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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기는 생활(06-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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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4,901회 작성일 06-10-23 1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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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기는 생활
요13:12~20

육십이 넘은 노부부가 성격 차이를 이유로 이혼을 했습니다. 성격 차이로 이혼한 그 부부는 이혼한 그날. 이혼 처리를 부탁했던 변호사와 함께 저녁식사를 했습니다. 주문한 음식은 `통닭`이었습니다. 주문한 통닭이 도착하자 남편 할아버지는 마지막으로 자기가 좋아하는 날개 부위를 찢어서 할머니에게 권했습니다. 권하는 모습이 워낙 보기가 좋아서 동석한 변호사는 어쩌면 이 부부가 다시 화해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때 갑자기 할머니가 기분이 아주 상한 표정으로 마구 화를 내며 말했습니다.
"지난 삼십년간 당신은 늘 그래왔어. 항상 자기중심적으로만 생각하더니 이혼하는 날까지도 그러다니. 난 다리 부위를 좋아한단 말이야! 당신은 내가 어떤 부위를 좋아하는지 한번도 물어본 적이 없어.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인간."
그러자 남편인 할아버지가 말했습니다.
"날개 부위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부위야, 나는 내가 먹고 싶은 부위를 삼십년간 꾹 참고 항상 당신에게 먼저 건네준 건데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가 있어. 이혼하는 날까지."
화가 난 이 부부는 서로 씩씩대며 각자의 집으로 가버렸습니다.

집에 도착한 할아버지는 자꾸 할머니가 했던 말이 생각났습니다.
"정말 나는 한번도 아내에게 무슨 부위를 먹고 싶은가 물어 본적이 없었구나. 그저 내가 먹고 싶은 부위를 떼어 주어도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는 아내에게 섭섭한 마음만 갖고. 내가 잘못한 같아. 나는 여전히 아내를 사랑하고 있는데. 아무래도 사과를 해서 아내의 마음을 풀어주어야겠다."
이렇게 생각한 할아버지는 할머니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핸드폰에 적힌 번호를  보고 할아버지가 건  전화임을 안 할머니는 아직 화가 덜 풀려 그 전화를 받고 싶지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전화를 끓어 버렸는데, 또 다시 전화가 걸려오자 이번에는 아주 충전기를 빼버렸습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잠이 깬 할머니도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나도 지난 삼십년 동안 남편이 날개 부위를 좋아하는 줄도 몰랐네. 자기가  좋아하는 부위를 나에게 먼저 건넸는데, 그 마음도 모르고 나는 뾰로통한 얼굴만 보여주었으니 얼마나 섭섭했을까? 나에게 그렇게 마음을 써주는 줄은 몰랐구나. 아직 사랑하는 마음은 그대로인데, 헤어지긴 했지만 늦기 전에 사과해서 섭섭했던 마음을 풀어 주어야겠다."
할머니가 할아버지 핸드폰으로 전화를 했지만, 할아버지는 받지 않았습니다. 잠시 후에 낯선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전 남편께서 돌아가셨습니다."
할아버지 집으로 달려간 할머니는 핸드폰을 꼭 잡고 죽어있는 남편을 보았습니다. 그 핸드폰에는 남편이 마지막으로 자신에게 보내려고 찍어둔 문자 메시지가 있었습니다.
"미안해, 사랑해"

