통이 연장됩니다. 반면에 불행할 때 감사하면 불행이 끝이 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좋은 것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분이십니다. 특히 하나님은 감사하는 사람에게 자꾸 좋은 것을 부어주십니다. 이런 복을 누리기 위해선 우리 역시 감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감사를 생활화해야 합니다.
본문 10절 다시 한번 읽겠습니다. 여기서 ‘.....전에 행하던 대로.....’라는 말씀에 표시를 하시기 바랍니다. 다니엘이 위기 속에서도 기도하고 감사할 수 있었던 비결을 보여주는 중요한 말씀입니다. 이는 다니엘의 기도, 다니엘의 감사가 습관이 되어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습관이 되어 있었기에 그 위기 상황에도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리고, 감사를 드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니엘은 하루에 세 번씩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어놓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감사하는 생활을 훈련하였습니다. 이 훈련을 통해 감사를 생활화한 것입니다. 훈련없이 습관은 없습니다. 사소한 습관도 훈련이 있어야 됩니다. 그리고 습관이 된 것은 무의식적으로 흘러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복된 인생, 행복한 신앙생활을 위해 훈련해야 할 일들이 참 많습니다. 그 중에 아주 중요한 것이 감사훈련입니다. 우리의 몸은 우리가 훈련하는 쪽으로 되어 갑니다. 언제가 어느 인디언 족장이 자기 손자에게 해준 이야기를 여러분에게 해드린 적이 있습니다. 우리 안엔 감사라고 하는 선한 늑대와 불평이라고 하는 악한 늑대가 싸우고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어느 쪽에 먹이를 주느냐에 따라 두 늑대간의 싸움이 결판납니다. 감사라고 하는 선한 늑대에게 먹이를 주면 우리의 삶은 감사하는 삶이 되고, 불평이라고 하는 악한 늑대에게 먹이를 주면 우리의 삶은 불평하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훈련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다니엘처럼 감사하는 생활을 훈련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도 감사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용기있는 믿음에 기초한 감사입니다.
폴 틸리히(Paul Tillich)란 신학자가 쓴 「존재에로의 용기」(Courage to Be)란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 그는 말합니다. "신앙이란 용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고 하는 용기. 인간의 이성적 판단을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떨치고 일어나는 용기, 이것이 신앙의 힘이다." 다니엘의 신앙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니엘은 참으로 용기있는 신앙을 가진 믿음의 용장(勇壯)입니다.
이와 같은 그의 믿음을 그의 기도생활을 통하여 알 수가 있습니다. 한 사람의 신앙적 깊이를 알아볼 수 있는 방법은 그의 기도생활에 있습니다. 기도생활을 보면 믿음의 깊이를 알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기도는 하나님과의 친밀감과 신뢰도에 비례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친밀감과 신뢰도가 깊을수록 기도시간이 많아지고 기도의 질이 달라집니다. 그런데 다니엘은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우린 때때로 바쁘다는 핑계로 기도를 게을리 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다니엘은 당시 대제국의 재상이었습니다. 바쁜 것으로 치면 다니엘만큼 바쁜 사람도 드물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매일 세 번씩, 그것도 아무 곳에서나 기도한 것이 아닙니다. 자기 집에 와서 예루살렘으로 난 창가에 앉아 기도를 드렸습니다. 두어 번 이렇게 한 것이 아닙니다. 평생을 이렇게 살아왔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숩관적인 행위가 아닙니다. 뿌리 깊은 영성에 기초한 신앙적 행동입니다. 이렇게 기도로 다녀진 영성을 가졌기에 위기의 순간에도 흔들리지 않고 감사를 드릴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또 하나의 다니엘의 감사입니다.
감사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감사를 기뻐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부를 좋아하셔서 우리의 감사를 기뻐하신 것이 아니라, 감사가 곧 믿음의 표현이기에 기뻐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히11:6). 그리고 이 믿음을 성숙시키는 것이 기도생활입니다. 기도는 믿음이란 씨앗에 물을 주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다니엘은 기도생활로 용기있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고, 이 믿음에 기초하여 감사를 드렸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다니엘처럼 기도의 사람들이 됩시다. 그리하여 어떤 상황이나 환경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용기있는 믿음을 가지고 감사하는 사람들이 됩시다. 특히 금주에 실시하는 개혁주간 총동원 새벽예배에 모두 참석하셔서 깊은 기도로 믿음을 새롭게 다지고 신앙성숙의 기회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삶의 모든 문제는 정지(停止)표시가 아니라 방향(方向)표시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한쪽 문이 닫히면 또 다른 문을 열어놓으십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열린 문을 보기보다 닫힌 문을 바라보면서 불평하고 원망하다가 인생을 마감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삶을 부정적으로 보지 마십시오. 환경이 바뀌고 여건이 바뀌고 세상이 달라지기를 기다리지 말고,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십시오. 잃은 것만 보지 말고 남아있는 것을 보십시오. 할 수 없는 것에 좌절하지 말고 할 수 있는 것을 찾아보고 기뻐하십시오. 왜냐하면 절망하고 불평하는 사람에겐 그 길이 보이지 않지만, 삶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감사하며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닫힌 문도 열리는 법입니다. 다니엘의 삶이 이를 증명해 줍니다. 감사하는 태도가 다니엘을 형통하게 했고 역전의 삶을 살게 했습니다. 시편50:23의 말씀에,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단6:1~10
「만약 세계가 100명의 마을이라면」이란 책이 있습니다. 전 이 책을 보고서 ‘내가 참 부자다!’ ‘참으로 감사할 일이 많은 사람이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 책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은행에 예금이 있고, 지갑에 돈이 들어 있고, 집안 어디에 잔돈이 굴러다니는 사람은 마을에서 가장 부유한 8명 안에 드는 사람이고, 자가용을 가진 사람은 100명 중에 7명 안에 드는 부자고, 마을 사람들 중에 대학교육을 받은 사람은 1명. 바로 그 8명 중에, 그 7명 중에, 그 1명 중에 제가 들어 있다는 사실을 새롭게 깨달은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부자이고, 감사할 것이 많은 사람입니까? 전 여기서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일상성에 대한 감사입니다. 생활에서 일어나는 평범한 것들 속에서 감사를 발견하고 감사하는 일의 중요성입니다.
그런데 실제 생활 속에서 이 일상적인 것들에 대해서 그다지 감사를 느끼지 못하고 살 때가 많습니다. 매일 바라보는 태양, 밤 하늘을 수놓은 별들, 건강한 가족과 이웃, 생활할 수 있는 건강, 생계를 이어갈 수 있는 일터. 이 모든 일상적인 것들에 대하여 감사를 드린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너무 일상적인 것이기에 그저 당연하게 여긴 까닭입니다. 하지만 참된 감사는 이와 같은 일상성에서 비롯되어야 합니다. 아이가 공부 잘하는 것도 감사할 일이지만 건강하게 자라는 것을 더 감사하고, 많은 수입도 감사할 일이지만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그 일을 통해 보람을 느끼는 것을 감사하고, 예쁜 외모나 건강도 감사하지만 지금까지 살아 있음을 감사해야 합니다. 그런다면 우리의 삶은 지금보다 훨씬 행복하게 될 것입니다.
괴테는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인간은 감사할 줄 모르는 인간’이라고 했습니다. 세익스피어 역시 ‘세찬 겨울눈보라도 감사하지 않는 사람의 마음보다 모질지는 않다’고 했습니다. 감사가 있는 마음, 감사가 넘치는 사람은 마음이 따뜻하고 모두에게 유익한 사람입니다. 누구에게나 사랑받고 환영받고 존경을 받습니다. 이는 신앙 안에서도 마찬가집니다. 오늘 이와 같은 신앙의 선배를 한 분 여러분에게 소개하겠습니다. 그는 오늘 본문의 주인공 다니엘입니다.