어쩌면 많은 부부들이 이렇게 살아가고 있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남편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고도 않고 사는 부부들 말입니다. 이 노부부는 서로 사랑하고 섬기면서 지난 30년을 살아왔습니다. 헤어지는 순간도 서로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일방적인 사랑이고, 일방적인 섬김이었습니다. 사실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없는 일방적인 사랑, 일방적인 섬김은 사랑도 섬김도 아닙니다. 그것이 상대방에게 전달되지 않는 것입니다. 도리어 자신을 무시하는 무례한 행동으로만 여겨지는 것입니다. 사랑은 상대방에 대한 배려에서 시작됩니다. 섬기도 마찬가집니다. 섬긴다고 하는 것은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입니다. 내 자신을 내려놓고 상대방을 존중하고 소중히 여긴 데서 생겨납니다. 그러므로 내 자신을 철저하게 부정하지 않고는 섬길 수가 없습니다. 자신의 명예, 사회적 지위, 체면, 이 모든 것을 티끌처럼 여기는 사람이라야 진정으로 섬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섬김을 십자가 정신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조지 뮬러는 섬김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를 고아의 아버지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이 그에게 섬김의 비결이 무어냐고 물었을 때,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내가 죽었던 날이 있었습니다."라고 말하며, 그는 그의 얼굴을 거의 마루에 닿을 정도로 낮게 굽혔습니다. 계속해서 그는, "조지 뮬러라는 내 자신에게 죽고, 또 나의 의견과 선택과 취미와 내 뜻에 죽고, 내 형제나 친구들에게 있어서도 그들의 찬성과 비난에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 때 이후로는 나는 다만, 내 자신이 하나님의 인정만을 받도록 배워 왔습니다."라고 첨부해 말하였습니다. 섬김이란 자기라는 것을 죽임으로써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 섬김이 있는 곳엔 평화와 화해가 있고, 기쁨이 있고, 감사가 있습니다. 참된 회개가 있습니다. 반면에 자기 이익이나 챙기고 자기를 주장하고, 자신의 이기적인 욕망과 야망을 불태우는 곳엔 평화와 화해, 기쁨과 감사가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에 ‘섬긴다’는 의미를 가진 단어가 3종류가 나옵니다.
1. 디아코노스라는 단어입니다. ‘일군’ ‘집사’라는 말로 번역이 되고 있습니다. 이는 누군가 다른 사람을 섬기는 사람을 뜻합니다.
2. 둘로스라는 단어입니다. ‘종’이라는 뜻이지요. 하나님의 백성을 가리키는 가장 보편적인 용어들 중 하나입니다. 특히 초대교회 신자들이 아주 즐겨 사용했던 말로 우리 신자들의 정체성을 잘 나타내 주는 단어입니다.
3. 레이투르고스라는 단어입니다. ‘봉사자’라는 뜻입니다. 시민으로서 국가에 봉사하도록 특별한 책임을 부여받은 사람을 의미합니다. 특권으로서 부여된 일에 종사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신을 가리켜 ‘이방인을 위한 레이투르고스’라고 말합니다. 자신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이방인 선교를 위해 특별히 부름받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 세 가지 단어가 우리 ‘신자들에 대한 별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신자들은 디아코노스(일군)요, 둘로스(종)요, 레이투르고스(봉사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첫째로, 다른 사람을 섬기는 사람, 곧 타인을 위한 존재입니다.
둘째로, 섬기는 종입니다. 종은 자신의 뜻, 감정, 의지를 가진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에게 자유가 있다면 복종하는 자유밖에는 없었습니다. 철저한 자기부정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셋째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부름받은 사명자입니다. 그러므로 철저한 사명의식과 거룩한 의무감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을 (복음의) 빚진자라고 표현을 했습니다. 신자는 바울처럼 거룩한 채무(債務)의식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성숙한 신앙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았던 사람들의 삶의 공통점은 그들의 삶 속에서 이 세 가지가 아주 조화롭게 잘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런 삶의 가장 대표적인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그 본을 따르도록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3장은 섬기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가장 잘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의 핵심을 가장 확실하게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3년 동안 가르쳐 주셨던 모든 말씀에 대한 결론이요, 또한 그 말씀들을 스스로 실천해 보이신 사건입니다.

식사 후에 예수님은 허리에 수건을 두르시고, 친히 대야 물을 떠와서는 무릎을 꿇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것입니다. 세상의 어떤 스승도 제자들의 발을 씻어준 스승은 없습니다. 이는 완전히 종의 모습이요, 자세입니다. 당시 유대인의 가정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입니다. 유대 나라는 비가 적고 땅이 건조하여 먼지가 많기 때문에 위생상 이렇게 손발을 씻고 집에 들어오고, 손발을 씻고 음식을 먹도록 했습니다. 유대인 가정에서는 종이나 하인들이 일을 했습니다. 허리에 수건을 두르고, 대야에 물을 떠서 무릎을 꿇고 앉아 주인이나 손님의 발을 씻어주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지금 제자들을 위해 종처럼 그들의 발 씻는 일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섬김을 받으셔야 할 선생님이 오히려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심으로 다른 사람을 섬기는 삶을 사셨습니다. 그러면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14절 읽음) 왜 예수님께서 이렇게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을까요? 이는 제자들에게 섬김의 본을 보이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린 이 예수님의 모습에서 참 신자의 모습을 봅니다. 교회와 신자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을 분명하게 볼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곧 ‘섬김’입니다. 다시 한번 본문의 14~15절을 보세요. 주님은 분명하게 ‘제자의 길’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섬김입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형제를 섬기고, 이웃과 세상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복이 있으리라.’(17)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섬기는 사람들에게 어떤 복이 있을까요?