다니엘은 이스라엘 사람인데, 나라가 바벨론과 전쟁에서 패배하여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온 사람입니다. 하지만 바벨론의 왕까지도 관심을 가질 만큼 다니엘은 탁월한 사람이었습니다. 실력과 믿음과 훌륭한 성품으로 준비된 사람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다니엘의 명성은 바벨론이 망하고 이어서 들어선 페르시아 나라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오늘 본문은 페르시아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페르시아 다리오 왕 역시 다니엘의 탁월성을 인정하여 나라의 국무총리로 임명을 하였습니다. 본문에 다니엘의 탁월성과 성품, 신앙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2절에서, ‘왕에게 손해가 없게 했던 사람’으로 묘사를 합니다. 아마도 다니엘은 재정을 담당하는 총리였던 것 같습니다(우리나라로 말하면 재경부총리). 이는 왕의 재산(결국 국가재산) 관리에 탁월성을 보였다는 뜻입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왕이 믿고 재정을 맡길 만한 깨끗한 사람이었다는 말씀입니다.
3절에서, ‘마음이 민첩하고 뛰어났다’고 합니다. 민첩하다는 것은 뚜렷하게 구별이 된다는 뜻입니다. 즉 다른 사람들과 비교를 했을 때 다니엘이 업무는 물론 인격 등 모든 면에서 탁월했다는 뜻입니다. ‘충성되어 아무 그릇함도 없고 아무 허물도 없었음이라.’고 말씀 한 4절은 3절에 대한 보충입니다. 충성될 뿐만 아니라 사심도 없는 거의 완벽한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이는 도덕으로 완전하다는 말이 아닙니다(왜냐하면 도덕적으로 완전한 의인은 하나도 없기 때문). 업무에 있어서, 그가 맡은 일에 있어서 그릇함이나 허물이 없이 완벽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페르시아 왕 다리오가 민족이 다르고 종교가 다르지만 그를 총리로 삼은 것입니다. 하지만 이 때문에 다니엘은 큰 어려움에 빠지게 됩니다........(본문설명 생략)
그런데 다니엘에게 이 위기는 신앙적 탁월성을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서 그가 믿는 신앙의 탁월성을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새무얼 스마일즈는 ‘위기는 인간에게서 그가 가진 최상의 자질을 끌어낸다’고 했습니다(「의무론」에서). 그리고 누구도 그의 신앙에 대하여 시비를 걸지 못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바로 이 위기에 빛난 것이 그의 감사하는 신앙입니다(10절). 여기서 다니엘의 감사하는 신앙을 몇 가지로 정리해 볼 수가 있습니다,
1. 의지적인 감사입니다.
어떤 사람은 다니엘의 태도를 보며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참으로 다니엘은 융통성이 없는 답답한 사람이다.’ 어떻게 보면 융통성이 없어 보이기도 합니다. 이 법령의 유효기간이 30일이니까. 잠시 기다렸다가 곱빼기로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아니면 창문을 꼭꼭 닫거나, 커튼을 쳐놓거나, 기도시간을 바꾸어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니엘은 피해가는 대신 평소대로 생활했습니다.
여러분, 만일 여러분이 다니엘의 입장이었다면 어떻게 했을 것 같습니까? 어떤 목사님이 한 번은 교인에게 이렇게 물어 보았답니다. ‘직장에서 식사할 때 기도합니까?’ 그랬더니 그 교인은 안한다고 하더랍니다. 왜 기도를 안하느냐고 물었더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고 하더랍니다. 이유인즉 ‘식사시간에 기도를 하면 사람들이 제가 크리스천인지 다 알게 되잖아요. 그런데 제가 혹 직장생활 하다가 실수라도 하게 된다면 하나님 영광이 가려지지 않겠습니까?’라고 하더랍니다. 참으로 기발한 생각이지요. 그래서 목사님이 하나님께 여쭤 봤답니다. ‘하나님, 이런 경우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때 하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시는 것 같더랍니다. ‘네 교인, 머리 하나는 끝내주는구나. 어떻게 그런 생각을 다 했을까? 내 영광 많이도 생각해 주는구나. 그러나 그런 영광은 생각 안 해줘도 좋으니 관두라고 해라.’ 그러나 여러분, 공감은 되시지요? 신앙을 드러내며 당당하게 사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다니엘은 자신의 신앙을 드러내기를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다 알고도 전에 행하던 데로 하루 세 번씩 하나님께 무릎 꿇고 기도하며 감사하였습니다. 이는 죽음을 각오한 신앙적 결단이요, 감사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감사를 잃지 않는 모습입니다.
10절, ‘.....알고도.....’라고 단어를 주목해 주십시오.
이 말씀은 1)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
2)조서의 내용을 어기면 어떻게 되는 것,
3)적들이 고발할 기회를 엿보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실들을 알고도 기도하고 감사했다는 말씀입니다. 이는 다니엘의 신앙적 의지를 엿볼 수 있는 말씀입니다. 어떤 경우도 타협하지 않겠다는 신앙적 결심입니다. 바로 이런 신앙적 결심이 있었기에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 중요한 것 중에 이와 같은 의지적 결단이 있습니다. 감사도 마찬가집니다. 감사할 수 없는 환경, 상황일지라도 감사하며 살기로 결심하고 결단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런 감사를 의지적 감사라고 합니다.
영어의 ‘생각하다’는 단어 think와 ‘감사하다’는 단어 thank는 어원이 같습니다. 이는 감사하기 위해서는 생각이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무엇을 생각하느냐, 어떤 각도에서 생각하느냐에 따라 감사할 수도 있고, 불평할 수도, 원망할 수도 있습니다. 환경이 달라져야 감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이 달라져야 감사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돈이 생겨야, 병이 나아야, 진급하고, 합격하고, 사업이 잘되어야 감사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을 바라보고 사느냐, 무엇을 생각하고 사느냐, 어느 방향으로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생각의 방향을 조정하는 것이, 우리의 생각을 주장하는 것이 의지입니다.
「주는 나의 피난처」라는 책이 있습니다. 코리텐 붐이 나치독일의 수용소에서 많은 고생을 치른 체험담을 기록한 것입니다. 이 책에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당시 코리는 언니와 함께 갇혔는데 그들이 갇힌 감방은 유독 벼룩이 많은 곳이었습니다. 벼룩 때문에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코리의 언니는 동료들에게 벼룩이 있는 것도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독려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언니는 독일군의 감시를 피해 감방에 있는 사람들에게 성경을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독일군 간수들이 멀리서 감방을 쳐다보고는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벼룩 때문이었습니다. 벼룩 때문에 간수들이 그 감방에 접근을 안 한 것입니다. 그 덕분에 그들은 마음 놓고 성경을 공부하고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보십시오. 벼룩에 대해서도 감사할 이유가 있지 않습니까? 감사할 수 없는 환경에도 불구하고 의지적으로 감사하다 보니 무익해 보이는 상황조차도 하나님의 섬세하신 섭리였음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보 묵상의 글은 정호승 씨의 산문 「위안」이란 책의 서문입니다. “하루살이는 하루만 살 수 있는데, 불행히도 하루 종일 비가 올 수도 있다.” 저는 이 글을 읽고 큰 충격과 감동을 받았습니다. 하루밖에 살지 못하는 하루살이에게 하루 종일 비가 온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 인간에게 하루는 짧은 시간이지만 하루살이에게 하루는 평생입니다. 맑은 바람 한 번 들이켜지 못하고, 따스한 햇살 한 번 쬐어보지 못하고 일생동안 비만 맞고 있다가 생명을 다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짧게는 1년, 길게는 3년 동안 물속에 있다가 겨우 알에서 깨어나 맑은 세상을 날 수 있는 성충이 되었는데, 하루 종일 비가 오다니. 만약 내가 하루살이였다면 어떻게 했을까? 하늘을 원망하고 운명을 한탄하다가 죽어버렸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의 삶은 하루살이의 삶보다 얼마나 행복한지 모릅니다. 비록 궂은 날이 있어도 하루살이의 일생처럼 그렇지는 않습니다. 때때로 불행한 일들이 일어나지만 항상 불행한 일만 있지는 않습니다. 그런데도 하루살이는 자신의 삶을 비관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감사하면서 최선을 다하며 산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생각과 관점의 방향입니다. 아니 의지적 결단이 문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내 삶을 어떻게 살겠다’는 의지적 결단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다니엘의 삶이요, 신앙이요, 감사였습니다. 다니엘은 그 정망적인 상황과 환경에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지키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어떤 것인 줄 알고도 전에 하던 대로 감사하며 기도를 하였습니다. 바로 이런 믿음, 이런 감사를 주님은 기뻐하십니다.