첫째는, 섬김을 통해서 예수님을 만날 수가 있습니다.
헨리 나우웬은 그의 책 ‘예수의 이름으로’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성공을 향하는 인생의 오르막길에서는 예수님이 안보였지만, 어려운 이웃들을 섬기는 인생의 내리막길에서 복음서에 나타난 진정한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낮아져서 섬김의 자리가 곧 주님을 만나는 자리, 바로 알 수 있는 자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의 책들을 통해 우리 기독교의 영성은 ‘섬김의 영성’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섬김을 통해서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10:45)고 하셨습니다. 섬기는 종으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을 만나려면 어디로 가야하겠습니까? 섬기는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곳에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마25:40절에서 예수님은,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히13:1~2절에도,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원래 주님은 섬김의 종으로 오신 분이시기 때문에 섬김의 자리에 있을 때 주님을 만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어느 곳이든 섬기는 곳이면 거기가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자리입니다. 이것이 섬기는 자들이 누리게 될 복입니다.

둘째는, 섬김은 세상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보여줄 수 있는 방법입니다.
임마누엘 칸트가 ‘신에 대한 존재 증명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인식을 확장해 갈 수 없는 곳에는 실천으로 넘어가야 한다. 초월적인 존재, 곧 신은 설명할 수는 없지만 보여줄 수는 있기 때문이다.’ 제가 참 좋아하는 말 중에 하나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너무 크고, 넓고, 깊고, 위대하시기 때문에 인간의 이성으로는 감당할 수가 없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대상이지 증명의 대상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의 존재가 우리의 이성으로 증명이 가능하다면 그 분은 하나님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이성으로 하나님을 존재를 증명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을 보여줄 수는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이성으로는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어도, 우리의 삶으로는 그 분의 존재를 증명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 수가 있습니까? ‘섬김’입니다. 우리의 섬김을 통해서, 섬기는 삶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요14:7절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아버지를 알았고, 또한 보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빌립이 ‘주님,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시대도 마찬가집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 신자들을 향하여 던지는 질문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예수님을 보여달라! 하나님을 보여달라! 그러면 우리도 믿겠다.’ 저들에게 어떻게 예수님을 보여줄 수가 있고, 하나님을 보여줄 수가 있습니까? 그 방법이 곧 섬김입니다. 우리의 섬김을 통해서, 우리의 삶으로 주님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배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그러면 교회는 어떤 곳입니까?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섬기는 곳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섬김을 통해서, 섬김을 배우는 곳입니다. 사람들은 ‘생활예배’라는 말을 합니다. 아마 여러분들도 알고 있을 것입니다. 이 말은 교회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그 마음과 정신과 자세로 생활 속에서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가정을 섬기고, 사회를 섬기고, 이웃을 섬기는 것이 ‘생활예배’입니다. 우리는 이 생활예배를 통하여 삶 속에서 주님을 만나고, 주님을 나타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예수』라는 책이 있습니다. 섬김을 잃어버린 오늘날 교회와 신자들의 모습에 대하여 도전을 주는 책입니다. 이 책은 우리들이 잃어버린 예수님의 모습, 우리들이 회복해야 할 예수님의 모습을 ‘섬김의 정신’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핵심이요, 본질이라는 것입니다. 신자가 섬기는 자가 될 때 주님을 닮은 주님의 사람이 되고, 교회가 섬김의 공동체가 될 때 부흥하고, 교회의 순수성을 유지하고, 사회에 영향을 미치고, 위상이 높아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디아코노스(일군)요, 둘로스(종)요, 레이투르고스(봉사자)라는 사실을 잊지 맙시다. 섬기는 자란 뜻입니다. 우리 모두 섬기는 생활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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