2. 훈련된 감사입니다.
키케로는 ‘감사는 가장 위대한 품성이며 모든 성품의 아버지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합니다. 다니엘이 이처럼 돈 관리에 깨끗하고, 업무능력이 뛰어나고, 성실하고, 대인관계도 원만하고, 신앙생활에 당당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감사하는 태도에 그 바탕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망한 사람이 없는 것처럼 하루아침에 좋은 성품, 좋은 신앙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감사도 마찬가집니다. 감사가 몸에 베이도록 훈련해야 감사가 생활화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왜 감사해야 하는지를 생각하면서 크고 작은 일에 감사를 표현하고 감사를 훈련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감사에 인색한 이유 중 하나는 서두에서도 말씀드렸듯이 매사를 너무 당연시하는 습관 때문입니다. 세상에 당연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산에 가보신 분들을 아실 것입니다. 나무 한 그루, 풀 한포기도 주변 생명체들의 희생의 결과입니다. 우리 인생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나라고 하는 존재는 부모와 형제를 비롯한 수많은 희생의 결과물입니다. 그러므로 나와 관계된 어떤 것도 당연한 것은 없습니다. 이 말은 모든 것이 감사의 조건이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아니 이런 것들을 내게 허락하신 주님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감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감사는 형통의 비밀입니다. 형통할 때 감사하면 형통이 연장됩니다. 반면에 불행할 때 감사하면 불행이 끝이 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좋은 것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분이십니다. 특히 하나님은 감사하는 사람에게 자꾸 좋은 것을 부어주십니다. 이런 복을 누리기 위해선 우리 역시 감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감사를 생활화해야 합니다.
본문 10절 다시 한번 읽겠습니다. 여기서 ‘.....전에 행하던 대로.....’라는 말씀에 표시를 하시기 바랍니다. 다니엘이 위기 속에서도 기도하고 감사할 수 있었던 비결을 보여주는 중요한 말씀입니다. 이는 다니엘의 기도, 다니엘의 감사가 습관이 되어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습관이 되어 있었기에 그 위기 상황에도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리고, 감사를 드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니엘은 하루에 세 번씩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어놓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감사하는 생활을 훈련하였습니다. 이 훈련을 통해 감사를 생활화한 것입니다. 훈련없이 습관은 없습니다. 사소한 습관도 훈련이 있어야 됩니다. 그리고 습관이 된 것은 무의식적으로 흘러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복된 인생, 행복한 신앙생활을 위해 훈련해야 할 일들이 참 많습니다. 그 중에 아주 중요한 것이 감사훈련입니다. 우리의 몸은 우리가 훈련하는 쪽으로 되어 갑니다. 언제가 어느 인디언 족장이 자기 손자에게 해준 이야기를 여러분에게 해드린 적이 있습니다. 우리 안엔 감사라고 하는 선한 늑대와 불평이라고 하는 악한 늑대가 싸우고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어느 쪽에 먹이를 주느냐에 따라 두 늑대간의 싸움이 결판납니다. 감사라고 하는 선한 늑대에게 먹이를 주면 우리의 삶은 감사하는 삶이 되고, 불평이라고 하는 악한 늑대에게 먹이를 주면 우리의 삶은 불평하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훈련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다니엘처럼 감사하는 생활을 훈련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도 감사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용기있는 믿음에 기초한 감사입니다.
폴 틸리히(Paul Tillich)란 신학자가 쓴 「존재에로의 용기」(Courage to Be)란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 그는 말합니다. "신앙이란 용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고 하는 용기. 인간의 이성적 판단을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떨치고 일어나는 용기, 이것이 신앙의 힘이다." 다니엘의 신앙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니엘은 참으로 용기있는 신앙을 가진 믿음의 용장(勇壯)입니다.
이와 같은 그의 믿음을 그의 기도생활을 통하여 알 수가 있습니다. 한 사람의 신앙적 깊이를 알아볼 수 있는 방법은 그의 기도생활에 있습니다. 기도생활을 보면 믿음의 깊이를 알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기도는 하나님과의 친밀감과 신뢰도에 비례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친밀감과 신뢰도가 깊을수록 기도시간이 많아지고 기도의 질이 달라집니다. 그런데 다니엘은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우린 때때로 바쁘다는 핑계로 기도를 게을리 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다니엘은 당시 대제국의 재상이었습니다. 바쁜 것으로 치면 다니엘만큼 바쁜 사람도 드물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매일 세 번씩, 그것도 아무 곳에서나 기도한 것이 아닙니다. 자기 집에 와서 예루살렘으로 난 창가에 앉아 기도를 드렸습니다. 두어 번 이렇게 한 것이 아닙니다. 평생을 이렇게 살아왔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숩관적인 행위가 아닙니다. 뿌리 깊은 영성에 기초한 신앙적 행동입니다. 이렇게 기도로 다녀진 영성을 가졌기에 위기의 순간에도 흔들리지 않고 감사를 드릴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또 하나의 다니엘의 감사입니다.
감사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감사를 기뻐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부를 좋아하셔서 우리의 감사를 기뻐하신 것이 아니라, 감사가 곧 믿음의 표현이기에 기뻐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히11:6). 그리고 이 믿음을 성숙시키는 것이 기도생활입니다. 기도는 믿음이란 씨앗에 물을 주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다니엘은 기도생활로 용기있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고, 이 믿음에 기초하여 감사를 드렸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다니엘처럼 기도의 사람들이 됩시다. 그리하여 어떤 상황이나 환경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용기있는 믿음을 가지고 감사하는 사람들이 됩시다. 특히 금주에 실시하는 개혁주간 총동원 새벽예배에 모두 참석하셔서 깊은 기도로 믿음을 새롭게 다지고 신앙성숙의 기회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삶의 모든 문제는 정지(停止)표시가 아니라 방향(方向)표시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한쪽 문이 닫히면 또 다른 문을 열어놓으십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열린 문을 보기보다 닫힌 문을 바라보면서 불평하고 원망하다가 인생을 마감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삶을 부정적으로 보지 마십시오. 환경이 바뀌고 여건이 바뀌고 세상이 달라지기를 기다리지 말고,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십시오. 잃은 것만 보지 말고 남아있는 것을 보십시오. 할 수 없는 것에 좌절하지 말고 할 수 있는 것을 찾아보고 기뻐하십시오. 왜냐하면 절망하고 불평하는 사람에겐 그 길이 보이지 않지만, 삶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감사하며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닫힌 문도 열리는 법입니다. 다니엘의 삶이 이를 증명해 줍니다. 감사하는 태도가 다니엘을 형통하게 했고 역전의 삶을 살게 했습니다. 시편50:23의 말씀에,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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